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동백꽃을 사랑하며

이해인 수녀·시인 2023. 1. 20. 03: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시인

1

당신은

늘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과 같습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다

잠시 눈을 들면

환히 펼쳐지는 기쁨

가는 곳마다 당신이 계셨지요

눈 감아도 보였지요

늘 한결같은 고요함과 깨끗함으로

먼데서도 나를 감싸주던

그 푸른 선은 나를 살게하는 힘

목숨 걸고

당신을 사랑하길

정말 잘 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쓴 ‘수평선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나직이 외우며 광안리 바닷가에 참으로 오랜만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니 새삼 행복했습니다. 광안대교가 생기고나선 예전만큼 잘 보이진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늘 가까이 볼 수 있고 수평선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수평선을 자주 보는 사람답게 새해에는 평평한 마음으로 무한대의 사랑을 조금씩 더 넓혀가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기도도 평평하게, 대인관계도 평평하게! 모나게 날카롭게 튀어나오지 않는 일직선으로 평형을 이루고 살려면 매사에 좀 더 절제하고 인내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올 해는 매사에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꾸준히 공부하는 학인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군자(君子)로서의 수련생이 되고싶습니다. 늘 곁에 두는 식물도감 꽃도감 나무도감도 더 가까이 두고 그동안 모아둔 역사서나 좋은 말 모음집도 그냥 대충 건성으로 보지 말고 논문을 쓸 때처럼 마음으로 읽어서 양식을 삼아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며칠 전 창고에서 짐 정리를 하다 발견한 저의 옛 노트(1980.1.18.)에 적힌 이 말도 올 해의 지표로 삼고싶습니다. ‘귀로는 남이 잘못했다는 말을 듣지 말고 눈으로는 남의 단점을 보지 말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아야만 거의 군자라고 할 것이다’ -명심보감 ‘정기’ 편에서.

2

동백꽃이 많이 피는

남쪽에 살다 보니

동백꽃이 좋아졌다

바람 부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웃어주고

내 마음 쓸쓸한 날은

어느새 곁에 와서

기쁨의 불을 켜주는 꽃

반세기를 동고동락한 동백꽃을 바라보며

나도 이젠

한 송이 동백꽃이 되어

행복하다

어떤 동백꽃은 장미의 모습을 닮기도 해서 가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예쁜 브로치 대용으로 옷에 달아주기도 합니다.

한 겨울에 활짝 피는 동백꽃의 웃음을 마주하면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동백꽃의 꽃말 역시 ‘기다림’, ‘애타는 사랑’,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라니 올 해는 저도 한 송이 동백꽃이 되어 더욱 명랑 쾌활한 모습으로 일상의 언덕을 오르려합니다. 청소일을 한다는 어느 독자분의 글이 제게 감동을 줍니다. ‘청소를 하며 이런 저런 꿈을 꿉니다. 기도하듯 청소하고 이런 저런 꿈도 꾸고 놀듯 쉬듯 정직하게 청소를 합니다. 제가 하는 청소라는 직업이 버릴 것이 없고 마음까지 닦아주고 치유 해 주는 정직하고 보람된 천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짧은 인사 한마디가 고파지는 이 힘들고 외로운 세상에 꼭 필요한 작고 작은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청소인 것 같습니다…제가 말은 유창히 잘 하지 못해도 담백하게 짧은 인사나마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 되자 다짐해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사는 지혜 씨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싶습니다.

3

새해가 되면 신문 방송 등등 여러 곳에서 새해덕담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을 했지만 어쩌다 하게 되면 그 자체로 부담이 되곤했는데 올 해는 비교적 부탁이 적어 기뻤습니다.

젊은 날 거창하게 다짐하며 나열했던 결심들도 이젠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노년 시기를 살고있는 지금,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또 한 번 살았구나’ 스스로 감탄하며 ‘순간 순간 감사하는 것만이 나의 의무야’라고 되뇌며 빙그레 웃어보곤 합니다.

아침에 신문을 보니 새로 만든 부산의 슬로건이 ‘부산이라 좋다(Busan is good)’라고 하던데 좋은 부산을 만들려면 여기 사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광지나 특산물이 인기라서 유명한 부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인품이 좋아 더 아름다운 명품으로 평가받고 인기 있는 부산이 될 수 있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1964년 수도원에 입회한 이후 파견근무와 학업을 위한 십여 년을 빼곤 줄곧 부산 광안리본원에서만 살고있는 저도 이젠 부산사람이라 자부하며 부산에 대한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 시민입니다.


오늘도 신문으로 아침을 여는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월 셋째 금요일에 러브레터 쓰는 마음으로 시와 삶의 이야기를 전할 해인 수녀가 첫 인사를 드립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안으로는 마음을 평평하게, 동백꽃을 바라보며 밖으로는 웃음꽃을 피우는 우리가 되어요, 부디 건강하시고 힘들어도 힘내시라 기도드립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