[Travel] 푸른 빛, 영덕을 걷다

이상호(외부기고자) 2023. 2. 1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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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기댄 신산한 삶의 풍경
봄 소식을 기다리면서도 막상 떠나가는 겨울이 아쉽다. 다만 봄이 멀지 않은 지금은, 만나고 싶은 겨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너무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낯설지도 않은 곳. 아직 겨울의 선물을 남겨놓고 있는 영덕이 좋겠다. 꼭 대게가 아니어도, 눈이 시리게 푸른 동해바다만 바라봐도 좋을 여행지. 어딜 가든 살갑게 다가서는 영덕의 풍경을 담는다.

영덕 해맞이공원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영덕은 ‘그대 그리고 나’라는 TV 드라마로 기억되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IMF’가 터진 바로 그 해였다. 나라는 난생 처음 겪는 사태로 멘붕에 빠졌고 민초들의 삶도 덩달아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쳤던 시기. 그 드라마라도 없었다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 당시 시청률이 무려 62%가 넘었으니 한 집 건너 한 집은 그 드라마를 봤을 것이다. 고깃배 선장인 아버지와 도시로 떠난 자식들의 신산하면서도 팍팍한 삶을 진한 가족애로 표현했던 묵직한 드라마. 그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어촌이 바로 강구항이다. 그렇게 동해안의 작은 어촌마을 강구는 영덕이라는 고장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영덕은 어떤 곳일까. ‘그대 그리고 나’ 이후 영덕은 대게의 본고장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어필할 만한 계기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세상엔 ‘MZ세대’가 등장하고 ‘BTS’라는 불세출의 아이돌 스타가 탄생하면서 영덕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BTS의 ‘화양연화’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장소가 영덕에 있는 경정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덕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 어마어마한 인기와 팬덤으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지’가 되는 이른바 ‘BTS 성지’를 만들어 온 방탄소년단. 영덕은 그렇게 전 세계가 주목하는 여행 명소가 되었고, 졸지에 MZ세대가 줄지어 찾는 핫한 여행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덕은 다른 것 다 차치하고 그냥 바다만 보고 와도 족한 곳이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쪽빛 세상, 영덕의 바다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애틋한 삶의 터전 강구항의 새벽

새벽 3시 반. 아직 어둠 속에 파묻힌 강구항을 찾는다. 길게 이어진 대게 거리의 한편은 깊이 잠들어 있고, 바다 쪽 한편은 항구로 속속 들어오는 어선들과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떠들썩 활기가 넘친다. 아직 매서운 새벽 바람이지만 만선이 싣고 온 바다의 풍요는 항구를 뜨겁게 달군다. 종류별로 구분된 싱싱한 생선들이 어판장으로 옮겨질 때마다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든다. 분주하고 어수선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원칙과 질서가 그들을 인도한다. 어민들과 경매사, 인근 상인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 열띤 흥정을 주고받는 풍경은 격렬한 삶의 현장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손짓, 쏜살 같이 변하는 눈빛과 표정이 오갈 때마다 항구는 잠깐씩 격한 환호와 탄식으로 뒤덮인다.

보통 새벽 3~4시쯤 펼쳐지는 강구항의 경매 시장엔 대게가 아닌 다른 종류의 해산물들이 먼저 들어와 임자를 찾는다. 겨울의 끝자락인 요즘은 대구와 청어, 가자미, 아귀, 방어 그리고 문어 등 다양한 해산물들이 잡힌다. 특히 과메기의 원조, ‘영덕 과메기’를 만드는 청어도 많이 보인다. 대게는 그 다음이다. 한바탕 새벽시장이 파하고 아침이 되면 대게잡이 배들이 줄줄이 항구로 들어온다. 배에서 내려놓은 대게와 홍게가 어판장 바닥에 끝없이 펼쳐지고 또 한 차례 열띤 경매가 진행된다. 배가 만선이 돼도 불과 몇 마리밖에 잡히지 않는다는 박달대게가 먼저 걸러지고 그 다음, 크기와 상태에 따라 나머지 영덕대게가 분류돼 상인들에게 넘어간다. 홍게도 마찬가지다. 대게와 홍게가 풍기는 달큰한 냄새가 강구항에 퍼져 흐른다. 풍경은 그 이상으로 풍요롭다.

