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300 이하 ‘찍어치기’ 금지

이진우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2023. 1.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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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3대 500 이하 언더아머 금지’. 소수의 힘센 사람을 위한 운동으로 여겨졌던 파워리프팅(powerlifting)이 점차 생활 체육화되면서 유명해진 인터넷 밈(모방 행동)이다. 3대란, 파워리프팅에서 중량을 합산하는 세 종목 스쿼트·데드리프트·벤치프레스를 말한다. 이 말은 즉, 체육관에서 소위 ‘짜세’(멋있다는 의미의 은어) 나는 언더아머 브랜드 운동복을 입고 운동하려면 3대 운동의 기록이 합쳐서 500㎏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체육관 안에는, 특히 초심자들에게는 이것 말고도 수많은 자격 조건이 더 있다. 팔굽혀펴기 100개 하기 전에는 벤치에 눕지도 말라, 맨몸 스쿼트 100개를 한 번에 하기 전에는 바벨을 지려고 하지 말라, 자기 몸무게 정도 들지 못하면 컨벤셔널 데드리프트(바벨 들어 올리기)는 하지 말라…. 한때는 저 ‘하지 말라’는 말 앞에 ‘억지로’라는 부사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부사에는 괄호가 쳐졌고 급기야 생략되었다. 원래는 빨리 중량을 늘리고 싶어 하는 초심자들의 조바심을 걱정해서 만들어진 애정 어린 조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초심자들을 비웃는 독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파워리프팅 초심자들은 스스로 더 많은 자격 조건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자신의 스쿼트 기록이 낮은데 복압 벨트를 착용해도 되는지, 자신의 데드리프트 기록이 얼마 안 되는데 역도화를 신어도 되는지, 벤치프레스 기록이 형편없는데 10분 이상 벤치를 사용해도 되는지에 관한 궁금증들 말이다. 파워리프팅만 그런 것도 아니다. 조기 축구에 처음 나가는데 너무 화려한 보호 양말을 신고 나가면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것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거의 고사성어가 된 ‘300 이하 맛세이(찍어치기) 금지’ 같은 말들, 온라인 게임이 일상화되면서 관용어가 된 ‘랭킹 00위 미만 잡(순위 00위 미만은 잡스러움)’ 같은 표현들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재미있자고 하는 일들에 붙는 자격 조건이다. 그런데 재미있자고 하는 일들도 재미로 하기 힘든 세상이다. 재미있자고 하는 일들인데 재미를 붙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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