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전설' 윤정희, 하늘의 별이 되다!

아이즈 ize 김형석(영화평론가) 2023. 1. 2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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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김형석(영화평론가)

사진출처=스타뉴스DB

윤정희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한국영화의 전설이 또 한 명 사라진 것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상징이었던 여배우 트로이카(문희, 남정임, 윤정희) 중 가장 긴 기간 동안 활동했던 윤정희는, 우리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이력을 지닌 배우 중 한 명일 것이다. 동시대 배우 중 윤정희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수많은 영화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대종상 4회, 청룡영화상 7회, 백상예술대상 7회). 그는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지닌 연기자였고,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해 마지막 작품인 '시'(2010)까지 43년에 걸친 약 280편의 필모그래피(KMDB)는 성실한 배우의 발자취였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윤정희는 조선대학교 영문학과 재학중이던 1966년 합동영화사의 신인 배우 공모전에 응모한 1,200명 중 단 한 명의 입상자가 되어 충무로에 입성한다. 첫 영화는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1967).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20만 명이 넘는 큰 흥행을 기록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한 윤정희는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수상한다.

사진출처=스타뉴스DB

이후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명이 된다. 데뷔했던 1967년에 20편의 영화를 내놓았고, 다음해인 1968년엔 48편, 1969년엔 46편, 1970년엔 45편, 1971년엔 53편, 1972년에 31편 등 엄청난 다산성을 보여준다. 트로이카의 동료들이었던 문희(1947~ )와 남정임(1945~1992)이 1970년대 초에 실질적으로 배우 경력을 마감했던 것에 비하면, 윤정희는 이후에도 쉼 없는 행보를 보여주었고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하고 프랑스 파리로 거주지를 옮긴 후에도 꾸준히 배우 활동을 이어갔다.

단지 고전 영화 시기에 활동했던 배우였기에 그를 '레전드'로 칭송하는 건 아니다. 윤정희는 끊임없는 스스로를 변화시켰던 배우였다. 작품 수는 많지만 배우는 적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는 몇몇 장르에 고착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는 전형성에 갇혀 있었고, 특히 여배우들은 신파 멜로의 한과 눈물을 강요 받는 상황이었다. 윤정희 역시 그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진동시켰던 배우였다. 백치미와 섹시함, 지성과 감성, 당찬 매력과 청순가련함 등 윤정희의 필모그래피 안에선 상반적인 이미지들이 충돌하듯 교차되었다. 그에게 본격적인 명성을 안겨준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8)의 신비로운 느낌을 비롯해 '장군의 수염'(1968)와 '내시'(1968)의 관능미, 액션 영화의 마담으로 등장할 때 보여준 걸 크러시의 톤, '분'례기'(1971)의 토속적인 연기와 '무녀도'(1972)의 서릿발 같은 눈빛 등 여러 색깔을 보여주려 했던 윤정희의 도전과 그 성취는 그 시절 단연 돋보이는 퍼포먼스였다. 

한국영화의 침체기가 시작된 1970년대에도 그는 건재했다. '석화촌'(1972) '효녀 심청'(1972) '궁녀'(1972) 등으로 각종 영화상 트로피를 휩쓸었고, 결혼 후에도 김수용 감독의 '화조'(1978), 임권택 감독의 '신궁'(1979) 등에서 호연했다. 학업도 쉬지 않았는데, 배우 활동으로 대학을 중퇴했지만 이후 우석대(사학)을 거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1971년에 졸업하며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석사 학위를 가진 여배우가 된다. 논문 제목은 '영화사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 이월화부터 최은희까지, 자신의 뿌리가 된 선배 연기자들에 대한 연구였다. 이후 파리 3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며 배움을 쉬지 않았다.

영화 '시' 스틸

한국영화가 최악의 시기를 겪던 1980년대에도,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여배우는 '자유부인'(1981) '위기의 여자'(1987) 등의 영화에 출연했고 1992년엔 박철수 감독의 '눈꽃'에 출연한다. 그리고 50세에 출연한 '만무방'(1994)의 연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 한 동안 잊혀진 배우였던 윤정희는 이창동 감독의 '시'를 통해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시를 배우는 할머니 미자(윤정희의 본명은 손미자이다)를 통해 그는 그 어떤 것도 꾸미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이 영화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의 영화상에서도 주목 받게 된다. 이후 투병 소식이 들려왔고, 2023년 설을 앞둔 1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그의 부고가 날아왔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다산성과 진정성과 다양한 재능으로 영원히 기억될 배우 윤정희. 그의 영전 앞에, '시'에서 미자가 지었던 시의 일부를 다시 읽는다. "이제 작별을 할 시간/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작별을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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