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추모’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혜정 2023. 2. 11.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S] 커버스토리][한겨레S] 커버스토리
2·18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
2012년 2월18일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추모식이 열리자, 주변 상인들이 이에 항의하며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윤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 제공

느티나무 10그루, 단풍나무 2그루가 빙 둘러선 사이사이 키 작은 영산홍이 겨울바람에 가지만 앙상했다. 150㎡ 될까 싶은 잔디밭엔 안내문도 표지판도 없었다. 잔디밭은 2003년 2월18일 대구 지하철 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들 가운데 32명을 모신 추모묘역이다. 나무 12그루는 십이지신을 상징한다. 묘역 왼쪽, 우뚝 솟은 조형물은 아래쪽에 희생자 192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다. 조금 떨어진 곳에 “대구지하철참사로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모와 시민들에게 안전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심어주기 위한 조형물”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추모비의 공식 명칭도 ‘안전상징조형물’이다. 이곳은 대구 팔공산 자락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추모공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냥 안전테마파크, 그냥 잔디밭, 그냥 조형물이다.

추모묘역과 추모비, 추모공간은 왜 이름을 잃었을까. 죽은 이를 그리고 생각하는 일은 왜 가로막힌 걸까. 대구 지하철 참사는 왜 2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추모조차 할 수 없을까.

참사, 지우려는 사람들

그날, 7살 혜진은 엄마와 함께 대구 영남대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집인 경북 김천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역에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고 병원에 다닌 지 1년. 치료가 거의 끝나 그날이 마지막 진료였다. 기차와 지하철 타는 걸 좋아했던 혜진은 그날도 아빠한테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며 밝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그게 아빠와 한 마지막 인사였다.

혜진과 엄마는, 중앙로역 1079호 전동차에서 불이 난 지 4분 뒤인 오전 9시57분, 반대쪽에서 진입한 1080호 전동차에 타고 있었다. 자동으로 열린 출입문을 통해 시커먼 연기가 밀려들어오자, 기관사는 문을 닫은 채 바로 열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기가 왔다 갔다 해 그럴 수가 없었다. “곧 출발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안내에 혜진 모녀와 다른 승객들 대부분은 기다렸다. 매일같이 이용하는 지하철이 그리 쉽게 불에 탈 리 없을 거라는 믿음, 문제가 생긴다 해도 시스템이, 나라가 구해줄 거라는 굳은 믿음은 불과 몇분 만에 무참하게 배신당했다.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됐는데도 혜진 모녀와 연락이 닿지 않자, 아빠 전재영(62)씨는 무작정 대구로 가 병원과 부상자·사망자 명단을 샅샅이 뒤졌다. 없었다. 대구시에선 디엔에이(DNA)가 나오거나, 지하철에 탔다는 증인이 있어야 희생자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화장장 온도가 800도 정도인데, 참사 당시 사고 현장은 1천도가 넘었을 것으로 보여 디엔에이가 안 나올 수도 있다. 특히 뼈가 약한 어린이, 여성, 노인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가족을 억울하게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주검마저 찾을 수 없으면 어쩌나, 억장이 무너졌다. 전씨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실종자’ 가족들이 대구지하철공사에 시시티브이(CCTV) 공개를 요구했다. 거절당했다. 공사와, 자기 가족이 지하철을 탄 역을 찾아가 항의했다.

대구 중앙로역 지하 1층, ‘기억 공간’ 가운데 참사 희생자 이름을 새긴 추모벽 앞에 추모 꽃다발이 놓인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역무원으로 일했던 임경수 전 대구지하철노조 위원장의 증언이다. “공사에서 직원들한테 시시티브이를 절대 반출하지 마라, 유족들이 오면 경찰을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족들이 역무실에 와서 보자, 내놔라 하는데 역무원들은 보여줄 수가 없고, 화가 난 유족들은 책상을 뒤집고…. 대구시나 대구지하철공사가 일괄적으로 시시티브이를 확보해서 보여줬으면 충분히 탑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랬던 건 은폐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틀을 실랑이한 끝에 지하철역 상황이 녹화된 테이프를 받아,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있던 대구시민회관(현재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함께 돌려봤다. 대구역 녹화본에서 혜진이 엄마 손을 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모습이 확인됐다. 승강장에서 1080호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은 “얼굴 윤곽을 보니까 나는 확실히 알겠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잘 모를 수도 있게”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 지하철을 탄 사실은 확인됐지만, 주검을 수습한 건 신원확인 작업 막바지인 4월에 이르러서였다. 혜진은 엄마 품에 꼭 안긴 채였다. “국과수 설명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탈출하려고 문 앞에 다 모여 있는데 우리 애랑 집사람은 문들 사이에 둘만 딱 있더래요. 이미 포기를 했는지…. 엄마가 애를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애를 감싸고 있었는데, 집사람 키가 훨씬 큰데도 남은 유해는 비슷했어요. 그만큼 집사람 유해가 많이 훼손됐단 얘기죠.” 전씨가 애써 덤덤하게 돌이켰다.