강구항은 사실 일제강점기 때도 동해안 수산물의 집산지이자 수출의 전진기지로 유명했다. 고등어와 꽁치, 골뱅이 등의 수산물과 송이버섯, 복숭아 등 영덕의 특산물들이 이곳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다. 안동의 명물이 된 간고등어 역시 강구항에서 가져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구항에는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얘기가 떠돌 만큼 잘 나가던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가 강구항이었다.
강구항 대게거리

어스름이 걷힌 강구항에 붉은 햇빛이 내비친다. 마침내 햇살이 퍼지면서 항구와 하나가 된 대게 거리가 서서히 깨어난다. 초대형 대게 모형을 머리에 올린 가게들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다. 영덕대게의 본고장에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날이 밝으면 수산물 경매가 이루어지던 어판장 부근에도 대게와 홍게를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앉아 손님을 맞는다. 강구항 끝에 있는 어시장과 난전에도 대게 천지다. 누구나 취향 것 또 형편에 따라 원조 영덕대게의 맛을 볼 수 있는 곳이 강구항이다.

반갑다 청어, 맛있다 과메기

대게와 함께 영덕을 대표하는 수산물은 청어였다. 우리가 흔히 꽁치로 알고 있는 과메기는 원래 청어로 만들던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청어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청어 대신 모양이 비슷한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꽁치 과메기가 대세가 된 것이다. 거기에 생산량이 많아 값도 싸고 만들기도 비교적 수월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러면서 청어로 만든 영덕 과메기는 ‘원조’라는 추억으로만 한참 동안이나 존재해 왔다. 그런데 귀했던 청어가 돌아왔다. 얼마 전부터 동해에서 청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원조 과메기의 고장’인 영덕은 반색을 하며 다시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꽁치 과메기를 먹던 사람들도 말로만 듣던 영덕의 ‘진짜’ 과메기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과메기는 ‘관목(貫目)’ 혹은 ‘관목어(貫目漁)’에서 유래된 말이다.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뜻이다. ‘목’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 ‘메기’가 붙어 ‘관메기’로 불렸고, 다시 ‘과메기’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겨울철 별미이자 진미인 과메기는 겨울 차가운 바닷바람으로 건조해 만든다. 포항 구룡포에서는 꽁치를, 영덕 창포리에서는 청어로 만들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바닷바람에 말려진 과메기는 수분이 날아가고 기름기가 배어 나와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과메기를 만드는 청어, 강구항의 새벽 어판장, 창포리 과메기, 강구항의 아침 풍경

제대로 된 청어 과메기를 맛보려면 영덕 창포리로 가야 한다. 창포마을은 청어 과메기를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곳으로 30여 가구가 그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청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하면서 마을주민들이 모여 청어과메기영어조합법인을 설립하고 ‘영덕 청어 과메기’를 지리적표시제(상품의 품질이나 명성을 지리적 특성에 두고 그 원산지를 증명하는 제도)에 등록된 브랜드로 키웠다. 청어 과메기를 생산하는 곳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창포리 바닷가에는 한겨울 내내 과메기 덕장이 펼쳐져 있다. 덕장에는 청어의 꼬리 부분을 남기고 반으로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등을 맞댄 배지기 과메기와 통째로 엮어서 말리는 통과메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배를 갈라 덕장에 널어놓은 청어는 은비늘이 반짝거리고 송진 같은 진한 기름이 손질된 생선 끝에 몽글몽글 맺혀 있다.
진짜 과메기를 맛보려면 창포리로 가야 한다.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한 가득 고인다.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과메기로 완성하기까지 보통 일주일 이상 걸린다. 3~4일이면 과메기가 되는 꽁치에 비해 숙성되는 시간이 배 이상 걸리고, 통과메기의 경우는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살집이 두툼한 청어는 수분이 천천히 빠져 말리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대신 기름진 맛이 진하게 배어들어 식감과 풍미가 뛰어나다. 특히 껍질을 벗기고 쫀득한 속살을 쭉쭉 찢어 먹는 통과메기는 창포리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짜 과메기’다.
과메기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만드는 겨울 별미다(위). 아래 우측이 조기처럼 통째로 말리는 통과메기, 좌측이 내장을 제거한 후 등을 맞대 말리는 배지기 과메기.

