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때 ‘부자되세요’ CF처럼… 코로나 겪는 지금 고전으로 ‘위로’”[M 인터뷰]

안진용 기자 2023. 2. 10.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M 인터뷰 - 14년간 ‘그리스 로마 신화’ 집대성한 배우 강남길
두 차례 죽을 고비 넘기고 난 뒤
마음 잡으려 닥치는 대로 독서
불변의 진리 담은 책 집필 욕심
그리스 로마 신화, 흐름이 중요
14년간 유적지 돌며 자료 수집
사진 3만장 중 1500장 추려내
영상시대에 왜 책을 썼냐고요?
빨리 아닌 정확함 필요한 내용
정독 뒤 왜 읽어야하는지 알 것
지난 1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배우 강남길은 “23년 만에 인터뷰한다”면서 “이렇게 좋은 카메라로 사진 찍는줄 알았으면 더 꾸미고 왔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박윤슬 기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작과 끝을 아시나요?”

말문이 턱 막혔다. 기자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필독서였다. 그래서 분명히 읽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을 명확히 말할 깜냥은 못 된다. 적잖은 이들이 이렇다. 배우 강남길(65)이 무려 14년에 걸쳐 엮은 ‘강남길의 명화와 함께 후루룩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델피스튜디오)를 최근 발표한 이유다.

매서운 바람이 체감 온도를 더 떨어뜨린 지난 1일 서울 상암동 MBC 인근 한 카페에서 강남길을 만났다. 지난 1968년 데뷔 후 50년 넘게 ‘방송밥’을 먹어온 그에게 이제 상암은 여의도만큼 익숙한 장소다. 권당 470∼480쪽, 총 1400여 쪽 분량 책 3권을 끌어안고 나타난 강남길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와 얼음이 나오자 “여기는 이렇게 ‘따로국밥’처럼 준다”고 구수한 농담을 건넨 그는 “요새 열이 좀 많다. 그래서 아이스 커피를 마신다”고 말했다. 14년간 하나의 주제에 몰두해 책으로 내놓는 열정의 원천인 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은 그의 영국 생활에 기인한다. 강남길은 지난 2000년 두 자녀를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4년 동안 연기 활동도 접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고, 이후에는 한국과 영국을 오갔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강남길을 보기 위해 숱한 지인들이 영국까지 날아왔다. “갈 곳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지인들을 데리고 각종 박물관 및 유적지를 누볐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면 유럽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제 별명이 ‘저질 가이드’였어요. 영국에서 오래 살아 ‘무엇을 봐야 하는지’는 아는데, 정작 ‘왜 봐야 하는지’는 몰랐죠. 대영박물관에 가면 다들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데, ‘왜’를 알아야 감동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솔직히 말해, 영국에 있을 때는 영국이 싫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 있으면 그곳이 자꾸 떠올랐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영국을 훑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그리스, 튀르키예까지 갔어요.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알기 위해 꼬리를 물듯 찾아갈 수밖에 없었죠.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기심의 흐름을 좇다 보니 비로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질 가이드가 ‘고질 가이드’로 거듭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하.”

책을 쓴다는 것은, 강남길에게 낯설지 않은 도전이다. 그는 ‘TV보다 쉬운 컴퓨터’(1998)를 시작으로 ‘강남길의 컴퓨터’(2003) 등 컴퓨터 관련 서적을 펴냈다. 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자녀들과 영국에 거주하며 겪은 이야기인 ‘강남길의 오! 마이 고드’(2004)도 발표했다. 이는 실용서에 가깝다. 더 이상 그의 책은 읽히지 않는다.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탓이다. 강남길이 인문 고전으로 눈을 돌린 이유다.

“제가 41세, 50세 때 죽을 뻔했어요. 41세 때는 급체 후 위의 실핏줄이 터져 피를 토한 후 3주 동안 영국 병원에 입원해 유언까지 남겼어요. 50세 때도 심근경색 등 고비가 있었죠. 그때 마음을 다잡으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잡식왕’이었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시 고전이 눈에 들어왔어요. 제가 컴퓨터 책을 쓴 때는 윈도와 DOS 시절이에요. 지금은 읽을 필요가 없죠. ‘오! 마이 고드’ 역시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영국 상황을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을 써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그래서 선택한 주제가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대중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는 줄 안다. 이 신화는 단테의 ‘신곡’처럼 난해하지도 않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시대를 초월해 초등학생의 필독서로 추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이유에 대해 강남길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흐름’을 강조한다. 내용을 줄일 수는 없지만, 시간대별로 물길을 잘 따라가면 체하지 않게 소화할 양이라는 뜻이다.

“일단 신과 영웅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요. 또 그들이 얽히고설켜 있죠. 그래서 이 책은 목차부터 시대 순서대로 정리했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각각의 스토리를 가진 옴니버스입니다. 하지만 각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죠. 그 시작은 당연히 천지창조와 신들의 탄생입니다. ‘카오스’(chaos)라는 무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을, 땅에서 바다를 떼어놓으면서 세상이 시작되죠. 강과 호수, 산과 골짜기, 안개와 구름 등을 교통정리하고 각각을 관장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 둘 사이에 태어난 막내아들인 크로노스 이야기가 시작되죠. 신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끝은 무엇일까요? 신들과 영웅들이 개입한,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트로이 전쟁이 대미라 할 수 있죠.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길에 겪은 일을 그린 작품이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예요. 그리고 트로이가 패망한 후 유민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가서 로마의 모태가 되는 나라를 건설하는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끝이죠. 이후에는 신화가 아니라 인류 역사가 시작됩니다.”