혜진 모녀를 포함해, 1080호 전동차 안에서 발견된 유해는 142구다. 나머지는 승강장과 계단 등 역사 안에서 참변을 당했다. 유해도, 유류품도, 참사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증거도 남아 있던, 보존해야 하는 사고 현장이었다. 그런데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는 ‘지우기’에 급급했다. 참사 당일 밤 1079호·1080호 열차를 월배차량기지로 옮긴 뒤, 바로 다음날인 2월19일 낮 군인 200명과 중장비를 동원해 사고 현장을 치웠다. 잔재물은 포대 300여자루에 나눠 담아 안심차량기지 야적장으로 보냈다. 마무리는 물청소였다.

2003년 2월21일 오전 대구지하철공사 관계자들이 참사 현장인 중앙로역을 물청소하는 모습. 윤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 제공

유족들은 청소된 승강장에서, 버려진 포대 자루에서, 유해 수십점과 유류품 수백점을 스스로 찾아냈다. 전씨는 “안심차량기지에 있던 쓰레기 더미에서, 지하철에선 못 찾았던 분의 발목 유해를 발견했어요. 거기서 못 찾았으면 희생자로 인정을 못 받았겠죠. 물청소하고 유골 나왔다는 소리에 유가족들이 굉장히 분개했어요. 나도 그전까지는 대구시를 더 믿었는데, 그거 나오고 나서부터는 아, 시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했어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구지하철공사는 사고 전동차 12량 가운데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교육용으로 전시한 1량을 제외한 11량을 2008년 경기도의 한 업체에 고철로 매각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유가족들이 진행 중이던 전동차 반출을 막아 2량은 남게 됐지만, 아무런 보존대책 없이 안심차량기지에 방치 중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

딸을 황망하게 앞세운 아버지의 20년은 기록과 투쟁이었다. 윤근(76) 2·18안전문화재단 이사는 참사 이후 지금까지 사고 현장, 대구시 등과의 면담, 재단과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이하 희생자대책위) 활동 등을 사진, 동영상, 녹음으로 일일이 기록해오고 있다. 각종 공문이나 합의문 같은 문서도 갈무리해뒀다. 그렇게 모은 기록이 어림잡아도 수백 기가바이트다. 딸 지은(당시 24살)이 태어날 때부터 참사 이틀 전 집에 왔을 때까지, 틈날 때마다 담았던 딸의 목소리 대신 이런 기록을 모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앙로역에 조해녕 당시 대구시장, 윤진태 당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크게 논란이 됐었는데, <엠비시> 보도에 두 사람이 있었던 게 나온 거예요. 그게 결정적인 동기였어요. 자료가 없으면, 있었던 사실도 없었던 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신문 보면 유족들이 오열하고 통곡하는 사진만 찍어서 도배를 하고, 정작 중요한 뉴스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자료는 내가 모아야지, 그때 생각을 했어요. 우리 지은이가 오래전부터 아빠도 컴퓨터 배우라고 권했는데, 나는 일언지하에 너희들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고 귀담아 안 들었거든요. 컴맹이었는데, 그때부터 컴퓨터도 배우고, 디카(디지털카메라) 사고 녹음기 사고 캠코더 사고 그랬죠. 처음엔 시디 굽고, 시디 보관하는 가방도 사고, 인터넷에 카페 만들어서 올리기도 하고. 그러다 외장하드 나와서 외장하드로 옮기고. 컴퓨터 수명이 다되면 또 옮기고. 그러다 보니, 상위 폴더는 검색하면 나오는데 파묻힌 하위 폴더는 찾기도 힘드네요.”

