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13] 유대인들, 종교의 자유 찾아 암스테르담에 몰려들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3. 2.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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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저지대 간척의 역사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저지대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해수면과 지반의 침강과 융기를 통해 현재의 지형을 형성했다. 저지대는 해수면보다도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흔한 언덕조차 보기 힘든 평평한 늪지대와 갯벌이 대부분이었다.

◇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네덜란드 텍설(Texel)섬에서 덴마크 남부 해안까지 이어지는 바던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에서도 가장 큰 갯벌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 차가 3m가 넘고, 길이는 약 500㎞, 넓이는 약 1만㎢에 달한다. 라인강, 마스강, 스헬더강 등 북부 유럽의 3대 강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바덴해 갯벌. /위키피디아

그러다 보니 저지대 해안가가 모두 강 하구에 쌓인 침적토와 갯벌과 늪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홀란트주는 늪지대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주민들이 간척한 땅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1270년경 어민들이 암스텔(Amastel)강에 둑[Dam]을 쌓고 다리를 놓아 늪지대를 간척하여 정주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이름이 그대로 암스테르담(Amastel+dam=Amasterdam)이 되었다.

해수면보다 낮은 늪지대. /위키피디아

◇발트해 무역과 라인강 무역이 만나다

저지대 앞 바다 북해는 북위 60도 중위도 저기압대에 걸친 까닭에 기상 악화가 잦고 바람이 많이 분다. 심할 경우 폭풍해일이 들이치는데, 이 폭풍해일이 북해 연안선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텍셀섬과 무너진 모랫둑. /위키피디아

1282년 발생한 해일이 북해에 있는 텍설섬 부근 모랫둑을 무너뜨리면서 바닷물이 들어와 자위더르해가 만들어졌다. 이 재해가 암스테르담을 항구도시로 만드는 운명의 첫 신호탄이었다. 침적토가 쌓인 암스테르담 부근까지 큰 배가 들어오면서 해상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들어온 발트해 상선들에 의해 작은 마을이었던 암스테르담이 항구로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라인강과 연결되는 강 하구에 위치한 마을의 특성을 살려 라인강을 타고 올라가 내륙 수로 교역망을 넓혀나갔다. 이때 라인강 주변에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이 라인강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이 커지자 이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1367년 한자동맹의 하나인 ‘쾰른동맹’에 참가하여 라인강 내륙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은 위도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크다. 북부 유럽은 숲이 울창하고 농사짓는 데 적합했고, 남부 유럽은 포도주 등 술과 소금을 얻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남북의 생산품이 달랐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발트해 상선들에게 남부 유럽의 술과 소금을 팔았고, 남부 유럽에는 발트해 상선들이 가져온 목재와 곡물을 팔았다.

1421년 11월 대규모 홍수로 북부 저지대 10개 도시가 물에 잠겼다. 이후 사람들은 해안에 방조제를 쌓기 시작해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을 ‘폴더’라 불렀다. 이렇게 저지대 사람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땅을 넓혀갔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빼내는 풍차는 간척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도구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저지대에 모여든 것은 15세기 말부터였다. 곧 1492년 스페인에서의 추방, 1497년 포르투갈에서의 추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저지대에 몰려왔을 때 대부분은 플랑드르 항구도시에 정착했고, 일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는 수천명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나막신. /위키피디아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쓸 만한 땅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팠다. 그러면 물기는 빠지지만 땅이 주저앉는 지반침하 현상이 발생했다. 땅이 꺼지면 바닷물이 밀려든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고 풍차로 물도 계속 퍼내야 했다. 그래서 그곳 늪지대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낸 후 생긴 땅은 소금기가 있어 농경지로 바로 쓰지 못했다. 소금기를 빼내기 위해 땅을 말려 소금을 얻은 뒤, 하천으로부터 담수를 끌어와 민물 호수를 만든 후 나중에 민물을 빼내면 농경지로 쓸 수 있었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내고 다시 하천의 민물을 끌어오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운하였다.