창포리 과메기 덕장은 한겨울이 절정기다. 추운 날씨에 큰 일교차가 더해지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쳐야 진한 풍미의 과메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덕장에 청어가 줄줄이 널려 있는 진풍경도 그때가 절정이다. 요즘 창포리 바닷가에는 몇몇 덕장에만 청어가 널려 있다. 길어야 2월까지밖에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잘 말린 청어 과메기는 겨울이 지나고서도 한동안 제철의 풍미 그대로 맛볼 수 있다. 그러니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온다고 걱정들 마시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입안에서 영덕의 겨울바다가 들썩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푸른 바다와 걷는 길 영덕 블루로드

영덕에는 길이 있다. 대게와 강구항 말고는 낯설기만 했던 고장 영덕을 감동의 여행지로 만들어 주는 푸른 바닷길이다. 영덕의 바다를 온통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길, 바로 영덕 블루로드다. 블루로드는 포항과 접한 남쪽의 부경리 대게누리공원부터 북쪽 해안의 고래불해수욕장까지, 64.6km의 바닷길을 걷는 트레킹 코스다. 한적한 어촌마을의 풍광과 물빛부터 다른 영덕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명품 도보여행길로 곳곳에 영덕이 자랑하는 여행 명소들이 있어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영덕여행의 백미 대부분을 느껴볼 수 있다.

영덕 블루로드의 코스는 모두 네 개. 남쪽의 D코스부터 위쪽으로 A, B, C코스가 이어진다. 왜 D코스가 맨 먼저 있을까 궁금해 할 수 있다. 답은 코스를 만든 순서. 가장 앞의 D코스가 맨 나중에 조성됐기 때문이다. 네 개의 코스에는 테마를 정해 감성 가득한 이름을 붙였다. 대게누리공원에서 강구터미널까지의 D코스에는 ‘쪽빛 파도의 길’, 강구항에서 해맞이공원까지 이어지는 A코스에는 ‘빛과 바람의 길’,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을 잇는 B코스에는 ‘푸른 대게의 길’,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C코스에는 ‘목은 사색의 길’이란 멋진 이름을 붙여 도보여행의 재미와 맛을 돋운다.
(위로부터)BTS가 다녀가면서 아미들의 성지가 된 경정리, 대게 모양의 창포말등대(2, 3번째 사진), 컬러 글자 조형물이 있는 해파랑공원과 대게조형물, 고래불해수욕장

D코스에는 전승기념관으로 꾸며놓은 장사해수욕장이 있다. 이름처럼 긴 백사장 끝에 정박해 있는 군함은 다소 생경한 모습이지만 영덕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장사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조그만 올라가면 영덕의 새로운 인증샷 명소가 된 삼사해상산책로가 있다. 해안도로에서 바다를 향해 ‘Y’자 형태로 만들어진 산책로는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MZ세대들이 영덕을 찾게 만드는 최고의 뷰 포인트이자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A코스에서는 영덕의 시그니처가 된 다양한 조형물들과 망망한 동해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핫플레이스들이 즐비하다. 큼지막한 대게 조형물이 서 있는 강구항 옆 해파랑공원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로 꼽히는 창포말등대, 그리고 푸른 동해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해맞이공원과 풍력발전단지가 그것이다.

영덕여행을 기념하는 사진을 남기려 한다면 마땅히 찾아봐야 할 멋진 장소들이다. B코스는 영덕의 바다와 한적한 어촌마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며, 마지막 C코스 ‘목은 사색의 길’에서는 면면히 흐르는 역사의 고장 영덕의 유구한 전통을 느껴볼 수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 목은 이색 선생의 흔적이 남은 괴시리 전통마을에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한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어릴 적 이색이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상대산에 올라 물을 뿜고 노니는 고래를 보았다는 그곳, 송림과 백사장이 아름다운 고래불해수욕장도 만날 수 있다.
(위로부터)MZ세대 여행자들의 핫플로 떠오른 삼사해상산책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정크 트릭아트 전시관.

