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아라”, 〈어른 김장하〉 울림을 담다
경남 창원시 마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10여 분 달려 창원의 한 아파트 단지에 내렸다. 주소에는 ‘2부두’라고 쓰여 있는데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28층에 올라가자 김주완 기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거실에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먼저 온 김현지 PD가 일행을 맞았다. 김 기자의 서재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초입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진주를 비롯해 경남 일대 역사를 다룬 책과 민간인 학살 등 현대사 자료가 빼곡한 방에서 그가 담배를 태웠다. 화면에서처럼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기서 기차로 20여 분 더 가면 진주시다. 2022년 5월 문 닫은 남성당한약방이 있던 곳이다. ‘김장하 선생’이 있는 도시다.
김주완 기자는 1991년, 〈남강신문〉 2년 차 기자일 때 김장하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다는 뉴스를 통해서였다. 헌납 소식보다 부자인데 승용차가 없다는 사실이 더 인상적이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언론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린다고 했다. 이듬해 자리를 옮긴 일간지에서는 취재기자 대부분이 적은 월급에도 승용차를 몰았다. 비결은 촌지였다. 기자실을 통해 나오는 촌지는 받아도 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던 시절이다. 차 없이 사는 김장하 선생이 떠올랐다. 사람을 도울 순 없어도 떳떳하지 못한 돈을 받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기자 생활 32년. 국가 폭력의 흔적을 추적하고 토호 세력을 고발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세력이 출몰했다. 회의감이 들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맡은 뒤 사람 냄새 나는 신문을 표방하며 좋은 이웃, 좋은 어른을 찾았고 채현국 선생을 인터뷰해 〈풍운아 채현국〉을 출간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로 유명한 효암학원의 이사장이다. 선한 영향력이 확산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후 시대의 어른을 소개하는 연재 원고를 모아 책으로 냈고 한 챕터를 김장하 선생 이야기로 채웠다. 허락하지 않을 게 뻔해 무작정 쓰고, 뒤늦게 한약방을 찾아갔다. 찾아온 사람을 내치지는 않는 성정을 파고들었다. 김장하 선생은 야구 얘기를 하면 밝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그간 도움을 준 장학생이 몇 명이냐고 물으면 입을 닫았다.
MBC경남 입사 16년 차 김현지 PD는 2019년 김장하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소문대로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했지만 우회로가 있었다. 긴 시간 그를 탐구해온 김주완 기자를 섭외했다. 두 사람은 2021년 말부터 함께 취재에 나섰다. 김 기자가 정년을 3년 앞당겨 퇴직한 시기와 겹쳤다. 김장하 선생이 한약방을 하며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진주 지역 장학생 여럿을 도운 줄은 알았지만 그 수가 1000명을 웃도는 데다 문화예술계, 환경·노동·농민·여성 등 시민사회 분야, 지역 언론, 서점 등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취재 과정에서 진주 ‘형평운동(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의 선구자 강상호의 묘에 비석을 세우는 데 비용을 후원한 익명의 ‘작은 시민’ 역시 그라는 걸 알게 됐다. 기자의 직감이 맞았다. 그와 직접 연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어쩌다 마주친 마을 사람들도 김 선생의 돈을 ‘내 금고처럼 갖다 썼다’고 증언했다.
김장하 선생을 정식으로 인터뷰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행사나 모임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가면 ‘서랍에서 돈을 꺼내 탁탁탁 쳐서 탁 주었다’는 농민운동가도 있었고, 감사 인사를 하자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으라’는 말을 들은 장학생도 있었다. 남성당한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찾아온 한 남성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김장하 선생은 답한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그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통해 번 돈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남긴 어록 중 가장 회자되는 말이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리면 좋은 거름이 된다.”
