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靑개방 마스터 플랜 시급, 최고 건축가 빨리 모셔야" [한판승부]

한판승부 2022. 11.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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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사람 이야기 담고 싶었다
북촌 한옥이 조선시대 양반 살던 곳? 오해
인사동, 차없는 거리 되고나서 역변..역사란 그런 것
길상사에 천 억 기부하고 유골뿌린 자야, 슬픈 러브스토리
청와대 개방은 좋다, 하지만 마스터플랜은 어디갔나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
■ 방송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FM 98.1 (18:00~19:3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前 문화재청장)
▶ 알립니다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박재홍> 박재홍의 한판승부, 한판클라스. 정말 이 자리에 모실 만한 큰 스승 같은 분을 오늘 모셨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이 될 것 같은데요. 일본 편 5권, 중국 편 3권 그리고 12권이 서울 편 나오면서 총 20권의 책을 내셨어요.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님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 유홍준> 안녕하세요.

◆ 유홍준> 우리 진 작가님과 김 소장님 인사 나눠주시고.

◆ 진중권> 안녕하십니까?

◇ 박재홍> 진 교수님이 대선배님 오셔서 굉장히.

◆ 진중권> 미학과 선배님이십니다.

◇ 박재홍> 서울대 미학과 선배님이시기도 하고. 최근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총 12권이 됐어요. 11권, 12권이 나왔습니다, 서울 편. 이게 완결편입니까? 독자들이 궁금해하는데요.

◆ 유홍준> 저도 완결하고 싶은데. 많이 쓴 것 같아도 내가 국토의 한 반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또 소외돼서 서운해하는 사람도 있고 지자체에서 요구도 있고.

◇ 박재홍> 그런가요?

◆ 유홍준> 그래서 다음번에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개념으로 해서 시대순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해서 현대까지 국토를 한 바퀴 도는 걸로 해서 그걸로 해서 내년쯤에는 마무리하고 싶어요. 내년이 30년 되는데요. 이제 그만 나도 좀 쉬어야죠.

 

◆ 김성회>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93년에 처음 책 나왔는데.

◆ 유홍준> 처음 나왔죠?

◆ 김성회> 인기를 일으키면서 저희도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벌써 30년이 됐네요.

◆ 유홍준> 30년이 됐죠.

◇ 박재홍> 만약에 기획하신 책이 나오면 더 인기가 많아지실 것 같은데요. 어른들과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고 학생들 교육을 위한 자료에도 굉장히 좋을 것 같아서요.

◆ 유홍준> 그래서 10대들을 위한 문화유산 답사기라고 아동 작가가 리라이트 해서 읽는 게 있어요. 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어차피 내 문체가 걔네들에게 호소하기에도 쉽지 않은데. 그리고 또 아동 작가의 특징이죠. 거기에서 딱 에센스해서 본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전해 주는 게 있어서 그건 좋다고 생각해요.

◇ 박재홍> 그렇군요. 책 서문에 보면 선생님 사인하시면서 내 고향 서울 이야기를 쓰며라고 친필로 써주셨어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 서촌에 대한 기억도 자세히 써주셨었는데. 서울에 대한 사랑이랄까요. 굉장히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 유홍준> 서울 토박이로 서울 종로구 창성동 130번지가 본적이고 거기에서 청운국민학교 다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다녔어요. 그리고 이제 휘경동으로 이사 갔으니까. 그랬는데 한번 서울시에서 투어를 해달라고 그래서 했는데 중학생 애가 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다른 것보다 내 어렸을 때 여기에 뭐가 있었는데 누가 살았고 그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들어서 너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했더니 어렸을 때 얘기래요. 그래서 나이가 어떻게 되냐 그랬더니 나하고 띠동갑이래요. 그래서 12년, 24년, 30… 48년 차이인데. 그러니까 그 아이가 내 얘기를 듣는 거는 내가 마치 3. 1운동 때 얘기 듣는 것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쓰면서 그분이 고현학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게 일본에서 나온 민속학인데 고고학은 옛 유물을 가지고 연구하는 건데 고현학은 현재를 가지고 연구를 한다 하는 그런 개념이어서 이 현재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은 나중이 되면 고고학이 되니까. 왕희지라는 유명한 서예가가 난정계서라고 하는 유명한 작품이 있어요. 거기에 자기 집에서 40명 모아서 계를 하고 나서 시문을 써서 묻고 서문을 쓰면서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해요. 후지시금이 역유금지시석이니 후대 사람이 지금을 보는 것은 지금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비슷할지니.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게 후대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겠냐. 그런 마음으로 살면서 또 보면서 생각한 거를 그냥 써서 여태까지 문화유산 답사기와 달리 사람들의 이야기.