모든 코스가 영덕여행의 백미로 꼽을 만한 멋진 도보여행길이지만 블루로드 전체를 걸을 수 없다면 한 코스만을 골라 걸어도 충분히 즐겁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중 딱 한 코스만 골라 걷는다면 망설임 없이 ‘푸른 대게의 길’인 B코스를 선택하겠다. 약 14㎞, 걷는 데 4~5시간 걸리지만 시종일관 바다와 나란히 걷는 길로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풍광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게 된다. BTS의 ‘화양연화’ 앨범 프롤로그 영상을 촬영해 전 세계 아미들의 성지가 된 경정항도 이곳에 있다.

영해만세시장에서의 우연한 발견

1919년 ‘3.18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영해장터가 영해만세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거룩하고 숭고한 의미를 간직한 시장은 영덕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그래서인지 시장을 찾는 여행자의 가슴을 잠깐씩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똑같은 먹거리에 생필품들이 널려 있는 시장이지만 마치 ‘거사’를 목전에 둔 장소처럼 비장함이 흐르는 듯하다. 아마도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만세를 부르듯 떠들썩한 광장으로 바뀌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그런 풍경이 그려진다.

영해만세시장은 면 단위의 시장치고는 비교적 규모가 크다. 물론 영덕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이다. 대게와 가자미, 문어와 은어 등 싱싱한 수산물과 복숭아, 시금치, 송이버섯 등 영덕의 특산물이 모두 모이는 곳으로, 매월 5일과 10일 열리는 장날에는 영해와 축산 일대에서 잡은 수산물들과 창수, 병곡 지역에서 재배된 농산물들이 한 자리에 집결하고, 지역민들과 여행자들이 한데 어울려 성시를 이룬다. 구수한 사투리에 살가운 정이 오가는 장터는 언제나 훈훈하다. “영해시장에는 안 보이는 것이 없고, 못 구하는 것이 없으며, 끊겼던 인연과도 만나고, 딸의 시집살이 소식도 듣는 곳”이라던 옛 시절의 영화가 헛말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는 곳이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수가 독립운동을 펼친 영해만세시장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 이곳 영해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영해면과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등에서 모안 민중들은 만세를 외쳤다. 당시 모인 사람들은 3000여 명으로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영해만세시장에는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획과 행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해장’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는 시장을 3.18만세운동의 정신이 담긴 새로운 해방 공간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진다. 영덕문화장터 ‘예술로 만세’ 역시 영덕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영해만세시장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만난 프로젝트는 신선하다.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시도하는 대개의 기획들과는 달리 영덕의 역사성이 잘 녹아 든 콘텐츠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고 투박하게 담아 낸 만세사진관

영해만세시장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하나로 기획된 ‘만세사진관’은 영해만세시장의 오늘을 담은 사진전이다. 시장과 시장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고 투박하게 담아낸 사진들이 정현종 시인의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라는 타이틀로 전시되고 있었다. 회색빛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작고 낡은 공간에 풍경으로 피어난 시장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꽃처럼,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누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세사진관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듯 싶다. 주변 상인의 말에 따르면 만세사진관은 한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영덕 여행을 다녀와서도 만세사진관에 대한 잔상과 기억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만세사진관 옆의 작은 카페도 인상적이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3월18일을 간판으로 내건 카페 ‘3月 18日’. 대구에서 영덕으로 귀촌, 영해만세시장에 터를 잡은 젊은 주인 남매는 “영해장의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고 싶었다”는 말로 카페를 소개했다. 작은 공간을 손수 꾸미고, 전통시장과는 살짝 언밸런스한 롱블랙과 발로나, 아포카토와 같은 감성 넘치는 커피를 만들어 판다. 생각부터 시도까지, 싱그러운 청년의 모습이다. 그들을 보며 강원도 양양의 한 바닷가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순수하면서도 당찬 도전으로 그들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일궈나가는 모습이 서로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바닷가와 시장이라는 장소는 다르지만 그들이 그려가는 세상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희망 섞인 상상이 저절로 그려지는 곳. 영해만세시장의 우연한 만남이 준 선물이다. 다시 영덕에 가면 꼭 들러보고야 말 것 같은 예쁜 공간이었다.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7호(23.2.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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