김현지 PD와 김주완 기자의 협업이 각각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와 책 〈줬으면 그만이지〉로 나왔다. 연초부터 입소문을 타다 설을 전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선생의 삶에서 위로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후기가 이어졌다. 김장하 선생은 2021년 12월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한 뒤 남은 재산 약 34억원을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1963년부터 60여 년 운영해온 남성당한약방도 문을 닫았다. 다큐멘터리 영상 말미, 그는 등산을 할 때 그저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가면 된다고 말한다. 사부작사부작, 한평생 거름을 뿌리며 살아온 그를 근거리에서 취재한 두 사람을 만났다. 김현지 PD는 김주완 기자를 (경남도민일보) 국장이라고 부른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가 사진을 찍자 “국장님은 늘 기록한다”라고 김 PD가 귀띔했다.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보나?
김주완:잘 모르겠다. 워낙 꼴불견인 어른이 많이 보이고, 나이 들면 꼰대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선입견을 확 깨는 분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화나는 뉴스 일색인데 선생의 이야기에 일종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김현지:최근에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선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평생 잘 지키고 사셨다.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할 수 있구나, 이런 사실이 위로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당사자의 반응은?
김주완:별 반응이 없다. 김 PD가 “혹시 다큐에서 추가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은 없던가요?” 물었더니 “그거는 뭐 PD의 영역이지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거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김현지:어차피 허락도 안 받고 한 거라… “수고했네” 그 정도고 별 말씀 안 했다.
각각의 결과물에 대한 소감이 궁금하다.
김현지:김주완 국장이 워낙 꼼꼼하게 취재하니까 편집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했다. 영상에는 다 담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영상을 보다가 책이 읽고 싶어지고, 책 먼저 읽은 분들은 어떤 사람인가 영상이 궁금해서 보는 것 같다. 좋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김주완:삶 자체가 감동인 어른이니까 사람들한테 화제가 될 수 있겠다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다큐멘터리가) 상상 이상으로 반향이 커졌다. 방송에 패널로 출연은 해봤어도 다큐를 함께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조각조각을 어떻게 이을지 감이 잘 안 왔다. 방송 전 내부 시사회를 했는데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초반에 토호 세력을 취재해 고발하며 느낀 좌절감을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굳이 저 장면을 왜 넣었을까 생각했다. 어색하고 불편하달까. 방송이 나가고 SNS 감상평을 봤다. 김장하 선생이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 30년 동안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했는데 없어지지 않아 느낀 좌절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시청자가 앞의 내 이야기와 겹쳐서 생각하더라. 아, 그래서 내 몸이 필요했구나, 그런 장면이 몇 군데 있다.
다큐멘터리와 책의 제목이 다른데.
김현지:다큐 제목을 국장님께 많이 물어봤다.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제목이 멋있었기 때문에 지어달라고 졸랐는데 잘 안 나오더라. ‘어른 김장하’는 너무 가부장적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국장님 책은 페이스북에서 투표를 했는데 제일 많은 표를 받은 제목이 ‘줬으면 그만이지’다.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찰떡같이 어울린다. 요즘 우리 사이 유행어다. 좋으면 그만이지, 했으면 그만이지. 후회되더라도 할 수 없는, 정신건강에 되게 좋은 말이더라.
김주완: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A man who heals the city)이 ‘힐 더 시티’가 아니라 ‘힐 더 네이션’이 되어야 한다더라.
취재는 같이, 결과물은 따로다. 기자와 PD 간 이런 방식의 협업이 전에도 있었나?
김현지: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MBC경남이 〈경남도민일보〉와 ‘콜라보’해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기는 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에서 신뢰가 있어서 좋은 동업자였다. 개인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데 국장님이 지역 근현대사에 대해 오래 취재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컸다. 2019년에 주인공 없는 인물 다큐가 가능하다는 망상에 가까운 기획을 했는데, 이야기가 중구난방이 될 것 같아 ‘키맨’이 있었으면 했다. 어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콘셉트이고 김주완 기자가 유일하게 관련해 책을 쓴 분이었다.
김주완:전화로 제안을 받고 검색해보니 (김 PD가)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했더라. 어차피 취재를 하고 있으니 같이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글과 영상은 문법이 다른데, 취재 과정에서 부딪치는 부분은 없었나?