◇ 박재홍> 너무 좋네요.

◆ 유홍준> 그리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예술의 향기 그런 얘기들을 썼죠. 특히 성북동 같은 경우는 수연산방의 상허 이태준에서부터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박태원의 싸리울타리집,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그거 전부. 또 우리 진 교수도 알 만한데 백양당 출판사라고 해방공간에 아주 유명한 출판사가 있었어요, 배정국이라고. 그분이 나중에 조사 강하게 받고 월북해서는 했는데 해방공간에 나온 멋있는 책, 이상 전집, 상허 독본 전부 백양당 출판사였거든요. 박태원이 돈암동 살다 거기로 온 게 백양당 출판사의 배정국 사장이 의열단 약봉과, 김원봉이죠.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쓰라고 선인세로 그 초가집을 사준 거였어요. 그렇게 끈끈하게 있고 옛날 문장지가 전부 스물몇 권 나왔는데 거기 목차를 펴면 백양당 와이셔츠 넥타이 광고가 실렸어요. 그게 스폰서였죠. 사실상 문장지의 일당들이 전부 성북동에 살고 있었어요.

◇ 박재홍> 그렇군요. 너무나 유서 깊은 곳.

◆ 유홍준> 그러니까 그것을 알고 그 거리를 걸으면.

◇ 박재홍> 너무 재미있죠.

◆ 유홍준> 30년대, 40년대 초의 역사의 향기가 있고 또 정비도 잘 돼 있어요, 성북동의 경우에는.

◆ 김성회> 제가 마침 지난 주말에 한국관광공사에서 길 찾아서 길상사부터 시작해서 성균관까지 넘어가는 길을 아내랑 같이 걸어갔는데 지금 말씀하신 역사적 내용은 잘 못 보고 그냥 표지판만 보고 지났는데.

◇ 박재홍> 단풍 참 좋구나 하고.

◆ 김성회> 그렇죠. 사실 단풍 보러 갔다 왔었는데.

◆ 유홍준> 갔다 왔으니까 책을 읽으시면.

◆ 김성회> 그러겠습니다.

◇ 박재홍> 저희가 우리 선생님과 인연이 있나 봐요. 저희가 어제 선생님의 고향인 서촌에서 회식을 하고 왔는데.

◆ 유홍준> 그랬어요?

◆ 진중권> 전을 먹었습니다.

◇ 박재홍> 전을 먹으면서 이사장님을 뵈려고 했던 거예요. 책 얘기를 해 보면 시민들과 관광객에게 큰 사랑을 받은 북촌 한옥들이 윤보선 고택을 빼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이라면서요?

◆ 유홍준> 이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가 있는 게 북촌 하면 조선시대 노론 양반들이 살던 곳이다 그 인식을 가지고서 가는데.

◇ 박재홍> 맞아요.

◆ 유홍준> 실제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한옥 있는 것은 윤보선 가옥 말고는 거의 없어요. 거기 오래됐다 해도 백인제 가옥이고 한 씨 가옥이라고 하는 것이 1910년대에 지어진 큰 집이고 실제로 북촌 8경에서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가회동 31번지는 1934년 무렵일 거예요. 그리고 정세권이라고 하는 건축가 내지 주택업자가 그 당시에 조선 귀족들이 갖고 있는 1000평, 2000평 되는 필지를 25평, 30평짜리로 잘라서 도시형 근대 한옥을 지은 거예요.

