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숨진 집주인이 8월 전자 서명…나도 걸린 ‘전세사기 덫’

최하얀 2023. 1. 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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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신축 빌라 분양·전세 ‘동시진행’
한채당 수천만원 리베이트 놓고
건축주·분양사·중개사 얽히고설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지난해 12월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화곡동 ○○○-○○○. 실평 14평 에어컨 2대 전세240 R15개!!! 손님 부탁드려요∼∼”

신축빌라 ‘분양 컨설팅사’로 알려진 업체 직원들이 서울 강서구에서 주로 활동하는 공인중개사들에게 지난 수개월간 보낸 문자메시지 가운데 하나다. ‘R’은 리베이트를 뜻하는 업계 용어다. 해당 빌라를 2억4천만원에 전세계약할 임차인을 데려오는 공인중개사에게 리베이트 15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의미다.

최근 수면 위로 드러난 ‘전세사기’ 한가운데는 빌라 한 채당 수천만원에 이르는 리베이트가 놓여 있다. 이 리베이트를 놓고 건축주와 분양컨설팅사, 공인중개사, ‘바지’임대인 등이 얽히고설켰다. 적게는 400만원, 많게는 1200만원 정도를 리베이트에서 떼내어 세 들어 살 집을 보러온 사람에게 ‘이사 지원금’을 주겠다는 ‘미끼’도 던져진다. 강서구 화곡동 한 신축빌라를 2021년 5월에 전세 계약한 김아무개씨는 “보증보험도 가입된다고 하고, 거기다 1천만원을 지원한다니 대출 이자를 아낄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보험 심사 중 들려온 집주인 사망소식

김씨의 임대인(집주인)은 2021년 7월30일 사망한 정아무개씨다. 숨진 당시 정씨의 나이는 42살. 제주도 한 아파트에 살고 직장도 제주도에 있는 사람인데, 서울 강서구 일대 빌라들을 하루에도 몇채씩 사들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그렇듯, 김씨도 정씨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집을 보던 당시 중개사가 마지막으로 신축빌라 하나만 보여주겠다며 데려갔어요. 일단 분양 전이니 건축주와 계약을 하고, 이후에 새 임대인(정씨)이 올 것이며, 전세계약은 당연히 승계된다고 했고요. 조금 불안했지만 보험이 된다고 하니 괜찮겠거니 했고, 당시는 전세대란 시기라 원하는 조건에 집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이 정도면 좋은 조건이다 싶었어요.”

김씨는 입주 몇 달 뒤 계약 전반에 관여한 분양 컨설팅사 직원으로부터 정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보증보험 가입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는 중인데, 집주인이 숨져버린 것이다. 김씨는 ‘혹시 피해자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살고 있는 빌라 엘리베이터에 소식을 알리는 글을 붙였다. 그 결과 김씨는 같은 빌라에 정씨와 전세계약을 한 집이 다섯 가구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해자들은 이렇게 알음알음 모였다. 현재 정씨 관련 정보를 나누는 피해자들은 약 80명에 이른다. 어떤 피해자는 정씨의 사망 소식이 믿기질 않아 제주도 정씨 집 근처 장례식장에 모두 전화를 걸어 사망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또다른 피해자는 경찰서를 찾아 수사를 요청했지만 ‘고소 대상인이 숨져 사건 자체가 안 된다’는 답만 들었다. 30대 강아무개씨는 “뉴스에서 강서구 전세사기 소식이 자주 나오자 부모님이 ‘너는 괜찮냐’라고 물었는데, 걱정을 끼칠 수 없어 거짓말을 했다”며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바지’ 임대인이 사라진 뒤

정씨 임차인들의 전세계약 시기는 2021년 4∼7월에 집중돼 있다. 계약을 하고 얼마 안 되어 정씨가 숨진 탓에, 보험 가입이 완료되지 않은 사람이 상당수다. 김씨는 “최근 언론을 탄 ‘빌라왕 사건’(수도권 일대에 빌라 1139채를 보유했다가 지난해 10월 숨진 김아무개씨 사건)보다 정씨는 1년여 일찍 숨졌다”며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아 아직도 자신의 임대인이 사망했는지조차 모르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과 업계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수법은 일관됐다. 건축주가 생각하는 투룸 빌라 한 채의 적정 분양가가 2억원이라면, 건축주와 분양 컨설팅사가 2억5천만원에 분양을 성공시키는 대신 5천만원을 컨설팅사가 챙기기로 약속한다. 그 뒤에 공인중개사들에게 리베이트를 내걸고 2억5천만원에 전세계약을 할 세입자를 찾는다.