김주완:내가 취재하는 걸 자연스럽게 찍는 건 좋은데,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연출을 하면 못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런데 실제 촬영을 나가보니 다시 한번 해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런데 촬영감독이 너무 힘들게 장비를 챙겨 들고 다니며 바닥에 누워 찍는 걸 보니 마음이 짠해가지고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또 신문기자는 질문하고 답변을 들으면 끝인데, 다 끝나고도 이야기를 좀 더 나누라고 해서 왜 그러냐니까 ‘인서트’를 찍는다고 하더라. 인터뷰 장면만 계속 보여줄 수 없어서 장면이 전환되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김현지:초면일 때 “나는 연출 안 돼요” 이렇게 말하시니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연출이라고 생각 안 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국장님은 할 일 다 했고 이제 담배 피러 가야 하는데 뭐 하는 짓이야 이러고(웃음). 나중에 이해가 됐다. 신문기자의 질문과 PD의 질문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국장이 “본관이 어디십니까, 고향은 어디십니까” 이거부터 시작해 팩트체크를 완벽하게 해놓으면 내가 추가로 ‘감정이 어떠셨냐, 어떤 기분이셨냐’ 묻는 식이다. 물론 메모리 용량의 압박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렸지만 (취재가 잘되어 있어) 후작업이 편했다.
수백억 원대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할 때는 감동을 못 느끼고, 자가용이 없다는 데에는 왜 그렇게 의미를 두었나?
김주완:김장하 선생 말고도 재산을 기부한다든지 장학재단을 설립한다든지 이런 일은 흔히 있다. 뉴스에도 많이 나온다. 그런 분인가 생각했는데 부자가 차가 없다?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이건 내가 알던 상식을 깨는 일이었다.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그러려면 그 사람 연락처를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한테 물어보니 다들 콧방귀를 뀌면서 절대 인터뷰를 안 할 거라고 하더라. 최대 후원자로 있는 〈진주신문〉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보통 처음에는 사양해도 몇 번 시도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응했다. 끝까지 인터뷰를 안 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냥 부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내 나름대로 열혈 운동권 출신이었다. (1989년 전교조 해직 사건 당시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명신고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해직시키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생각이 좀 진보적인 건데, 부자가 진보적이라는 것도 상식을 깨는 거였다. 탐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김현지:여태까지 아무도 인터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인터뷰 없이도 만들 수 있지 않나, 좀 알려야 하지 않나 싶었다. 비슷한 콘셉트의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도 있고. 이후에 아이템이 밀리다가 PD 출신 사장이 부임했는데 김장하 선생 얘기를 듣더니 안 믿다가 한번 같이 뵈러 가자고 하더라. 남성당한약방이 영업할 때라 대표번호로 전화했다. 직원이 받을 줄 알았는데 선생이 직접 받아서 덜덜 떨면서 통화했다. “한번 찾아봬도 될까요” 하니 “그러시든가요” 이런 식이었다. 찾아가 내년이 형평운동 100주년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촬영 허락은 안 하고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사장이 만나고 와서 ‘이건 해야 된다, 하자’ 했다.
다큐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선생에게 도움받은 일화가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었다.
김주완:책에도 나오는데 여성단체를 지원한 줄 몰랐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을 했다고 경력에 나와 있길래 그냥 관변단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 인물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설 이름이 나왔다. 실제로 찾아보니 가정폭력 피해 여성 보호시설이더라. 존재 자체를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되었고 호주제 폐지에도 힘을 실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여성단체 사람들이 캠페인을 벌이는데 선생이 유일한 남성이다. 그 연배에 여성에 대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김현지:44년생 경상도 남자가 갖기 어려운 부분을 갖고 있었다. 만나면 굉장히 평온하시다. 나는 마음이 시끄러운 사람이라 일과 관련 없이도 계속 찾아가 뵙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김주완:선생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말투도 퉁명스럽고 무표정해 무섭다고 느끼기 쉬운데 계속 만나 뵙고 알게 되면 유머러스하다. 유머를 준비해 오신다. 다큐와 책이 나온 이후 선생이 밥을 사주셨는데 그때도 들려주셨다. “머리를 감을 때 어디서부터 감는 줄 알아?” 이렇게 물어보더라. 그래 우리가 어디부터 감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눈부터 감아야지” 하더라.
