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판 주홍글씨… 원칙도 유효 기한도 없나
학폭 폭로에 뒤따르는 형평성 논란
‘야구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다음 달 6년 만에 막을 연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은 일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멤버 구성 문제로 삐걱댔다. 지난달 4일 발표된 대표팀 명단에서 투수 안우진(24·키움)이 빠진 게 논란이 됐다.
안우진은 2022시즌 KBO(한국야구위원회) 리그 평균자책점·탈삼진 1위에 오른 투수다. 성적만 놓고 보면 국가대표 1선발감이었지만 고교 시절 저지른 학교 폭력 때문에 대표팀에 오르지 못했다. 휘문고 3학년이었던 2017년 넥센(현 키움)에 1차 지명된 그는 야구부 후배를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서 자격정지 3년 징계를 받았다. 넥센은 그에게 5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선발 규정에는 ‘3년 이상 자격정지를 받은 사람은 영구히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안우진은 대한체육회가 주체가 되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영구히 선발될 수 없다. 그렇지만 WBC는 MLB(미 프로야구) 사무국이 주관하는 대회라 앞서 언급한 징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안우진이 WBC 대표팀에 승선하는 데 규정상 문제가 없었음에도 KBO는 “선수 기량과 함께 국가대표의 상징적 의미, 책임감, 자긍심 등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며 그를 외면했다.
이를 두고 KBO의 결정을 지지하는 여론과, 징계가 끝났는데도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여론이 대립하고 있다. MLB 출신 추신수(41·SSG)의 발언은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는 지난달 중순 미국의 한 한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국은 용서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릴 때의 잘못을 뉘우치고 처벌을 받았는데 국제대회에 나가지 못한다”며 안우진을 두둔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학폭 꼬리표 달리고, 국내서 퇴출되기도
지난 수년간 국내 프로 스포츠에선 과거의 학교 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나며 처벌받거나 아예 퇴출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여자 배구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국가대표 출신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27)은 2021년 나란히 한국을 떠나 그리스 리그로 향했다. 고교 시절 폭행과 협박, 가혹 행위 등이 드러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고 국내 프로 무대에서도 사실상 제명됐다. 동생 이다영은 현재 루마니아 리그에서 뛰고 있다. 언니 이재영은 무적(無籍) 신분으로 국내에 머무르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재영은 현재 자유계약선수 신분이라 국내 어떤 팀과 계약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어느 팀도 그의 영입을 쉽게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신생 팀 페퍼저축은행이 2022-2023시즌 개막을 앞두고 전력 보강을 위해 이재영 영입을 검토했다가 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없던 일이 됐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이재영이 국내에 복귀하면 전반적인 리그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은 확실하다”며 “실제로 여러 구단이 이재영 영입을 검토했지만, 페퍼저축은행이 반발에 부딪힌 이후 없던 일이 돼버렸다”고 했다.
야구 선수 김유성(21)은 고3이던 2020년 NC에 1차 지명됐다가 중학생 시절 학폭이 알려져 지명이 철회됐다. 프로야구에서 1차 지명 철회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2학년이던 지난해 열린 2023 KBO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해 두산의 지명을 받았다. 이승엽 두산 감독이 “김유성이 피해자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 나도 함께 가서 사과할 뜻이 있다”고 했으나 팬심은 여전히 차갑다. 작년 말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구단 행사에서 김유성이 인사하자 관중석에선 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폭행, 음주 운전, 도박, 금지 약물 복용 등으로 물의를 빚은 선수가 많았지만, 이 중 상당수는 처벌과 징계를 받고 자숙을 거쳐 경기장에 돌아온 뒤 다시 팬들의 응원을 받았고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그에 비해 학폭 선수는 유독 용서받기 어려운 분위기다. 학폭이 다른 사건과 구분되는 점은 혼자만의 일탈이 아니라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 대부분 선후배라는 상하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며, 피해자가 청소년기에 피해를 본 만큼 고통이 더 크다는 이유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폭력은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범죄이다. 특히 학교 폭력은 피해자가 인격이 덜 성숙한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가해자에 대한 비난의 소지가 더 크다”고 했다.