결혼한 뒤 5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서 낳은 귀한 첫딸이었다. 혜진과 마찬가지로 지은도 4월이 돼서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유해를 찾은 일부 유족들이 먼저 장례를 치르기도 했지만, 129명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확인되면 함께 장례를 치르자’는 유족들의 약속에 따라 6월29일 대구시민회관 광장에서 합동영결식을 치렀다. 그때까지 129명은 안심기지 냉동고에 안치돼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날 영결식에 동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애지중지 기른 딸을 인도받은 뒤, 다른 병원 냉동고에 한달 더 머무르게 했다. 대구시가 3월에 한, 추모비·추모묘역·안전교육관을 포함한 추모공원 조성과 추모재단 설립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일 오전 대구 신천동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윤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가 희생자들의 사진 앞에 서 있는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유족들이 바라는 건 대구시가 추모사업 약속을 지키는 거였어요. 참사에 희생된 내 가족을 기억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다시는 내 가족 같은 희생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사를 잊지 말자, 안전교육을 하자고 한 거고요. 그런데 그해 유니버시아드 대회(8월) 치르기 전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대구시가 압박을 해왔죠. 유족들도 그런 일에 슬픈 그늘을 드리운다는 건 미안하니까 물러섰는데, 나는 못 하겠더라고요. 장례까지 치러 버리고 나면 우리 힘이 완전히 소멸될 것 같아서. 우리 애한테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너를 그 차가운 곳에 한달 더 머물게 한 것이 내 진정한 사랑이다,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요. 유해 인도받을 때 차마 못 보겠다는 유족들도 있었는데, 나는 집사람이랑 우리 애들이랑 모두 지켜봤어요. 상반신이 참혹하게 불에 탄 채 내 앞에 나타났는데… 언니가, 누나가, 얼마나 비참하게 갔는지 너희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라, 애들한테 그랬어요.” 그랬던 아버지도 독불장군처럼 굴다 희생자대책위 활동에 부담이 될까, 한달 만에 장례를 치러야 했다.

지은은 혜진과 함께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의 잔디밭, 그러니까 추모묘역에 잠들어 있다.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곳에 묻히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월도 잔인하다. 2003년 3월 수창공원에 만들기로 한 추모공원 조성계획은 ‘혐오시설’이라는 주민들 반대로 수성구 대공원, 달성군 화원동산 등으로 예정지가 계속 바뀌며 공전했다. 그러다 2005년 11월, 대구시가 제안해 시와 희생자대책위가 ‘이면합의’를 하면서 팔공산 동화지구 시유지에 추모공원을 만드는 일에 물꼬가 트이는 듯했다. 인근 상인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공식적인 발표에선 묘역과 추모비 등이 안 들어가는 것으로 하되, 실제로는 넣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2008년 12월, 대구지하철참사 국민성금 50억원과 국비·시비 각 100억원이 투입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개장했다.

지난한 줄다리기 끝에 2009년 10월27일 새벽 3시, 32명의 골분을 한지 등에 싸 추모묘역에 묻었다. 희생자를 상징해 심은 나무 192그루 가운데 고사목이 생겨, 재식재를 명분으로 이들을 묻을 곳을 미리 대구시 쪽에서 파 두었고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쪽도 시시티브이를 다른 쪽으로 돌려주는 등 ‘상호합의’ 아래 이뤄진 일이라는 게 유족들 얘기다. 주변 상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새벽에 조용히 모신 것은 유족들의 양보였다. 그런데 1년 뒤 ‘암매장’ 투서가 대구시에 날아들었고, 대구시는 이를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희생자대책위 쪽은 2014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는 ‘매장이 공원시설을 실질적으로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일 뿐, 양쪽의 이면합의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유족들은 2010년부터 2월18일이 되면 이곳에 참배를 하러 간다. 갈 때마다 주변 상인들은 철조망을 치고, 밀가루를 뿌리고, 달걀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최근엔 그나마, 참배하러 간 유족들이 몇명씩 나뉘어 인근 식당을 이용한다는 약속을 하면서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상인들은 ‘추모’라는 단어가 테마파크에 들어오는 것엔 격렬하게 반대한다. 유족들은 대구시가 문제라고 본다. 1980년대에 분양을 받은 상인들은 테마파크 자리에 놀이공원이 들어서는 걸로 알고 있었고, 이후 테마파크 조성 과정에서는 대구시가 유족들과 한 약속과 달리 ‘추모시설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윤근 이사는 “대구시가 우리랑 상가번영회에 상반된 약속을 하는데 어떻게 수습이 되겠어요? 시가 유족과 상인들의 싸움을 붙이고 즐기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7일 오후 대구 동구 팔공산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본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불탄 전동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그래픽 노수민 기자

