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기능은 쓰는 사람이 만든다’… 용도에 자유를 불어넣다[지식카페]

2023. 2. 17.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최경원의 지식카페 - (24) 테요 레미
놀이기구 없는 놀이터·울퉁불퉁 비정형 벤치… ‘디자인은 이래야 한다’는 상식 깨뜨려
상업성 포기한 듯 근본적 가치에 몰두… 익숙한 듯 지나치는 삶에 뒤통수 맞는 느낌
You can’t lay down your memory 서랍장, 1991.

네덜란드의 산업 디자이너 테요 레미는 매우 독특한 디자인들을 내놓는다. 그의 디자인은 일반적인 디자인들이 지향하는 깔끔한 산업적 외향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고, 상업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디자인은 철학적으로 심오해 보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근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어린이 놀이 공간을 보면 이 디자이너가 얼마나 다른 차원에서 디자인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놀이기구는 하나도 없고, 섬처럼 생긴 울퉁불퉁한 구조만 있다. 아이들이 이런 비정형적인 공간에서 자기 나름대로 노는 방식을 개발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No man is island, 포포타 호프, 2015.

재미있는 것은 섬처럼 생긴 구조물의 재료는 시멘트인데, 표면이 마치 부드러운 고무처럼 보인다. 실제로 고무로 만들어진 형틀에 시멘트를 부어서 성형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위에서 아주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면서 자유롭게 놀 수 있다. 구체화되지 않은 구조물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이 방법을 만들어가면서 놀게 한 접근은 놀이 방식을 획일적으로, 기계적으로 몰아가는 일반적인 놀이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것이 아이들에게 좋을까? 나아가 이런 시설은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삶을 여러모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암초 벤치, 2009.

암초 벤치는 개념적으로, 구조적으로 좀 더 나아간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흔한 재료인 각목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데, 중등학교 옥상에 만들어 놓은 휴식 시설이다. 벤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비정형적으로 생긴 나무 구조 위에 앉을 수도 있고, 하늘을 보며 누울 수도 있으며, 여러 명이 어울려 있을 수도 있다. 비정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용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구축된 완벽한 기능주의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완벽한 기능은 디자이너가 만드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모래 언덕같이 생긴 벤치 구조는 학교 건물의 딱딱함도 완화시키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환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는 이런 모양을 일부러 컴퓨터로 만들지 않은 디자이너와 제작자의 선택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흔히 첨단 기술만 사용하면 좋은 줄 알지만 기술은 언제나 적합하게 사용해야지 모든 곳에 첨단 기술을 적용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의 손길이 자욱하게 깔려 있는 디자인이 더 큰 역할을 할 경우도 있다.

암초라는 이름도 재미있다. 유기적인 모양을 은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암초는 물고기들에게는 아주 안전한 공간이기 때문에 이 벤치의 성격을 암시하기도 한다. 옥상 위에 있는 암초라니 디자이너의 문학적 센스도 참 재미있다.

놀이터 울타리, 2012.

울타리, 펜스라고 하면 이쪽과 저쪽을 단절시키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테요 레미는 한 초등학교의 펜스를 돌출시키고, 함몰시켜서 독특한 구조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견해로는 이쪽과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친하게 교류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같은 물체를 보는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아무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익숙하게 지나치는 것에서 뒤통수를 때리는 지혜를 이끌어내는 디자이너의 고매한 정신성에 감탄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런 탁월한 철학적 시각을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한 디자인 솜씨가 놀랍다. 테요 레미는 울타리와 벤치의 단절성을 만나고 머무르는 상호작용성으로 바꾸는 데 있어 기존의 펜스 구조를 단순하게 변형시키고 그 일부분에 나뭇조각들을 보강하는 정도로만 해결했다.

이렇게 간단한 처리로 만들어진 움푹하고 오목한 좌석 공간들은 안과 밖을 만나게 해주면서도 예술적인 리듬으로 다가오고, 고급스러운 라운지처럼 보인다. 일부러 안팎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다.

