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음악-현대음악 ‘멀티 소프라노’ 서예리, 비법은 “허밍”

임석규 2022. 11. 18.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음악과 현대음악을 종횡무진하며 양쪽에서 모두 실력을 인정받는 독보적인 멀티 소프라노 서예리. 오푸스 제공

소프라노 서예리(46)는 바로크·고음악과 현대음악을 종횡무진한다. 그러면서 양쪽에서 모두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독보적인 ‘멀티 소프라노’다. 그에게 ‘우문’을 던졌다. 만약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그의 ‘현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둘 다죠. 그런데 만약 목에 칼이 들어온다면 현대음악을 하겠다고 할 겁니다.”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 대답을 하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서예리가 최근 서울에서 오른 세 번의 무대는 그의 너른 음악적 보폭을 잘 보여준다. 모차르트와 바흐의 미사를 공연하는 와중에 쇤베르크의 현대곡을 소화한 것. 소프라노에게 모차르트의 ‘C단조 대미사’(K.427)는 난곡 중의 난곡으로 꼽힌다. “소프라노 비중이 크고, 저음과 고음을 수시로 오가야 해요.” 두 번째 무대는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초연 당시 ‘두 번 듣지 않게 하소서’란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20세기의 명곡’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독일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곡이죠. 노래가 아니라 말로 하는 곡이라 언어로 승부를 봐야 해요.” 외국 사람이 우리 판소리를 노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공연 모두 서울국제음악제 무대였다. 국립합창단과 함께 공연한 바흐의 ‘B단조 미사’는 종교적 아우라가 깃든 목소리가 필요하다. 서예리는 세 무대에서 모두 청중을 사로잡았고, 평론가들도 그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지난 10월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노래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서예리는 ‘현대음악은 고음악의 거울’이라고 했다. 고음악은 맑고 청아하게 부른다. 현대 성악곡은 별별 희한한 창법을 다 쓴다. 때론 성대를 쥐어짜 기괴한 소리도 내질러야 한다. 그런데 서양음악의 시작과 끝인 두 음악이 거울처럼 마주 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는 노래 두 곡을 직접 부르면서 설명했다. 현대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1925~2016)의 ‘즉흥’과 쿠프랭(1668~1733)의 ‘르송 드 테네브르’의 한 구절씩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선율과 창법이 유사했다. 그는 “현대음악 안에는 모든 게 들어있다”며 “현대 음악가들이 낭만파 음악보다 고음악을 더 동경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음악과 현대음악 모두 성악가가 자유로운 해석을 통해 노래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고 했다.

작곡가 윤이상을 예로 들었다. 현대음악의 최첨단에 있는 그의 작품들에 고음악 요소가 많다는 거다. “윤이상 선생님 곡들엔 우리 전통음악이 많잖아요. 그게 옛날 우리 음악에 대한 그분의 동경이거든요.” 그러면서 윤이상이 작곡한 ‘밤이여 나뉘어라’의 한 대목을 불러 보였다. “이 속에 판소리가 들어있고, 무속 음악도 있잖아요. 농현(전통 현악기에서 장식음을 내는 기법인)도 나오지요.” 그는 “한국 사람들은 윤이상 선생 곡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그걸 안다”고 했다. 독일에서 그는 ‘윤이상 스페셜리스트’로도 통한다.

그러고 보니, 그는 ‘현대음악의 메카’인 독일 다름슈타트의 음악가다. 2019년부터 다름슈타트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인 최초의 외국 대학 성악과 교수’란 타이틀을 얻었다. 다름슈타트는 윤이상과 백남준이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와 교류하며 이름을 떨친 도시다.

현대음악을 상징하는 대표적 작곡가이자 뉴욕 필하모닉의 명 지휘자였던 피에르 불레즈의 ‘마지막 뮤즈’가 서예리였다. 2010년 불레즈의 85살 생일 축하 공연에서 그의 70분 대작 ‘플리 슬롱 플리’를 서예리가 불렀다. 그리고 불레즈에게서 “서예리의 크리스탈 같은 목소리로 내 곡이 연주되는 건 영광”이란 찬사를 들었다. 불레즈는 서예리에게 ‘천년을 아우르는 소프라노’란 별명도 지어줬다. 이후 불레즈의 곡을 연주하는 음악축제 무대가 열리면 서예리는 단골처럼 초대된다. 내년 4월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불레즈 오마주 콘서트’에도 서예리가 참여한다. 최정상급 현대음악 전문 오케스트라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과 함께다. 서예리에게 현대음악은 사명과도 같았다. “지금 이 시대 작곡가들의 곡을 사명감을 가지고 연주해야 해요. 그냥 무조건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거예요.”

소프라노 서예리가 지난 10월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모차르트의 ‘C단조 대미사’(K.427) 공연에서 솔로곡을 노래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독특한 발성과 창법을 쓰는 현대음악은 전문가들이 따로 있다. 서예리처럼 고음악과 현대음악을 병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현대음악은 악기도 혹사당하잖아요. 거칠게 뜯고 때리기도 하니까요. 성악도 마찬가지예요. 온갖 테크닉을 다 써야 하니 성대가 혹사당합니다. 악기처럼 성대는 바꿀 수도 없으니 발성을 유지하려면 조절을 잘해야죠.” (웃음) 성대를 보호하는 그만의 비법은 이렇다. “늘 허밍을 해요. 택시 안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허밍을 하죠. 그래야 성대가 건조해지지 않고 습도를 유지하거든요.”

먼저 그를 알아보고 무대에 세운 건 고음악의 대가들이었다. 서울대 졸업 뒤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공부하다 지휘자 르네 야콥스에게 발탁됐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지기스발트 쿠이겐도 그를 이끈 멘토다. 이 밖에 필리프 헤레베헤, 스즈키 마사아키 등 고음악의 거장들과 작업했다.

서예리는 고음악, 스탠더드음악, 현대음악을 각각 3분의 1 정도 비중으로 연주하려 한다. 그는 지난 7월 지휘자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시카코 심포니, 최정상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함께했다. 이 곡은 고음악도, 현대음악도 아니다. 공연이 끝난 뒤 괴르네로부터 “다음에 꼭 다시 하자”는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명실상부한 ‘멀티 소프라노’임을 입증한 셈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