김현지:옛날이야기처럼 뭔가 얘기해주실 때도 있다. 그날 들은 얘기다. 사돈들끼리 식사를 하는데 손님 사돈이 밥을 먹다가 돌을 씹어서 주인 사돈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돌이 너무 많지요” 그랬더니 “아닙니다. 그래도 쌀이 많습니다”라고 답했다고. 그냥 짧은 이야기고, 선생님은 편하게 해주셨는데 되게 곱씹게 됐다.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래, 그래도 쌀이 많아’ 이러면서 자기 위로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게 좋았다.
섭외 등 취재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나?
김주완:특별한 건 없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인터뷰를 사양했지만 거절이 아니라 사양이다. 2019년 (진주 시민사회가 몰래 준비한 김장하 선생) 생일잔치 때 자기가 이야기한 영상도 있으니 활용하면 된다고 하더라. 그 이상 부각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김장하 장학생을 더 찾을 수 있었지만 더 많이 찾아 부각시킬 필요성을 못 느꼈다. 장학생들이 알려지고 모임을 갖는다든지 하는 자체를 선생이 꺼려 한다.
김현지:남들이 이렇게 칭송하면 그래도 조금 안 좋은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걸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계속 찾는데 안 보일 때 답답했다. 스무 살 때부터 김장하 선생과 일한 직원에게 “아무 약점이 없는 게 말이 안 된다. 뭐라도 하나 말해달라” 했더니, 그냥 뭐 재미가 없는 사람이고 남 돕는 일밖에 안 했다고 했다. 너무 답답해서 “무좀이 있든지 코를 골든지 뭐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이러니까 또 진지하게, 산에 같이 가봤는데 무좀도 없다고 하더라(웃음).
취재 과정이나 후기 중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면 들려달라.
김현지:누가 다큐를 보고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나오는 콘텐츠를 보면 되게 불편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후기를 봤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출연자가 말을 정제해서 정성스럽게 하더라는 것이다. 김장하에 대한 증언을 하고 싶어 벼르던 사람들처럼 말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김주완:책에서 사람들이 인상 깊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없더라. 선생이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할 때 교육청이 고용승계를 했는데 서무과장이던 동생만 사표를 내도록 했다.
김현지: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동생이 마흔다섯 살 때면 한창 일할 때인데. 형님이 그만두라고 하면 저 같으면 뭐라고 했을 것 같다. 가족들이 대단하신 것 같다. 사모님께 얼마나 힘드셨을까 여쭤본 적이 있다. “말이 돼요? 나이 40에 남편이 갑자기 전 재산 털어서 남한테 다 줘버리고.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하고 싶다는데” 이러시더라. 자제분들도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 조심했을 것 같다. 우리가 볼 때 가족이 화목한 것 같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취재원이 있다면?
김주완:정식으로 요청해 조명 켜놓고 인터뷰한 분들도 있는데 사천시 석거리에서 만난 강남선 할머니는 우연히 만났다. 그냥 툭툭 던지는 말이 너무 재밌었다. 김장하씨가 좋은 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거 취재하러 왔다고 하니까, “우리 금고처럼 돈 갖다 썼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카메라 보고 말투가 퉁명스럽던 분도 김장하 선생 취재한다니까 그런 사람은 할 만하다고 하기도 했다. 또 선생의 처남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선생의 장학금 심부름을 했다고 말했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젊은 나이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김현지:영상 편집할 즈음 선생 댁에 갔는데 장학생 명부로 보이는 책을 봤다. 학생들 이름을 비롯해 뭘 줬는지 쓰여 있었다. 대학에 가지 않은 학생도 많았다. 꼭 공부 잘하는 사람, 대학 가서 인재가 될 사람만 지원했던 게 아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을 돕고 싶으셨던 것 같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니까 덮으시더라. 우편환 영수증도 있었다. 본인의 추억처럼 기록해놓은 게 아닌가 싶다.
