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곱디고운 ‘팬질’ 보셨수?…중장년 팬덤은 다르다

이유진 기자 2023. 1. 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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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일본의 ‘욘사마’ 열풍 속 피어난 중장년 팬덤은 언론이 주목할 만큼 독특한 문화였다. 국내 트로트의 붐으로 이어진 중장년 팬덤의 모습을 보며 당시 일본 중년 팬덤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2000년대 초반 ‘욘사마’에 열광적인 60~70대 일본인 팬덤은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 소개되면서 배용준은 현지 한류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한류 전문기자 자격으로 일본 지바현에 있는 한 배용준 열성 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 한 칸은 ‘용준룸’으로 꾸며져 있었다. 배우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가 하면 손수 만든 굿즈, 앨범, 잡지, DVD 등 배우와 관련된 아이템으로 꽉 채워진 공간이었다. 인근 팬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티타임 장소기도 했다.

국내에도 팬들이 운영하는 스타 테마 카페가 있다. 가수 임영웅·송가인·김호중의 중장년 팬들이 친목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꼭 ‘용준룸’을 보는 듯하다. 트로트 붐으로 팬덤문화가 중장년의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인생의 파도를 유연하게 넘어선 이들은 향유하는 팬문화도, 그들을 향한 팬 마케팅도 바꾸고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 고척돔서 열린 가수 임영웅 앙코르콘서트. 중장년층 팬들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진행으로 젊은 아이돌 팬덤에게도 화제가 됐다. 물고기컴퍼니 제공

진화하는 팬 마케팅 “아이돌 소속사는 보고 배워라”

월드투어까지 찾아 관람하는 아이돌 팬덤 활동 ‘n년차 프로’ 직장인 A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고척돔서 열린 가수 임영웅 앙코르콘서트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 어떤 공연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고척돔 4층 좌석이 높아 어른들 걱정을 했는데 진행요원이 어머님들 손을 잡고 자리까지 안내해드리더라고요. 또 공연 이후에는 고척교까지 스태프들이 나와서 한 분 한 분께 인사하는 것도 감동이었어요. 아이돌 콘서트에서 진행요원과 안전요원들이 팬을 무슨 불가촉천민 대하듯 하는 모습만 봤는데, 너무 달랐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키오스크를 두려워하는 어르신을 위해 전담 요원을 배치하고, 혼자 온 관객을 위해 사진을 찍어주는 요원도 있었다(심지어 가로 컷, 세로 컷 섞어가며 5장씩). 그는 “팬 배려의 공간 그 자체였다”며 “요즘 표값도 만만치 않은데 모든 공연기획사에서 임영웅 콘서트를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스터트롯> 콘서트 등 다수의 트로트 공연을 기획한 한 관계자는 “트로트 공연은 관객 연령대가 높은 만큼 융통성 있게 편의를 봐드리는 것이 공연 진행 원칙의 첫 번째”라고 말한다. 트로트 공연은 자리 안내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기존 공연보다 더 많은 현장 인원을 배치한다.

“트로트 공연은 일찌감치 콘서트장에 오는 분들이 많아서 매표소 오픈 전 외부 안내를 빨리 시작합니다. 화장실 문제도 있고 해서 재입장과 중간 입장을 자유롭게 열어둡니다. 간혹 물 반입을 금지하는 공연도 있지만 트로트 공연 관객 중에는 시간에 맞춰 약 드시는 분들이 꽤 있어서 물은 무조건 들여보내야 합니다.”

‘팬질(Fan질)’. 특정 가수를 열광적으로 좋아해 팬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활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제 지갑을 열면서도 ‘빠순이’라고 무시당하는 풍토는 적어도 트로트 팬문화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중장년 팬 마케팅은 마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듯 세심한 배려가 기본이다.

윤병대씨는 김호중이 준비한 역조공 담요로 그를 위해 항공 점퍼를 만들어 콘서트 무대까지 올랐다. 그는 말 그대로 ‘성덕팬’이 됐다. 본인 제공

가족주의 팬덤 “아니 이게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지난해 12월 열린 가수 김호중의 콘서트 대전 공연에서는 이색 이벤트가 진행됐다. 김호중이 콘서트 관객을 위해 ‘역조공’한 극세사 담요를 옷으로 리폼해 멋지게 단장한 팬을 뽑는 패션 콘테스트가 그것이다. 이 콘테스트에 뽑힌 ‘금손’ 관객의 의상 굿즈는 한동안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이런 곱디고운 유행을 견인한 이는 담요로 점퍼를 직접 만들어 김호중에게 선물한 남성 팬 윤병대씨(67)다.

그는 TV조선 <미스터트롯>에 출전한 김호중이 ‘천상재회’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리는 이른바 ‘덕통사고’를 당했다. 45년 의상업계에서 일한 베테랑 디자이너는 콘서트에서 담요를 보자마자 ‘나도 뭔가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옷 짓기를 시작했다.

“호중님 얼굴이 크게 담긴 담요더라고요. 이 소중한 걸 어떻게 깔고 앉겠어요? 담요를 펼치는 순간 직업병이 발동했습니다. ‘요즘 항공 점퍼가 유행인데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나?’ 싶었죠. 콘서트 3회를 관람하고 담요 3장이 생기니 제 머릿속에 디자인이 떠오르더라고요.”

윤병대씨가 애정을 담아 한 땀 한 땀 만든 김호중 점퍼는 세상에 하나뿐인 명품이다. 본인 제공

담요에 새겨진 김호중의 얼굴과 콘서트 타이틀인 ‘아리스트라’ 문구를 살려내느라 세심한 재단이 필요했다. 골프복 바람막이 원단으로 내피를 만들고 ‘부드럽게 직진하시라’는 의미로 지퍼를 달았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손수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명품 점퍼가 완성됐다.

