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가상 엄마’를 주문했다[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2. 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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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500쪽 | 1만7000원
‘자유사’가 허용된 근미래 일본으로 한 소설 <본심>을 펴낸 히라노 게이치로. 현대문학 제공
사회복지체계가 파탄난 2040년 근미래 일본
평생 노동착취·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유사’ 선택해 생을 마감하는 사회

2040년 어느 날 사쿠야는 ‘주식회사 피디텍스’를 찾아간다. “어머니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는 까마귀의 공격으로 슈퍼마켓 배달용 드론이 떨어질 때 놀란 나머지 수로에 떨어져 죽었다.

피디텍스는 VF(Virtual Figure·가상인간) 제작 업체다. 고인의 유전자 정보, 사진과 동영상 같은 자료를 입력해 만든다. 헤드셋을 쓰고 보면, 실제 사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대화도 나눌 수 있다. 마음이 없을 뿐이다. “대화를 통사론 바탕으로 분석해서 가장 적합한 답변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고객님들은 중간에 반드시 VF에게서 마음을 느끼려고 하거든요.”

사쿠야는 직원 권유로 4년 전 익사했다가 딸 의뢰로 제작된 VF 나카오와 대화를 나눈다. “자신을 샘플로 삼아 새로 오신 고객님들께 VF에 대해 설명해드리는 일이지요. 월급은 아내와 대학생인 외동딸이 받아 갑니다. 뭐, 아빠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지요.” 사쿠야는 슬픔이 서린 나카오의 눈빛도 확인한다. 300만엔을 주고 VF 어머니를 주문한다.

사쿠야가 이 ‘가짜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를 때 “몸이 거의 힐난하듯이 저항”했다. “가짜가 되는 건 바로 나 자신”이 되는 듯했다. 헤드셋 속 VF 어머니가 말을 건넸다. “사쿠야, 오늘은 일하러 안 갔어?” 사쿠야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린 뒤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VF 어머니는 불완전했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다른 말투도 나왔다. 그때마다 지적해서 수정하도록 해야 했다. 학습 능력은 뛰어났다. 생전 함께 간 여행지에서 누군가 사쿠야를 툭 치고 지나가자 어머니가 큰소리로 나무라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피디텍스에 제공했다. 이 정보가 입력된 VF 어머니는 고객 불만에 시달린 사쿠야에게 “이런 무더운 날씨에 자기 일을 대신 해준 사람한테 대체 그게 무슨 짓이야”라며 분노한다. 하루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과거 기억을 확인하면서 둘은 공유 공간을 늘려간다.

가상인간 제품이 된 엄마, 그녀의 본심이 궁금한 아들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자기결정권’ 물어

사쿠야가 가장 궁금한 건 왜 어머니가 느닷없이 ‘자유사(自由死)’를 선택했는지다. 어머니는 선택 이유를 두고 “이제 충분하다”라는 말만 남겼다. 자유사는 ‘영속적인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같은 부정의 요건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완전한 만족감’과 같은 긍정의 요건도 인정한다. 의사가 상담 뒤 허가를 내준다. 어머니는 자유사를 실행하기 전 사고로 죽었다. 사쿠야는 자유사를 “무조건의 안락사이자 합법적인 자살”로 여겼다.

사쿠야는 VF 어머니와 자유사를 두고 대화를 시도한다. “자유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음…… 엄마는 그런 말은 잘 모르겠어. 사쿠야가 좀 설명해줄래?” “엄마는 왜 그런 결심을 했던 거야? 나는 그걸 알고 싶다고!” 어머니가 죽고 처음으로 감정이 폭발했다. 사쿠야의 격앙에 VF 어머니는 슬픈 표정만 지었다.

사쿠야는 여관에서 어머니와 허드렛일을 같이하던 동료 미요시, 어머니에게 자유사를 허가해준 의사 도미타, 어머니가 애독하던 소설의 작가 후지와라 료지를 만나가며 어머니의 선택 이유, 즉 본심을 알아내려 한다.

