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팥죽 맛집’ 이야기…‘팥’의 진면목에 빠지다

이문수 2022. 12. 1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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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섣달] ‘팥죽 맛집’ 경기 양평 문호리 팥죽
단맛 출중한 토종 ‘소적두’ 한달에 500㎏ 소비
각종 미네랄 풍부한 천연 광천수도 맛의 비결
매년 동짓날이면 전국 각지서 2000여명 찾아
팥아이스크림 ‘불티’…팥막걸리 생산도 ‘눈앞’
 

‘문호리 팥죽’ 식당의 대표 메뉴 팥죽. 국내산 팥과 쌀로 만든다.


365일 가운데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 이 시기 속이 구쁠 때 꼭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벌건 팥물에 마늘각시처럼 곱고 동그란 새알이 퐁당 빠진 팥죽이다. 팥은 생각보다 활용 범위가 넓다. 죽은 물론 붕어빵·찐빵과 같은 겨울 간식에도 반드시 들어가는 음식 재료다. 또한 비타민·철분·단백질이 풍부한 곡물이다. 깊어가는 겨울철 영양 많고 맛도 좋은 팥과 좀더 친해져보는 것은 어떨까?

“기자님, 너무 바쁘니깐 점심·저녁 시간 피해서 오세요. 안 그러면 우리 말 한마디 못 나눕니다.”

동지가 바투 다가왔다. 이맘때면 밤만 길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팥죽’ 식당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도 길어진다.

식당 주인 백현진씨가 수매한 햇팥을 보여주고 있다.


식당 주인 백현진씨(65)는 “매년 동짓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2000여명이 식당을 찾는다”면서 “60평(200㎡) 규모 식당에서 종업원이 열명 있어도 일손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좋은 음식은 좋은 재료에서 나오는 법. 2008년 식당을 열기 전 백씨는 죽에 잘 어울리는 팥을 찾겠다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얻은 해답이 토종 팥인 ‘소적두’였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팥 종자 가운데 작은 편이다.

“소적두는 귀한 종자예요. 소출이 잘 안 나니 농민들이 기피하거든요. 그런데 단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아낸답니다.”

팥은 겨울철 대량으로 수매한다. 12월 중순에서 말까지 전북 무주, 경남 함양·산청 등지에서 나는 것을 쓴다. 중국산과 견줘 4배가량 비싸다. 한달에 소비하는 팥만 500㎏ 가까이 된단다.

좋은 재료를 얻으려는 그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함양에 저장시설을 지었다. 사시사철 9∼10℃ 저온에서 보관하니 1년 내내 맛 좋은 팥죽을 먹을 수 있다.

새알 재료도 신경 쓴다. 이곳 팥죽에 들어가는 새알은 새하얗지 않다. 국내산 찹쌀·멥쌀·흑미·현미·수수를 알맞은 비율로 섞어 쓰는 탓이다.

별미가 탄생하기까지 좋은 물도 한몫한다. 팥죽 끓일 때 아무 물이나 쓰지 않는다. 각종 미네랄이 들어간 천연 광천수만을 고집한다.

“강원 춘천 쪽에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광천수가 나오는 곳이 있다기에 그 일대 땅을 아예 사버렸죠 뭐. 거기서 직접 물을 길어다 씁니다. 손님에게도 정수기물 대신 광천수를 드려요. 건강수라고 몇통씩 챙겨 가는 분도 있다니깐요.”

식당이 유명해지면서 주변에 다른 팥죽집이 생겨났지만 전혀 괘념치 않는다. 함께 식당을 경영하는 아내 조인숙씨(66)의 말이다.

“좋은 재료와 장인정신에서 출발한 음식 철학은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아요. 누군가는 맛을 흉내 낼 수 있겠으나 똑같이 만들 수 있겠어요?”

팥죽색이 나는 나비넥타이를 한 말쑥한 차림의 백씨는 꼭 호텔 지배인 같다. 그런데 어쩌다 한적한 시골에 내려와 식당을 차렸을까. 한때 서울에서 구의원을 거쳐 의장 자리까지 오를 정도로 잘나갔다. 정치에 큰 뜻을 품었으나 여러차례 불의한 상황을 겪으며 귀촌을 결심했다.

“광주광역시에서 대학을 다닐 때 가까이 사시는 외삼촌 댁에 많이 놀러 갔죠. 그때 정성스레 내오시던 팥죽이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팥죽 장사를 해보자며 팔을 걷어붙였어요.”

‘문호리 팥죽’ 식당에서 파는 팥칼국수.


금강산도 식후경. 팥죽과 팥칼국수를 시켰다. 팥물을 한모금 들이켜고 나니 과연 예사롭지 않다. 걸쭉한 것이 온기를 가득 품었다. 소적두의 응축된 단맛이 워낙 감미로워 설탕의 도움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다. 백설기 같은 쫀득한 식감을 자랑하는 새알 스물한개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금세 사라져버린다.

재료 외에 맛집만이 지닌 요리 비결이 있을까. 하지만 백씨 입에서 다소 허무한 답변이 나온다.

“팥죽 쑤는 거 어딜 가나 똑같지 별다른 비결이 없어요. 그냥 좋은 재료가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도록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뺍니다. 가령 화학조미료는 전혀 안 쓴단 말이죠.”

그는 온종일 팥만 생각하는 슬기주머니다. 최근 유명 편의점과 손을 잡고 출시한 팥아이스크림이 인기를 얻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팥을 기본으로 한 막걸리 생산도 눈앞에 두고 있다.

“소적두라는 게 작고 투박하잖아요. 그런데 척박한 땅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맛도 기가 막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죠. 농사도, 팥죽도,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 집 팥죽처럼 ‘새빨간’ 동지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양평=이문수 기자, 사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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