“옷을 완성했지만 이제 어떻게 전할지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무대로 던져야 하나? 별님(김호중)이 관객석에 내려왔을 때 건네야 하나? 공연 흐름을 깨면 안 되기에 고민이 많았죠. 팬클럽 총무로부터 소속사로 사연을 보내보라는 조언을 받고 반신반의하며 e메일을 보냈는데 대구 공연 2시간 전에 ‘공연 기획팀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 콘서트에 오십니까? 공연장에서 뵙겠습니다’라는 짧은 통화 이후 윤씨는 김호중이 진행하는 콘서트 속 코너 ‘큰 별이 빛나는 밤에’에 호명되어 직접 만든 옷을 들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겨우 1m 앞에 별님이 있는데 한마디로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직접 점퍼를 입혀주며 모양새가 잘 잡히도록 어깨선을 다독이고 손목선도 잡아주다 그의 눈을 봤는데 살짝 울컥하는 모습도 봤고요. 저 역시 평생 잊지 못할 15분을 경험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눈물샘이 터지더라고요. 그때 절 보고 남자가 질질 짠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내 감정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윤씨는 김호중이 마치 아들 같다고 말한다. 김호중은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할 때 매주 두 차례 팬들에게 편지를 썼단다. 그는 “군대 간 자식도 매주 부모에게 편지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아리스(팬덤 이름)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팬들은 ‘우리 가수가 어디 가서 기죽지 말았으면 좋겠고’… 이런 마음이 딱 가족과 같다”고 말했다.

장은진 대중문화 평론가는 중장년층 팬덤의 특성을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과 1세대 아이돌 팬덤문화를 이미 경험한 X세대의 기획과 구매력 그리고 58세대의 ‘자아정체성 찾기’와 ‘빈둥지증후군’으로 풀어낸다. 중장년 팬들은 가수를 집 떠난 자식을 대신하는 존재로 여기며 ‘탈덕’ 없는 팬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가족문화를 중요시하는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팬덤문화입니다. 한국인은 밥은 먹었냐, 언제 밥 한번 먹자며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정의 대상을 챙기고 배려하는 문화는 중장년층의 팬덤문화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고가의 선물 대신 직접 담근 팔도의 김치나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고 직접 만든 굿즈를 선물하거나, 스타의 건강을 내 자식처럼 걱정하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움을 찾는 거죠.”

소극적인 활동만 하던 김현숙씨는 영탁 팬이 된 후에는 팬들과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고 말한다. 그가 나눔하는 영탁 인형 옷들. 본인 제공

팬덤은 취향 공동체 “예쁜 거 나눠야 제맛이죠”

가수 영탁의 팬 김현숙씨(44)의 주된 활동은 나눔이다. 영탁의 캐릭터 인형 ‘탁랑둥이’의 옷을 손뜨개로 만들어 가수 관련 모임이 있을 때마다 팬들과 나눈다. 그는 “나눔을 많이 하는 팬들에 비하면 제 나눔은 소극적인 편”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영탁 팬분들은 콘서트나 모임에 갈 때마다 굿즈나 포토카드 등을 나누세요. 그래서 저도 한번 해보자 싶어 손뜨개를 시작했어요. 15㎝나 20㎝ 인형 옷은 구하기 쉬운 편이지만 10㎝ 작은 인형 옷은 구하기 힘들고 가격도 만만찮아서 작은 옷 위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는 보통 인형 옷을 20~30벌 정도 만들어 모임에 나간다. 그가 지금까지 나눈 옷은 200여벌에 이른다.

“제가 선물한 옷을 입은 인형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게재되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다음에 만나면 다른 걸 또 드려야지’ 하고 으레 손뜨개로 손이 갑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과거에는 혼자 조용히 공연 보러 다니는 게 전부였는데 영탁님 팬이 되고 나서는 팬들과 교류도 많이 하고 활발해졌어요.”

김현숙씨가 손뜨개로 인형옷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본인 제공

팬들도 서글서글한 성격의 영탁을 닮아가는 것일까. 그는 “영탁 팬들은 서로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이 크다”며 “모르면 옆에서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작은 걸 나눔해도 예쁘다고 엄청나게 칭찬해준다”고 자랑했다.

장 평론가는 트로트 팬덤을 다른 말로 ‘취향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서로 취향이 같은 사람들의 끈끈한 연대가 비교적 젊은 팬덤에 비해 강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 경험과 연륜을 가진 만큼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는 것에 능숙하다.

“팬들끼리 뭉쳐 봉사, 나눔, 재능기부 활동을 하는 모습은 중장년 팬덤 내에서 매우 익숙한 광경입니다. 개인보다 지역사회에 헌신하는 팬덤문화로 스타나 덕질 대상의 이미지와 가치를 높이려 합니다. ‘정’이라는 한국 정서로 단단하게 봉합되어 응집력을 발휘하며 팬덤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연예인 팬덤으로 형성된 취향 공동체는 중장년층의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본 ‘욘사마’ 팬덤도 마찬가지다. 비록 배용준은 연예 활동을 중단했지만 여전히 이들은 그의 출연 드라마와 관련된 노래를 합창하는 ‘BYJ(배용준) 코러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평균 연령 80대를 훌쩍 넘은 이들은 가족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챙긴다. 중장년층 팬덤이 ‘탈덕’하더라도 ‘사람’은 남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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