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에 블랙홀이 뻥?… 행인들께 ‘남산 뷰’를 선물합니다

김미리 기자 2023. 2.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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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문훈이 설계한 해방촌 빌딩 ‘다이아곤’
문훈이 설계한 해방촌 상업 시설 ‘다이아곤(Diagon)’. 왼쪽 구석 움푹 팬 부분의 뚫린 구멍에서 계단이 시작된다. 이 계단이 건물을 관통해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뒷면의 3층 발코니로 연결된다. /사진가 김창묵

“저 구멍은 뭐지?” 남산서울타워가 보이는 해방촌 언덕 꼭대기. 지나가던 행인들이 범상치 않은 건물을 한참 들여다본다.

전면에서 보면 왼쪽 구석은 한입 베어 문 듯 잘린 구(球) 형태로 움푹 팼고, 오른쪽 위엔 미니언 눈 모양 동그란 창이 달렸다. 움푹 팬 부분에 블랙홀처럼 뚫려 있는 새까만 구멍이 입구. 안으로 들어서니 동굴 같은 계단이 3층 발코니까지 이어졌다. 이 계단의 끝, 건물 앞쪽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에선 상상할 수 없던 반전이 펼쳐졌다. 해방촌부터 저 멀리 남산 하얏트 호텔까지 가슴 뻥 뚫리는 전망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다이아곤'의 뒷면. 황금색 부분이 계단을 통해 행인들이 올라갈 수 있는 3층 발코니다. /김창묵

이 건물은 건축가 문훈(55·문훈발전소 대표)이 설계해 작년 말 해방촌에 들어선 상업 시설 ‘다이아곤(Diagon·대각선)’. 지난달 ‘아키데일리’ 등 해외 건축 매체에서도 소개된 화제작이다. 2020 두바이 엑스포 한국관, 홍대 앞 상상사진관, 현대고 현정관 등을 설계한 문훈은 자칭 ‘그로테스크 건축가’. 도발적 형태, 과감한 컬러로 단순·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건축 판에 도전하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다.

다이아곤 옥상에서 남산을 배경으로 선 건축가 문훈. /김미리 기자

이번 프로젝트는 지하 1층·지상 2층짜리 낡은 다가구 주택을 리모델링해 지상 3층 건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이트에 와보고 깜짝 놀랐어요. 기존 건물이 전망을 가로막고 있어 몰랐는데 건물 뒤로 가니 기막힌 풍광이 나타나더라고요. 건물이 전망을 독점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뒤집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꽁지 머리로 등장한 문훈이 건물 옥상에서 말했다. “저는 근엄하게 공공성 따지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크든 작든 재미있는 일이 항상 일어나는 공간, 마을을 축제로 만드는 건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블랙홀 같은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펼쳐지는 탁 트인 전망. /김미리 기자

‘행인에게 전망을 나눠주는 건물’이라는 미션을 푸는 열쇠는 계단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 사선 계단이 건물을 관통하게 설계하고, 계단실을 개방해 누구나 건물 뒤로 펼쳐지는 전망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건물 이름에 영어로 사선을 뜻하는 ‘다이아곤’이 붙은 이유다. 문훈은 이 계단실을 우주의 두 공간을 연결하는 가상 통로인 ‘웜홀(wormhole)’에 비유했다.

다이아곤 실내 풍경. 건물을 관통하는 계단실이 내부로 돌출해 독특한 조형물처럼 보인다. /김창묵
다이아곤 단면도

건물을 관통하는 계단은 독특한 내부 공간을 연출했다. 층마다 거대한 동물의 몸통 같은 구조물이 한가운데에 돌출해 있다. 네모 반듯한 공간에 익숙한 이들에겐 장애물 같지만, 생각을 바꾸면 파티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치다.

초승달 모양으로 디자인한 3층 발코니. /김창묵

엄연한 개인 건물인데 공공에 일부를 개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문훈은 거장 루이스 칸의 ‘공공을 향해 열린 건축’을 언급했다. “칸이 킴벨 미술관을 설계할 때 미술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도 배려해야 한다면서 기둥과 덮개만 있는 야외 공간을 만들었어요. 작은 상업 시설이지만 이 건물에서도 그런 열린 태도를 담았습니다.” 1층 입구는 계단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앉게 했고, 일반인에 개방된 3층 발코니엔 초승달 모양 조형물을 붙여 난간에 서면 공연장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도록 했다.

'다이아곤' 입구.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단에 자연스럽게 앉게 설계했다. /김창묵

이런 실험은 건축가의 상상력으로만 실현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건축주의 마인드다. “실용성과 가성비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임대용 건물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삭막한 도시에 재미와 감각을 불어넣는 건축, 일상에서 지역 주민과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예술적인 조형물을 짓고 싶었어요.” 건축주 부부인 서영석(53·한의사), 이소연(47·의사)씨의 얘기다. 두 사람은 “한때 임차인 입장에서 공간 효율성을 따져 동선을 다시 짤까도 고민했지만 당장의 수익보다는 문화를 나누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작품 전시 공간이 부족한 젊은 작가나 뮤지션들에게 계단실과 일부 공간을 무상으로 며칠씩 빌려줄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한다. 전망을 열어 놓듯 쓰임도 열어 놓은 공간. 해방촌이라는 동네 이름과 어울리는, 고정관념에서 해방된 건축이다.

'다이아곤' 옥상에서 바라본 전망. /김창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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