◆ 진중권> 재개발 사업이네요, 거의?

◆ 유홍준> 완전히 그랬어요.

◇ 박재홍> 요즘으로 치면 아파트 새로 지은 거네요, 그러니까.

◆ 유홍준> 그런데 그때가 1930년대 들어가면 도성 안에 있는 인구가 12만 명인데 그중 3만 명 이상이 일본인이었어요. 일본인들이 다 회현동 쪽에 살다가 넘치니까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이때부터 도시개발 하면 이게 적산가옥하고 문화주택 이런 게 판을 치고 있을 때 정세권 이분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한옥 그것만이 한옥이 아니라 개량 한옥으로. 개량 한옥이라고 써도 되고 도시형 한옥을 개발한 거예요. 도시형 한옥의 제일 가장 큰 특징이 대청마루에 유리문이 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게 없으니까 겨울에는 못 썼는데 그래서 신문에다가 설계 공모까지 했어요. 그래서 그 당선작 가지고 해서 만든 게 익선동에 있는 한옥 그리고 창신동에 있는 한옥 그리고 가회동 31번지가 있는데. 북촌이 멋있는 거는 백인제 가옥이나 한 씨 가옥 같은 데 지금 우리가 같이 들어갈 수 있다고요. 카페고 또 서울 역사박물관이 관리하니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오설록하우스라든지 가회동 성당은 한옥 플러스 양옥으로 해서 멋있게 운영을 하고 있잖아요. 거기다 가회동 31번지에는 정세권이 지은 한옥들이 그러니까 공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담이 다 붙어 있어요. 그게 공간 활용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였죠. 그래서 어찌 됐든 우리가 전통이라고 하는 거는 이어간다는 게 중요한 생명이지만 또 하나는 변한다고 하는 특징이 있다는 말이에요.

◇ 박재홍> 변화.

◆ 유홍준> 변하지 않는 전통은 인습이라 죽어버려요. 전통은 변해야 산다고요. 그 한옥들이 근대사회에 와서는 변해졌던 그러면서도 옛 모습을 보여주는 분위기. 그게 북촌의 매력이죠. 나는 그런 관점에서 북촌을 더 즐기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있어요.

◆ 진중권> 그런데 지금 인사동을 보면요, 저는 이게 변해 가는 게 맞기는 한데 원래 모습들을 많이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고.

◆ 유홍준> 그런데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사동에 살다 보니까. 인사동의 역사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그 이전에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했던 명소였잖아요. 그러다가 30년대에 고서점 거리가 되잖아요. 그리고 6. 25동란 끝나고 나서 고서점이 엄청 활성화합니다. 왜냐하면 책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통문관도 30년대부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고서점 거리였어요. 거기가 70년대 가면 고미술 거리가 돼요. 그리고 70년대 현대화랑 시작으로 해서 선화랑, 동산방, 노화랑 등장하는 게 전부 78년 무렵이에요, 75년에서. 그래서 화랑 거리가 됐거든요. 그다음에는 그림마당민을 비롯해서 관훈미술관, 대한공간 거리가 됐고. 그러니까 이렇게 변해와서 거기까지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이거 말고도 인사동의 멋있는 건 평화 만들기나 카페, 소설 같은 데 문인,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거. 그랬다가 인사동이 결정적으로 지금 진 교수가 얘기하는 거는 88올림픽 지나고 난 다음에 전통문화 거리로 지정하면서예요. 꽹과리 치고 떡판 돌리고 하다가 더 결정적으로 바뀐 거는 인사동에서 처음으로 차 없는 거리를 만듭니다.

◇ 박재홍> 맞아요, 맞아요, 차 없는 거리.