이렇게 간척에 성공해 생긴 땅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군주나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절대 봉건주의 곧 군주나 주교의 통치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그 무렵의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시민들이 땅을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이 군주나 영주로부터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이는 훗날 ‘네덜란드 공화국’ 탄생의 토대가 된다. 그러다 보니 저지대는 특정 종교나 사상에 대해 제약이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유대인들이 키운 항구도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도 나서서 간척사업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을 베네치아와 비슷한 항구도시로 만들기 위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항구에는 상업지역과 늪지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늪지대의 토탄을 채취해 팔면 돈이 되었다. 토탄은 식물류가 오랜 기간 땅속에 퇴적돼 생성된 석탄 초기 과정의 물질로 연료로 쓰였다.

이렇게 늪지대의 토탄을 파내면 드러나는 모래 자갈층 밑바닥에, 물에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말뚝들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덮어 인공섬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땅과 집을 획득했다. 지금의 암스테르담은 70%가 간척지로 약 90개의 인공섬이 1500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538년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모여드는 유대인 덕분에 1514년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만1000명에 도달했다. 당시 북부 저지대 인구 백만명 중 20%가 1만명 이상 규모 도시에 살았다. 이렇게 도시화율이 높다는 것은 농업 환경이 좋지 않아 장원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항구도시에 어업 관련 종사자들과 유대인과 같은 상인층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 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소금 상권을 장악하고 청어 산업을 주도하면서 저지대는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이후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 안트베르펜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오면서 1541년 이후 안트베르펜 경제가 후퇴하면서 상대적으로 암스테르담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 암스테르담 인구는 1557년 2만2000명을 넘어섰고 1564년 3만명을 돌파했다.

◇유대인들, 네덜란드 독립전쟁 자금을 적극 지원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결혼동맹을 통해 저지대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왕국은 저지대에 군인을 주둔시켜 이단심문을 통해 가톨릭을 강요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과 칼뱅파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을 추방해 세수가 급감한 스페인 왕국은 재정 파탄에 시달리자 저지대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 스페인 왕국 국세의 40%를 저지대에서 뜯어갔다. 이러한 종교재판과 중과세 정책에 항거하는 상인들이 반란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1566년 칼뱅주의자들이 ‘성상 파괴 운동’을 벌여 저지대 성당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만명의 군대와 함께 악명 높은 알바 공작을 파견했다. 이 일로 8000명이 처형당하고 10만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이에 반발해 저지대 17주는 1568년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스페인 왕국의 재정 파산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용병들에게 2년 치 월급이 밀리자, 1576년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통에 시민 7000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안트베르펜을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저지대 북부 7개 주. /위키피디아

1578년 지금의 벨기에 지역 남부 10주는 스페인 군대에 굴복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대인과 칼뱅파가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해 항전을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로써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많은 유대인과 프랑스의 위그노(칼뱅주의를 추종하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던 차에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합병하면서 암스테르담 유대 상인의 동방물산 유통 참여를 배제하고 독일 함부르크 유대 상인들에게 이 권리를 넘겼다. 유통 거점이 암스테르담에서 함부르크로 바뀐 것이다. 이때 부상한 가문이 독일의 유대 가문 푸거(Fugger)가였다.

게다가 이듬해인 1581년 7월에는 북부 저지대 7주가 주도하여 더 이상 왕정이 아닌 의회를 통해 각 주가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 최초의 연방제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켜 독립을 선언했다. 유대교와 영국에서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칼뱅파 청교도와 프랑스의 칼뱅파 위그노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교리가 일맥상통하여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상업과 금융에 대한 시각과 부의 축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독립전쟁이 격화되자, 유대인들은 이제 네덜란드마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이상 피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가 연방분담금 곧 국방비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홀란트가 65%, 제일란트가 15%로 두 주가 80%를 담당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주 정부가 발행하는 전쟁채권을 열심히 사주었다. 7주 중에서 홀란트가 가장 넓고 조세 부담률도 높아 네덜란드를 아예 ‘홀란트’라고도 불렀다.