강남길은 이해를 돕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14년간 수시로 각 유적지를 돌며 조각상과 명화 등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렇게 찍은 사진 3만 장과 동영상 3000개 중 추리고 추려 1500장 정도를 책에 실었다. 여기에 대본을 읽던 경험을 살려, 각 상황을 신과 영웅들의 대화로 각색했다. 그래서 한 편의 희곡을 읽는 듯한 느낌도 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일까? 21세기에 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제 50대와 60대 초반을 이 책에 다 바쳤어요. 아직도 갖고 있는 사진 3만 장이 제 전 재산일 수도 있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요즘 많은 사람이 힘들어해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 ‘부자되세요’라는 CF가 위로가 됐었죠? 코로나19에 이은 경제 위기를 겪는 지금은 이런 위로가 필요한 때이고, 전 그 답이 인문고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라는 책을 봤는데 느끼는 바가 컸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수십 년째 청소년 권장도서예요. 왜 그럴까요? 그 안에 많은 진리와 길이 담겨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어른들은 이를 잊고 살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은 어른들도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야 할 때예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보복 여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섭렵한다면, 유럽행 비행기에 올라타고 싶어질 겁니다.”

강남길은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다. 신(新)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컴퓨터 책도 남들보다 빨리 썼다. 어느덧 70대를 바라보는 요즘, 그는 SNS를 개설하고 유튜브 채널도 파고 있다. 편집 프로그램까지 구입해 2개월째 공부 중이다. 적정 수준 기술을 익히면 직접 라이브 생중계를 켜고 대중과 만날 계획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책이라는 고전 콘텐츠에 큰 애착을 보인다. 14년간 하나의 주제에 매달려 책을 펴낸다는 것은 보통 정성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에게 물었다. 2023년에, 왜 다시 책일까?

“종이의 냄새가 좋고, 책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질감이 좋아요. (웃으며) 꼰대인가요? 요즘 유튜브에서 검색만 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복해준다는 콘텐츠가 즐비하죠. 저도 몇 편 봤어요. 하지만 그 방대한 양을 빠짐없이 담은 콘텐츠는 없었어요. 이해를 돕는 명화나 조각상도 온전히 담을 수 없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속도로 읽는 콘텐츠가 아닙니다. 빠르게 익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짚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책으로 봐야 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책을 안 읽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막상 정독을 마치고 나면 ‘왜 책을 읽어야 하나’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58년 개띠 강남길의 삶

열 살에 데뷔…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구박데기 봉수역으로 큰 인기

소시민 애환 그린 ‘달수 시리즈’
생활형 연기로 시청률 휩쓸어
“가진 것보다 후한 평가 늘 감사”

배우 강남길은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격동의 1970∼1980년대를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세대다. 고작 열 살이던 1968년, ‘수학여행’으로 데뷔한 후 그는 크고 작은 작품 150여 편에 출연하며 바쁜 시대에 발맞췄다.

강남길은 소시민의 대명사였다. 특히 임예진과 부부로 출연한 ‘달수 시리즈’가 유명하다. 1995년 작인 ‘MBC 베스트극장-달수의 재판’이 25.7%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후 ‘달수의 차차차’ ‘달수아들 학교가다’ ‘달수의 홀로아리랑’ 등 시리즈로 제작됐고, 평범한 직장인의 애환을 그려 지지를 받았다. 다소 과장된 연기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강남길은 MSG 한 톨 보태지 않은 ‘생활형 연기’로 차별화된 캐릭터를 빚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저는 5남 2녀, 7남매 집안에서 부대끼며 가난하게 자랐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활 연기가 나오는 편”이라면서 “여기에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적절한 오버 액션을 넣으니 시청자들이 반응하더라. 시대를 잘 탄 연기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55년 연기 인생의 최고작품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강남길은 주저 없이 ‘한지붕 세 가족’을 언급했다. 1986년 11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무려 8년에 걸쳐 413부작으로 매주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던 전설적인 홈드라마다. 그리고 강남길은 극 중 고학력 백수 ‘봉수’ 역을 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누나 집에 얹혀사는 구박데기인데, 누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봉수야!”를 외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남길은 “1대 주인으로 출연하던 오미연 선배님이 교통사고로 하차하면서 윤미라 선배님이 2대 주인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 동생 봉수로 출연했다. 이후 드라마가 폐지할 때까지 살아남은 캐릭터”라면서 “제가 아역 배우 출신인데, ‘한지붕 세 가족’을 통해 성인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아직도 저를 봉수로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반백 년을 배우로 살아온 인생에 대해 강남길은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류 바람을 타고 배우들의 위상과 개런티 수준이 달라진 것 역시 그를 기쁘게 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4년간 영국에 머물던 2000년 초반, 그는 엄청난 물가와 학비에 허덕였다. 그런 찰나 ‘돌아와서 연기하라’는 제안을 받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돌아와 보니, 그사이 한류 열풍으로 출연료 수준이 2배가 돼 있더라. ‘이렇게 좋은 직업이 어딨나’ 싶었다”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배우로 살길 참 잘한 것 같다. 제가 가진 것에 비해 너무 후한 평가를 받고, 이렇게 누리고 산다는 생각이 들어 더 겸손해지려고 항상 노력한다”고 자세를 낮췄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