◆ 유홍준> 10만~20만이 몰려들어서 우리가 그동안 차 없는 거리를 즐기지 못하다가 그게 쏟아지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해서 이걸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로 만든 게 쌈지길이죠. 그리고 골목이 있는데 젊은 애들들이. 젊은 애들도 젊은이들도 성격이 여럿 있는데 홍대 앞 좋아하는 사람 있고 가로수 거리 좋아하고 대학로 좋아하는데, 인사동에 오는 젊은이들은 그래도 문화예술의 향기가 좋아서 오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제 선배들이 이뤄놨던 그것을 후배들이 받아 가는 것을 차라리 참 신통하게 생각하면서 받아주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인사동의 생명을 느끼려면 문화예술의 향기가 있을 때 인사동이니까 민예품 가게라든지 또 필방이나 이런 거 하고 지켜주면 좋은데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있던 유명한 화랑들은 인사동 다 떠났죠. 전부 떠났어요. 현대화랑을 필두로 해서 국제화랑이고 학고재고 다 나갔지. 그다음에 또 하나 아쉬운 거는 고서점은 통문관 외에는 한 곳도 없어요. 그리고 통문관도 문 닫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고서점 거리라는 말은 못 하게 됐는데. 그래도 아기자기한 민예품 가게가 인사동 대로변에서 쫓겼지만 골목길에 한 30개가 퍼져 있어서 그게 옛날의 향기를 전해 주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더 지켜졌으면 좋겠어요.

◆ 김성회> 저는 성북동 길상사 단풍 보러 가서 법정스님 정도 스토리만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또 러브스토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유홍준> 백석과 김자야의 그 러브스토리는 정말 눈물 나는 거죠. 시간 있으면 길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 박재홍> 5분 드릴 수 있습니다.

◆ 유홍준> 간단하게 얘기하면 김자야라고 하는 김영한이라고 하는 서울의 한 여인이 13년생인가. 그냥 1913년인가 그래요. 집이 가난해서 기생이 됐어요, 권번에 들어가서. 그랬다가 거기서 참 재주가 좋아서 궁중무도 하고 뭐 해서 선생님 밑에서 조선어학회의 멤버였던 한 선생님한테 눈에 잘 보여서 유학을 갔어요. 갔는데 그 선생님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서 함흥 교도소에 복역을 하게 되니까 기생이 선생님 면회를 하러 왔어.

◇ 박재홍> 김자야.

◆ 유홍준> 그랬는데 거기서 사슴을 쓴 백석이 함흥영성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와서 그 음식점에서 그 선생을 만나고 난 다음에 자기 또 먹고살아야 되니까 함흥 권번에 들어가서 기생이 됐는데 그 회식 자리에서 둘이 만난 거예요, 백석하고. 백석이 사랑에 빠져서 이름을 자야라고 지어줬어요. 이태백의 시에 나오는 여인 이름으로. 그리고 같이 만주에 가서 살자고 그랬더니 자야가 백석의 삶에 자기가 걸림돌이 되기 싫어서 안 가요. 그리고 서울로 와버렸어요. 그랬더니 백석이 쫓아와서 신문기자 하면서 청진동에서 같이 살고 또 만주로 가자 했는데 안 가. 그리고 난 다음에 그게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그 시죠. 그랬는데 38선이 그어지면서 재북 작가가 되고 못 만났잖아요. 끝내 못 만났죠. 그리고 이제 자야는 능수능란해서 성북동에 빚을 내서 1만 평인가 땅을 샀는데 삼청터널이 뚫려서 땅값이 엄청 올라서 그중 일부를 잘라서 팔아가지고 대원각이라고 하는 우리 3대 요정의 하나를 지어. 그랬다가 번성을 한 거고 나중에 법정스님을 찾아가서 내가 다 도네이션할 테니 절을 지어달라고. 법정이 10년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받아서 만든 게 길상사예요.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가 내가 죽은 다음에 나를 화장해서 여기에 뿌려서 범종소리 속에서 백석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흰 눈이 내리는 날, 그러고 갔어요. 그런데 그때의 도네이션한 액수가 당시 1000억이에요. 그런데 그걸 그냥 거리낌 없이 다. 그래서 길상사 법당 창건할 적에 김수환 추기경이 와서 축사를 했죠. 그리고 그거의 답례로 법정스님이 명동성당 100주년 기념회 가서 법회를 해요. 그거 아주 진짜 종교 간에서. 역시 큰 사람은 큰 사람끼리 만난다.

