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은 수면욕·식욕 못지않은 인간의 본능

김예진 2023. 1. 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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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왜 얼굴에 그림을 그릴까
고대 땐 정체성 확인·영적 의미
산업혁명 이후에 점차 대중화
역사적으로 절대적 기준 없어
고대부터 현대까지 화장 역사
흥미롭고 알기 쉽게 풀어 나가
할리우드 톱스타 화장도 소개

메이크업 스토리: 화장의 기나긴 역사/리사 엘드리지/솝희 옮김/글항아리/3만2000원

치아를 검게 화장하지 않은 여인을 두고 ‘껍질 벗겨진 애벌레’ 같다며 비하했다. 여성은 맨 치아, 흰 치아로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긴 시간 부지런해야 했고 고통도 참아야 했다. 쇳조각을 식초에 녹여 만든 짙은 갈색의 아세트산 철 용액을 차 가루 등에서 추출한 식물성 탄닌과 섞어 검은 화장품을 만들었고, 이를 하루에 한 번씩 치아에 발랐다. 고생 끝에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검은색 치아’를 갖게 되면 한껏 뽐냈다. 흰 치아가 아니라 검은 치아를 위해 노력했다니, 치아 미백을 위해 애를 쓰는 현대 기준으론 상상하기 어렵지만 실재했던 일이다. 바로 일본에서 선사시대부터 메이지시대 말까지 지속된 ‘흑치’ 문화 얘기다.

잡티 없는 피부를 만드는 컨실러. 꿀광이 흐르는 보습 크림. 톤업을 위한 파운데이션. 눈매를 교정하는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 혈색을 부여할 볼터치와 립스틱. 동양과 서양, 백인과 흑인 할 것 없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세계인의 가장 기본적인 화장 매뉴얼과 화장 필수품이지만, 흑치 풍습 사례만 봐도 이런 매뉴얼이 인류 화장의 역사에서 절대적 기준이 아니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화장은 다양한 맥락 속에 꾸준히 변모하며 존재해왔다. 왼쪽 사진은 16세기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정부로, 미모와 야심으로 국정까지 조종하게 되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다. 그녀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퐁파두르 핑크’를 바른 모습이 표현돼 있다. 화장에 사용되는 회화 기법이 회화로 다시 표현된 드문 사례다. 오른쪽 사진은 마스카라 과잉이 유행한 1960년대 모습이다. 속눈썹 화장을 하는 새로운 도구와 제형들이 생겨나면서 속눈썹이 얼굴을 지배하게 됐다. 글항아리 제공
저자 리사 엘드리지는 ‘메이크업 스토리’에서 화장이 단지 예쁘게 보이려는 여성들의 소품, 그런 획일적 기준에 포획된 여성들의 꾸밈 행위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가령 흑치를 일본에선 1870년 금지했지만, 아시아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베트남의 경우 흑치 풍습이 아직 전해지는데,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것은 악령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며 영적인 의미까지 부여한다고 한다. 남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붉은 오커도 마찬가지다. 7만∼12만년 전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붉은 오커는 몸과 얼굴에 바르는 용도였는데, 고대인들은 얼굴에 색을 칠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 확인했고 적과 맞설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콜’이라는 먹을 눈에 바르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했다. 종교적 의미와 눈병 예방이라는 신체 보호 목적이 두루 담긴 행위였다.

저자는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화장이 인류사 내내 이어졌고 수면욕, 식욕 등 기본적 욕구 못지않은 원시적 본능이었다고 말한다. 고대엔 정체성 확인, 영적 의미, 신체 보호라는 다종다양한 맥락 속에서, 중세엔 노동하지 않는 얼굴, 흰 피부를 더욱 희게 표현한 귀족들의 전유물로, 산업혁명 후엔 ‘민주화된 사치품’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리사 엘드리지/솝희 옮김/글항아리/3만2000원
화장에 대한 역사적, 인문학적 고찰과 정보, 지식이 담겼지만, 흥미롭게도 저자는 학자가 아니다. 현업에서 수십 년 활동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그것도 케이트 윈즐릿, 키라 나이틀리, 에마 왓슨 등 할리우드 톱스타 메이크업을 맡아온 인물이다. 메이크업 업계 최전선에서 일하는 직업인이 자신의 천직인 메이크업에 대한 애정과 고민을 담아 역사 속 화장에 관한 궁금증을 알기 쉽게 풀어나가는 여정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고대 화장의 역사에 관해서는 저자의 애정 어린 호기심이 묻어난다면, 현대사 부분에선 저자의 전문성이 진가를 발휘한다.

책 속 ‘화장의 뮤즈’ 코너에선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여성 스타의 이름이 가득한데, 가령 오드리 헵번이나 매릴린 먼로 등 역사적 아이콘들이 만들어낸 화장 특징이 화장 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켰는지 등을 설명한다.

저자는 오늘날 화장은 화장품 산업이 제시하는 획일적 기준에 맞추려는 대중의 욕망이 됐고, 이런 기제에 대한 반발로 ‘화장품 버리기 캠페인’(탈코르셋 운동)까지 나오는 상황임을 분명히 바라본다. 그가 나름대로 내린 해법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나의 이상적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용인된다면 화장은 권력 분산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받아들여져 화장하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재미 삼아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발라보기도 한다. 기운차고 강해 보여야 할 때 화장은 당신에게 힘을 줄 것이다. 결국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빨간 립스틱이나 스모키 아이섀도를 바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여성에게 큰 힘이 된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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