◇엄중 처벌하되 기준 마련하고 형평성 지켜야
학폭 가해자에게 마땅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쟁점은 가해 선수가 징계가 끝난 뒤에도 계속 불이익을 받는 것이 합당한가에 있다. 경기 출전과 국가대표 선발을 막는 것은 선수의 권리를 제한하는 일이므로 적절한 근거와 기준이 마련돼야 하지만, 현재는 명확한 잣대 없이 그때그때 여론에 따라 제재를 가하는 실정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이 엇갈릴 때, 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나오기 전에 징계가 내려지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동안 현역 선수의 학폭 의혹이 나오면 구단이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해 연맹이나 협회에 보고하고, 연맹이나 협회가 상벌 위원회를 열어 징계 수위를 정하는 절차를 밟아왔다. 구단이나 연맹, 협회는 수사권을 가진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들 주장이 서로 다를 경우 진실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에도 여론을 의식해 먼저 징계를 내리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체육계 안팎에선 “부풀려진 보도나 과장된 폭로로 인해 강한 처벌을 받더라도 추후에 철회나 정정이 어렵다” “가해자 측은 억울한 면이 있어도 여론을 의식해 적극적으로 반박에 나서기 어렵다” 등의 지적이 나온다. 각 연맹과 협회가 사실 파악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학폭위 처분, 형사처벌 내용 등에 따라 징계 수위를 어느 정도 객관화하는 제도도 고려할 만하다. 실제로 KBO는 음주 운전의 경우 면허정지(70경기 출장 정지), 면허취소 1회(1년 실격), 2회(5년 실격), 3회 이상(영구 실격) 등에 따라 제재 수위를 달리한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회적 비난은 학교 폭력 가해자가 감수해야 할 책임이지만, 여론에 따라 징계 여부와 수위를 정하는 건 무죄 추정의 원칙과 비례의 원칙에 어긋날 소지가 있다”며 “또 어떤 폭력 행위가 어떤 징계를 받는지를 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회적 비용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물론 가해 선수들은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사과와 반성을 필수적으로 선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정성을 의심받을 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재영·이다영도 사건이 불거진 뒤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았던 것이 여론이 등 돌린 결정적 이유가 됐다. 구정우 교수는 “가해 선수가 과오를 속죄하고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여야 대중에게 용서받을 가능성이 생긴다”며 “사과와 반성의 진정성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봉사 활동이나 기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용서 구하는 안우진… 학폭 꼬리표 뗄까]
2017년 당시 안우진에게 폭행당한 피해자로 지목된 학생은 4명. 이들은 경찰 수사와 휘문고 학폭위에선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냈다. 수사는 불기소로 마무리됐고 학교 측은 교내 봉사 처분을 내렸다. 사건 자체는 이대로 마무리된 듯했다.
하지만 5년 뒤인 작년 11월 안우진이 한국시리즈 기간 온라인 게시글을 통해 염산 테러 위협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관심을 받았다. 안우진은 지난 시즌 최고의 피칭을 보이고도 최동원상 수상자 후보에서 빠졌다. 이를 계기로 피해자 4인 중 3인이 공동 입장문을 냈다. 자신을 A, B, C라고 칭한 이들은 “우리는 당시 상황을 폭행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운동부에서 있을 수 있는 선배의 훈계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안우진은 우리를 잘 챙겨준 좋은 선배”라고 했다.
안우진도 얼마 뒤 “후배들이 학폭위와 경찰 조사에서 나를 용서했고, 지금은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다만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선배이지 못했다는 점, 선배로서 훈계 차원의 작은 행동도 더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는 점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속죄했다”고도 했다.
A, B, C 중 두 명은 야구계에 있으며 한 명은 다른 일을 한다고 전해졌다. 이들은 그동안 안우진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고, 작년 말에도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반면 다른 피해자 한 명(이하 D)은 안우진과 관계가 다소 소원했다고 한다. D의 입장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현재 군복무 중이며, 입장문이 나올 당시 훈련소에 있어 면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D의 가족은 5년 동안 소통이 없다가 A, B, C가 발표한 내용에 마치 D까지 동의하는 것처럼 여겨져 서운함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안우진 측도 이에 대해 수긍한다. 안우진을 대리하는 백성문 변호사는 “안우진은 미국 전지훈련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오면 D를 우선 만나고, 혹시나 오해가 있었으면 풀고 용서받아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법조계에선 안우진이 국가대표 자격을 회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지만 피해자 모두에게 용서받는다면 적어도 마음의 짐은 덜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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