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달력을 바꾸며

기자 2022. 12.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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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달력이 왔다. 거창의 북부농업협동조합에서 만든 큼지막한 달력. 지난가을 벌초하러 갔을 때 큰집의 형님께 부탁했더니 잊지 않고 챙겨주신 것이다. 이런저런 기교조차 없는 달력은 손바닥처럼 편안하고 웅숭깊은 마당처럼 담백하다. 먼지가 미끄러질 만큼 미끈한 달력. 24절기는 물론 매일매일의 음력과 간지로 빼곡한 달력. ‘손없는날’도 국경일만큼이나 도드라지게 표기되어 있다. 나의 모든 것은 고향에 그 근원이 닿지 않은 바 없겠지만 이젠 날짜까지도 시골에서 온 것이라서 마음 더욱 든든하다.

달력 속의 숫자만큼 시치미를 뚝 잘 떼는 게 또 있을까. 달이 이면을 보여주지 않듯 오로지 한쪽만 보여주는 달력. 0부터 9까지의 숫자는 우주를 운행하는 뭇별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을 닮았다. 덜거덕거리는 핸들, 브레이크, 바퀴 같은 이 작은 장치 속에 자연은 제 비밀을 숨겨놓았다. 주기율표처럼 배열된 달력의 수학은 고요하되 정교하다. 복잡한 기호 하나 없이 단 하나의 숫자와 그 조합만으로 내 일생의 방정식을 넉넉히 세워주는 것. 생일도 기일도 이미 이 달력 안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것도 아침과 저녁처럼 아주 가깝게.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꾼다지만 올해도 벽지는커녕 달력만 바꾼다. 내가 무엇이 될까, 간간이 궁리해 보았지.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 자주 되돌아본다. 나이가 주는 버릇이다. 바란 것과 겪은 것, 그사이에는 머리와 발의 높이 차이처럼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꿈이라는 것, 일이라는 것. 이젠 다 지나가 버렸다. 흐르지 않는 척 엄연히 흐르는 강물, 옛날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단단한 돌, 작년 그 자리 근처에서 다시 피는 한해살이풀. 가까이의 이런 것들이 참 대견하고 ‘억수로’ 고맙다. 이제 2022년은 다시 만날 일 없겠지만 그래도 임인년은 잘하면 또 만날 수 있겠다, 60년 후.

달력은 묵은 달력도 좋다. 내 손으로 행사하는 이 권력의 교체 뒤로 뚝뚝뚝 떨어지는 건 흰 침묵. 아는 이들과는 서로 살아서 이별한다. 이 사실을 텅 빈 백지는 엎드려 간결하게 증명한다. 호명호사(呼名好事), 이름을 불러주면 좋은 일이 생긴다. 또 새롭게 시작하는 낯선 시간 속으로 풍덩 뛰어들며 네모의 침묵 위에 논어를 써 볼까, 노자를 그려 볼까.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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