여전한 트라우마

“화근내(탄내)라 하죠. 지금도 중앙로역에 가면 그 냄새가 나요. 불, 연기, 앰뷸런스, 상황판, 소방관, 도로변에 주저앉아 절규하시는 분들. 그때 그 공기 냄새, 그 느낌이 그대로 있어요. 중앙로역 주변 상황이 사진처럼 딱 찍혀서. 고함지르는 소리, 경찰·소방 통신하는 소리, 앰뷸런스 소리, 그 상황 자체 그대로 기억해요.”

황순오(54) 전 희생자대책위 사무국장은 어머니를 잃은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 전 이사 간 동네에 지하철이 다녀 편리하다고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동네 할머니들이랑 절에 가신다며 지하철을 타셨다. 경북 군위군에서 일을 하다 “지하철에 불이 났다고 하는데, 그 시간대에 집에서 나간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바로 중앙로역으로 차를 몰았다. 사망자 명단에도, 병원에도 없었지만 하룻밤 지나니 불이 난 전동차에 타셨을 거란 생각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실종자 가족’ 명찰을 차고, 혹시라도 어머니를 못 찾으면 어쩌나 초조함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4월 중순, 그 역시 국과수의 신원확인 막바지에 어머니를 찾았다. 다니시던 치과에서 치아 본뜬 걸 가져다 제출했는데, 수습된 두개골 일부와 일치했다. 월배차량기지에서 관을 인도받아 열어보니, 두개골 아래에 휴지로 사람 형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천막으로 칸칸이 나뉘어 있던 옆집에서 터져 나오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참혹한 일을 겪은 유족들 대부분, 황 전 사무국장처럼 크고 작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황 전 사무국장은 “참사 초기에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적이 있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 유족들한테 가장 좋은 심리치료는 추모공원”이라고 말했다. “이전엔 참사가 나면 피해자들한테 보상금 주고 위령탑 세워주는 게 끝이었는데, 우리는 사고 재발 방지와 안전한 지하철 만들기 주장을 계속해왔어요. 그게 우리가 요구한 추모사업인데, 보상금 몇푼 더 받으려고 그러는 거냐는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절실한 마음이에요. 우리는 가족을 잃었지만, 또 다른 희생이 없도록 만들어야 그 죽음의 가치를, 의미를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구 지하철 참사 때, 당시 역대 가장 많은 국민성금이 모였어요. 대구시민회관에 오신 자원봉사자도 정말 많았고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만큼 위로를 해주셨는데도 우리가 추모사업 얘기를 하면 지역에선, 당신들 이해는 하는데 집값 떨어지고 애들 자라는 환경에 안 좋으니까 우리 동네엔 오지 말라더라고요. 한계가 있었죠. 이제는 탑도 있고, 교육할 수 있는 테마파크도 있고, 장지도 있잖아요. 이게 추모탑이고, 추모공원이고, 추모묘역이라는 인정과 선언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픽 노수민 기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취임 뒤 단 한차례도 희생자대책위 쪽과 접촉하지 않았다. 반면 참사와 수습의 책임자인 조해녕 당시 시장과 김범일 당시 부시장(이후 시장)을 시정특별고문으로 위촉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와 관련 시설의 명칭 변경은 팔공산 상가번영회 쪽의 반대 등 갈등이 있어 아직 추진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참사가 일어나면 피해자도 힘들지만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크잖아요. 그런 걸 방지하려고 추모사업에 안전교육을 넣자고 한 거예요. 그런데도 세월호, 이태원 같은 대형 참사가 자꾸 일어나요. 정부나 지자체가 안전에 대한 생각이 해이해지지 않는 일을 우리가 완성을 못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미안하죠”라는 전재영씨의 말을 대구시는, 정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추모’를 지운 자리에 안전은 뿌리내릴 수 있을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