사물의 존재성에 대한 이런 관심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의자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룬다. 의자를 건물을 지을 때 쓰는 콘크리트로 만든다는 것도 희한한데, 그렇게 만들어진 콘크리트 의자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푸석하고 건조한 시멘트의 느낌을 완전히 배반한다.

콘크리트 의자, 2010.

콘크리트는 건물을 지을 때 판자로 만들어진 형틀에 부어서 굳히는 재료이다. 주로 건물을 만드는 데만 쓰이다 보니 콘크리트는 으레 딱딱하고 직선적인 형태로만 만들어진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데 테요 레미는 풍선 같은 소재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굳히면 매우 부드러운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물놀이 기구에 많이 쓰는 튜브 소재의 형틀에 의자 모양을 성형해서 정말 새롭고 놀라운 의자를 만들었다.

튜브 구조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서 주름이 진 의자 모양은 도저히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 의자를 보면 꼭 손으로 만져보면서 앉아도 괜찮은지 확인하게 된다. 표면이 정말 튜브처럼 부드러운데, 그 반대로 무겁고 단단함이 느껴져서 상당히 놀라게 된다. 그래서 이 의자는 단지 재료의 착시 효과만을 추구한 의자가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나무, 철 등의 재료로만 만들어졌던 기존의 의자와는 완전히 다른 속성의 재료와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매우 실험적이고 미학적인 의자라 할 수 있다.

콘크리트라는 단단하고 딱딱한 재료로 완전히 반대의 속성을 의자라는 실용품을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웬만한 예술작품도 이르기 어려운 예술적 경지이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울러 재료의 비용이나 의자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제작 공정을 생각할 때는 가장 저렴하고 기능적인 의자 디자인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이다.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진 이 서랍장은 테요 레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디자인으로 그 이름만큼이나 감동을 준다. 서랍장이 기능적이거나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감동을 준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서랍장을 보면 명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다. 집 밖에 폐기장을 붙여서 내놓은 가구라 해도 믿을 정도다.

서랍장이라고는 하는데, 장은 없고 서랍만 있는 것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물체가 유명한 디자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유는 이 서랍장을 이루고 있는 낡은 서랍들에 있다. 원래 테요 레미가 이 서랍장을 만들 때의 서랍장들은 집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것들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가족들이 함께 살면서 손때가 묻고 사연들, 그러니까 가족의 역사가 누적돼 있었던 가구들의 서랍들로 서랍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이삿짐 용달차에서 쓰는 밴드 같은 것으로 많은 서랍장을 한데 묶어서 서랍장을 만들었다. 밴드로 묶을 때 서랍장들을 반듯하게 쌓지도 않고 비뚤어진 것은 비뚤어진 대로 그냥 묶어 버렸다. 이런 방식이 깔끔하게 칠하고, 똑바르게 정돈한 형태보다 더 의도에 부합했다. 테요 레미가 서랍장의 이름을 그렇게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족의 역사, 집 안의 문화인류학적 흔적들로 디자인된 이 서랍장은 그 어떤 값진 재료와 빼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서랍장들과는 다른 독보적인 가치를 가지게 됐고, 나아가 디자인이 가질 수 있는 가치, 디자인을 하는 과정을 질적으로 확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디자인들을 내놓으면서 테요 레미는 지금도 디자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상식을 계속해서 무너뜨리고 있다. 많은 디자인이 기능이나 상업성 같은 세속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테요 레미는 보다 근본적인 가치를 지향하면서 디자인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테요 레미 Tejo Remy (1960∼)

△1960년 : 네덜란드의 네이메헌 출생

△1986∼1991년 : 위트레흐트의 예술 학교에서 공부

△1991년 : 서랍장 ‘You can’t lay down your memory’ 디자인

△2006년 : Designers making space 전시

△2007년 : Bamboo Labs 에인트호번 프로젝트

△2009년 : 암초 벤치

△2012년 : 소셜 벤치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