김장하 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취재원에게 항상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하던데.
김주완·김현지:(극단현장 고능석 대표의 말대로) 이 시대의 강상호 선생이다. 진주 지역의 3·1운동 주모자이고 형평사를 설립해 백정해방운동을 벌였다. 천석꾼 집 아들인데 돌아가실 때는 묫자리 하나 없을 정도로 다 털어놓고 가셨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유림의 양대 산맥인데 퇴계 이황은 이론 중심, 남명 조식은 실천 중심이다. 김장하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한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직접 쓴 논문 ‘진주 정신에 관한 소고’에서도 진주 정신을 주체·호의·평등 세 가지로 말한다. 호의와 평등을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한 것 같다.
지역 언론인 간의 협업이었다. 지역 매체 종사자로서 그간의 고민을 들려준다면?
김주완:한국이 서울 중심의 폐해가 좀 많은 나라다. 서울에서 창원으로 출장 온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 ‘나 지방이야’ 이런다. 창원이라고 안 하고. 그게 서울 사람들 특징이고 서울 중심이라 그렇다. 지역에도 삶이 있고 그 삶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그런 기록이 별로 없다. 초창기 기자 생활을 할 때 그걸 가려내는 데 집중을 많이 했다. 처음 쓴 책이 〈토호 세력의 뿌리〉다. 지역사회에서 공론장 역할을 해주는 매체가 필요한데 지역 언론사의 매출 상당수가 지자체에서 나오니까 권력 감시나 비판이 어렵다. 기자들이 게으르기도 해서 주민이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취재를 잘 안 한다. 보도자료나 행사 위주의 기사를 쓴다. 편집국장 할 때 평범한 동네 사람을 취재하고, 버스 정류소 상습 불법주차를 1면 톱으로 쓰기도 했다. 그게 무슨 톱이냐 생각할 수 있는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언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지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는 효능감을 지역민에게 주어야 지역신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도 가지게 될 것 같다.
김현지:서울 사람들은 서울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언론이 ‘인서울 4년제 대학 졸업자’ 눈높이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새로운 이야기는 변방에서 온다. 지역 방송 PD가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내가 이번에 다큐를 했지만 내년에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고 예능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다만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이외의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고, 담으려고 노력한다. 지역의 삶과 생태계도 더 집중해서 바라보고 싶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더 잘 안다, 거기서만은 우리가 스페셜리스트다.
〈진주신문〉 이야기도 나오지만 지역언론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김주완:요즘 다행인 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기자 지망생이 별로 없었다. 특히 지역신문 기자를 지망하는 학생이 별로 없다. 공채를 하면 꼭 기자가 되고 싶다기보다 취업난이 심하니까 넣었다가 덜컥 되어서 일주일 만에 도망가기도 한다. 요즘은 세명대 등 기자 양성 과정이 많아 출신 학생들이 지원을 한다. 〈경남도민일보〉가 소신껏 기자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고 지망한 사람들이다. 잘하기도 하고 열심히도 한다.
김현지:PD 지망생들에게 1지망은 아니더라도 ‘MBC경남은 조금 다를 거야, 좀 더 매력적인 방송사야’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PD들이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16년 동안 일했는데 이렇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낯설고 어리둥절하고 이러다 큰일 나는 게 아닌가 무섭기도 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슬프기도 하다.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좀 더 많은 루트를 통해 보여지면 좋겠는데 기회가 참 적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선배들이 못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알려질 방도가 적었던 것 같다. 〈어른 김장하〉는 선생이 워낙 독보적이고 시대 상황이 원해 유튜브를 통해 널리 퍼졌던 것 같다.
창원·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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