◇소매금융의 출현, 개인에게 직접 채권을 팔다

암스테르담의 금융혁명은 16세기 중엽 유대 대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인들은 은행 대부를 받던 방식에서 탈피해 부자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았다. 곧 기존 은행가에 채권을 팔던 것과는 달리, 개인 부호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자금 조달에서 ‘소매금융’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영국보다 100년, 미국의 남북전쟁 시 채권보다 300년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기법이 유대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후 런던을 거쳐 300년 뒤 미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제임스 쿡은 북부 연합채권을 은행권을 통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팔아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유대인, 전쟁 채권시장을 활성화하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초기에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 공채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유대 징수 청부인들이 발행하는 단기채권 ‘오블리가티엔’은 정부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었다. 징세 청부 제도란 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 민간 청부인에게 도급을 주어 그 사람이 먼저 할당된 세금을 납부하고, 그 뒤 청부인이 자기 수익을 보태 세금을 거두던 제도이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 디아스포라 자본을 장기 채권시장에 끌어들여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16세기 들어 저지대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영주에게 속박되어 있는 장원 제도 아래 농노들과 달리 저지대는 간척지 개발로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영농이 많았다. 이런 사회 시스템 덕분에 농업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은 기후 여건상 밀과 보리 같은 밭작물이 주요 곡물이다. 그간의 삼포제는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지로 정해 생산에서 제외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목축과 퇴비 생산을 위해 목초지가 따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휴경 대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눠 계절에 따라 ‘귀리나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돌려짓기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세부터 600년간 이어진 삼포제 농법을 극복하고 ‘4포제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클로버와 파종 후 2~3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한 순무는 가축 사료로도 이용되었으며, 퇴비를 사용할 때보다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했다. 결과적으로 경작 면적이 3분의 1 이상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게다가 잎이 풍성한 순무를 저장했다가 겨울 동안 가축 사료로 사용하여,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여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낙농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꼭두서니 염색. /위키피디아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미 시장경제 원리에 정통했다. 수출과 산업에 필요한 고부가 가치 작물을 재배하고 값싼 식량은 대부분 수입했다. 고부가 가치 작물 중 하나가 직물 염색 원료로 쓰는 작물의 재배였다. 유대인들은 아마와 삼 그리고 자주색 염료 식물 ‘꼭두서니’와 남색 염료 식물 ‘판람근’(대청)을 재배했다. 직물 산업과 염색 산업에 꼭 필요한 작물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주색 염색 기술을 비기에 부쳐 비밀로 간직해왔던 민족이다. 고대의 자색은 가나안 해안가 뿔고둥 내장에서 추출한 체액으로 만들어 무척 귀했다.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했다. 그래서 자주색을 ‘황제의 색상’ 또는 ‘추기경의 색상’이라 하여 중세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는 고급 색깔이었다.

대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청이라는 관목식물 잎을 거두어 퇴비처럼 식히면 노란 즙이 흘러나오는데 공기 중에 놓아두면 진한 쪽빛을 띤다. 쪽빛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인기가 좋았던 대청 염료는 심지어 파란색의 금이라고 해서 ‘블루 골드’로 불릴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영국산 생모직물을 수입해 이를 자주색과 남색으로 염색해 비싼 값에 수출했다.

자주색과 남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염색이 아니었다. 염색할 때 쓰는 매염제의 구성 성분과 정확한 함량은 오랫동안 유대 공동체 안에서만 전수되는 비밀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직물에 아무리 색을 들이려 해도 세탁 과정에서 색이 바랬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천연염색 기술로 큰돈을 벌었다.

1540년 최초의 염색 서적이 보세티에 의해 기술되어 이후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부터 아열대 작물인 남색 천연염료 인디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력 면에서 네덜란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이후 레이던이 유럽 최대의 직물과 염색산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레이던에서 그들의 경전 탈무드를 인쇄하기 위해 출판업도 발전시켰다. 값비싼 천연염료가 인공 합성염료로 대체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저지대 사람들은 1570년대부터 자연환경에 맞춘 전문 농업을 발전시켰다. 점토 지역에는 곡물을 재배하고,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하고, 도시 근교에서는 튤립 같은 원예작물을 재배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고부가 가치 경제작물, 유제품, 과일, 원예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고, 맥주의 향료인 홉은 맥주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그노들이 합류하다

1572년 8월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칼뱅파인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옮겨온 것은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명의 위그노가 살해당한 뒤였다. 이후 5년에 걸쳐 전쟁과 학살이 거듭되면서 위그노들이 저지대로 많이 피란 왔다. 위그노들은 유대인보다 80년 늦게 암스테르담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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