전세금은 전세계약을 맺은 건축주에게로 넘어가고, 집 명의는 형식적으로 2억5천만원에 집을 매수하는 새 임대인에게로 넘어간다. 무자본 갭투자로 ‘깡통주택’ 보유자가 된 새 임대인은 명의 제공 대가로 채당 수십에서 수백만원을 받는다. 2년 뒤 보증금 반환 책임은 법률상 임대인에게 있고, 나머지 건축주나 분양 컨설팅사에는 책임이 없어진다.

업계가 ‘동시진행’이라고 부르는 이런 방식의 신축빌라 분양·임대 사업에서, 임대인은 ‘바지’에 그친다. 정씨의 또다른 임차인 박아무개씨가 공개한 보증보험 가입신청서를 보면, 정씨의 전자서명일자는 2021년 8월4일이다. 정씨가 숨지고 닷새 뒤에 전자서명이 이뤄진 것이다.

다른 임차인 조아무개씨는 “2021년 6월에 입주를 했고, 그해 9월7일에 분양사무실에서 보증보험 가입 서류를 위한 추가서류 제출 요청 연락을 받았다”며 “정씨가 죽었음에도 사기가 이어진 것 아니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택도시보증공사 관계자는 “누군가 정씨의 개인정보와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대인 숨지자 놀란 ‘업계’…“관행이 그랬다”

정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동시진행 업계도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놀란 임차인들의 연락을 받은 분양 컨설팅사 직원들과 공인중개사들은 하나같이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한 컨설팅사 20대 직원은 몇몇 임차인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내 정씨 사망 사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이 모인 단체 카카오톡방 링크를 공유하기도 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이 직원은 최근 일부 언론에서 바지 임대인 뒤에 전세사기를 공모한 거대한 ‘배후세력’이 있는 듯 다루는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했다.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면 세입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그래도 세입자분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하려고 카톡방도 알려드린 것인데, 저를 피의자로 몰아가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직원으로 일했을 뿐이고, (정씨) 요청대로 집을 소개해줬을 뿐인데 죄인가요. 보증금은 새로 바뀐 집주인(정씨)이 떼어간 게 아니라 죄다 건축주가 가지고 갔다는 것을 (정부나 언론도) 알면서, 공론화시켜야 하고 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임사자(등록임대사업자) 앞세우는 것 아닙니까. 정부가 부동산대책으로 임사자에 대한 혜택을 다 주고는 죄다 서민들이 잘못했다고 하는 거고요.”

이 직원의 발언은 지난 정부가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정책을 추진한 것이 ‘동시진행’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정부는 지난 2017년 12월 “집주인과 세입자가 상생 가능한 등록 민간 임대주택을 늘리겠다”며 임대료 인상률을 5% 이하로 하는 등록임대사업자에게 종합부동산세 등 세금을 대폭 감면하는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건축주, 분양 컨설팅사들 입장에선 빌라를 수백채 사들여도 부담해야 하는 세금이 매우 적어지다 보니, 무자본 갭투자 ‘바지’ 임대인을 끌어들여 동시진행하는 사업 구조를 설계하기 쉬워진 것이다.

정부는 등록임대사업자 제도를 악용한 다주택자 갭투기가 성행하자 2020년 아파트에 대한 혜택을 폐지했지만, 빌라 등 다세대주택에 대해서는 남겨놨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최근 전용면적 85㎡ 이하 아파트에 대해 등록임대 혜택 부활 방안이 발표됐다.

정씨와, 지난해 10월 숨진 1980년생 이른바 ‘빌라왕’ 김씨, 빌라 수십채를 보유했다가 2021년 12월 숨진 1995년생 송아무개씨도 모두 등록임대사업자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모임을 대표하고 있는 배소현씨는 “세 사건을 파헤칠수록 하나의 거대한 배후가 있다기보다, 굉장히 많은 건설사, 컨설팅 회사, 중개사 등이 관행적이고 암묵적으로 동시진행 사업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사기 주모자들을 쫓는 데 그치지 말고 주택 임대차제도 전반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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