소설 줄기는 존재와 부재, 생성과 소멸,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이야기다. 사쿠야는 “사는 것이 단지 시간을 들여 죽어간다는 의미인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어째서 ‘살아간다’는 말이 필요한 것일까”라며 거듭 자문한다. “(인간이 원소 단위에서) 우주로 존재하는 한, 더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생각한다. 미요시는 “사후세계란 바로 지금 이 세계야. 단지 내 몸을 화장해서 뼈와 재와 이산화탄소가 될 뿐”이라고 여긴다.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아 달라는 사쿠야의 부탁을 냉담하게 거절한 의사 도미타는 자유사를 두고 “다음 세대를 배려해서 스스로 죽을 때를 선택한다는 거, 나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말한다.

자유사는 2040년 일본의 큰 사회문제다. 주로 가난한 이들이 선택한다. 사회보장제도가 파탄 나면서 희망자가 급증한다. “어머니 세대는 내내 미래의 짐짝 취급을 당해왔고 실제로도 그렇게 이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됐어요. 자유사가 미덕이라는 식으로 떠드는 책도 넘쳐납니다. ‘이제 충분하다’고 자진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라는 건 선생님(도미타)도 잘 아시잖습니까.” 사업 성공으로 거부가 된 장애인 이피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재정난을 이유로 더 여유가 없다고 떠들어대고, 가난한 사람들은 지족(知足) 사상으로 자유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끔찍한 생각이잖아요…우생학 같은 거 아닌가요, 그거?”.

소설 속 영화도 자유사를 다룬다. 부모를 잃고 시설에서 자란 뒤 계약직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온 형제가 등장한다. 아우는 병 들고, 형 혼자 돈벌이에 간병까지 떠맡으면서 형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 된다. 둘은 복지제도 적용 대상에도 끼지 못해 목숨만 부지한다. 어느 날 아우가 간청한 게 바로 ‘자유사’다.

근미래 일본 사회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을 단지 피로와 공복에서 확인해야 하는” 곳이다. 심화한 노동 착취로 살기 어렵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허드렛일을 하다 해고 위기에 놓였다. 월급 삭감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쿠야 직업은 ‘리얼 아바타’다. 카메라 달린 고글을 장착한 채, 헤드셋을 착용한 의뢰인이 원하는 장소로 찾아가 대신 보고 듣는, 즉 ‘인간 드론’ 일을 하는데, 개인 사업자로서 회사와 계약한다. 평점이 낮으면 해지, 즉 해고된다. 사쿠야도 고객 불만 접수 때문에 폐지 줍는 일을 하게 된다.

과거사 왜곡·혐오 등 현재 일본 현실도 담겨
“결국 행동하는 수밖에” 잃어버린 세대 향한 일침

이 사회는 혐오도 사라지지 않았다. “동성애자를 ‘재수 없다’고 경멸”하는 인간에 “일본에서는 일본말을 하라고! 그게 싫으면 썩 꺼져버려!”라고 겁박하는 인간도 여전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외국인이라서 의무교육 제도 적용 대상에서 빠져 중학교를 중퇴한, 일본말이 조금은 서툰 미얀마인 2세 편의점 직원에게 가한 혐오였다.

일본 과거사 문제도 반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열성적 반전 평화활동가의 할아버지 만년 시기를 적용한 VF도 등장한다. 이 VF는 중상을 입고 수류탄으로 자폭했던 전우들이 결코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친 적이 없고, 하나같이 “어머니!”라고 절규하며 죽어나갔다고 가상공간에서 증언한다. 이 증언을 두고 “좌파 교육에서 나온 가짜 스토리다, 국가 영웅들은 틀림없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죽었다”라는 반론이 나오면서 논쟁이 격화된다. 이 장면에서 지난 12월 히라노 게이치로가 정부의 방위비 증강 계획 발표가 나온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기시다 총리는) 퇴진해야 한다”는 글을 떠올릴 수 있다.

엄혹한 근미래 사회 일각에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 “엿 같은 세상을 만든 예전 정치가와 대기업 회장 놈들”을 죽이는 ‘암살게임’도 유행한다.

소설은 변혁을 위한 행동에 관한 철학도 녹였다. 사쿠야는 친구이자 ‘리얼 아바타’ 동료인 기시타니의 “증강현실로 대충 속이고 살아도, 가상현실로 속이고 살아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결국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하는 말을 종종 생각한다. 후지와라 료지를 만나서는 “본인들이 불행하든 가난하든, 마음이 평온해지는 방법을 찾아버리면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파풍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래서는 너무도 희망이 없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행동은 삶과 죽음과도 이어지는 문제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될수록 상대적으로 우리의 삶은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없어질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보자는 마음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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