◇ 박재홍> 되게 좋은데요. 또 선생님께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이게 감동스럽게 더 다가오는 것 같아요. 최근에 공간사용 적절성 논란이 있는데 청와대 개방 관련해서 또 우리 이사장님이 의견을 내셨어요.

◆ 유홍준> 그동안 내가 언급 안 했다가 이게 답사기에 북악산을 쓰니까 자연히.

◇ 박재홍>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데.

◆ 유홍준>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개방하는 건 좋은데 이건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거다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하고 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저기가 역대 대통령이 살아왔던 집이지만 그전에 총독관저로 있던 아픔이 있고 그 전에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과거시험을 보는 현장으로 거기를 육문당, 육무당을 했단 말이에요. 그때 이름이 경무대예요. 그리고 그 아래에는 팔도배미라고 해서 전국을 팔도를 구획을 해서 거기에 벼를 심어서 왕이, 고종이 거기에 가서 농사 진행 상황을 봐왔던 곳이라고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죠. 또 그 아래 칠궁이 있죠. 더 올라가면 태조 이성계 때는 거기 회맹단이 있어서 역대 공신들이 와서 우리 충성을 맹세하는 회의를 했던 그 메줏덩어리 같은 멋진 게 있어요, 겸재 그림에 나와 있는데. 이번에 내가 자세하게 쓴 이유가 이런 것들을 종합을 해서 앞으로 어디까지 복원하고 어디를 헐어버릴까의 비전을 제시해라. 그게 높은 사람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걸로 안 되고 최고 가는 건축가를 초대하든지 그분을 커미셔너로 해서 국제 컴피티션을 열든지. 그래서 국민들에게 지금처럼 그냥 계속 이렇게 할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제시를 하시오, 그게 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래야 될 것 같아요.

◇ 박재홍> 마스터플랜 저희가 방송 다른 이슈를 많이 얘기하는데 여기도 마스터플랜이 없어서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유홍준 이사장님과 만나서 많은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책을 보면 너무나 좋은 곳이 많이 있고 또 가고 싶은 곳 우리 김성회 소장님은 길상사 다녀왔다고 했는데 또 책을 참고하신 분들 이번 주말 선생님 어디 가면 좋을까요 이렇게 여쭤보면.

◆ 유홍준> 망우리 공동묘지요.

◇ 박재홍> 망우리 공동묘지요?

◆ 유홍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었어요. 망우리 공동묘지가 1934년에 아까 얘기한 일본 사람들이 택지개발을 위해서 도성 바깥에 있는 공동묘지 전체를 이장을 시킵니다. 그게 이태원 공동묘지, 노고산 공동묘지 그다음에 미아리공동묘지.

◆ 진중권> 또 저기 있더라고요, 마포 쪽에.

◆ 유홍준> 아현동 쪽에 있고 노고산에 있고 또 은평구에 있는 고택골이라고 하는 것들을. 그래서 4만 7000기가 들어가요. 그런데 공동묘지는 보장 기간이 있는데 38년입니다. 그래서 74년에 이제 더 이상 1만 장이 돼서 끝나고 퇴출만 허가를 했더니 지금은 7000기만 남고 50만 평이 전부 다 자연공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 보면 밑에서부터 올라가면서 보면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이중섭, 그 아래 차중락, 그다음에 설산 장덕수, 죽산 조봉암,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소파 방정환. 또 도산 안창호와 유상규, 권진규, 이인성 또 지석영 전부 거기 계세요.

◆ 진중권> 위인전이네.

◇ 박재홍> 꼭 가야겠습니다.

◆ 유홍준>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파리에 페르라쉐즈 같은 데가 문화예술인이 있어서 명소잖아요.


◇ 박재홍> 알겠습니다. 그곳을 꼭 망우역사문화공원 추천해 주셨습니다. 너무 아쉽네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님 여기까지 말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유홍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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