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고아에서 장관, 사업가로’... 내 운명 한국과 비슷해” 펠르랭의 선택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2022. 11. 1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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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버려진 곳 찾아가 점심 먹었다”
’자격없이 태어났다’는 상처 극복하려 안간힘
프랑스인 어머니 “너는 내 친딸” 빈틈없이 사랑
계급, 성, 인종… 허들의 칵테일 넘고 또 넘어
佛 계급사회… 그랑제콜 입학, 수능보다 어려워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 펠르랭은 최근 입양아, 동양인, 여성이라는 벽을 넘는 과정을 기록한 정직한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출간했다. 그는 2022년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사진=장련성 기자

플뢰르 펠르랭의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의 첫 문장은 ‘나는 1974년 3월 1일 프랑스의 르부르제 공항 라운지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그날은 생후 6개월 된 한국 아기가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날이다.

프랑스인 어머니의 가슴에 처음 안긴 첫날은 눈이 내렸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에게 ‘도착했다’는 ‘태어났다’와 동의어가 됐다. 그리고 펠르랭은 40년이 지난 2013년, 프랑스의 장관이 되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고아로 떠났다 장관으로 돌아온’ 그를 한국 신문은 자랑스러운 ‘국민의 딸’로 대서특필했다. 기자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당신인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성공한 모든 이를 핏줄로 엮고 싶어 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흔드는 그의 쇼맨십 없는 대답은, 과거를 잊은 우리의 무례를 일깨웠다. 아시아인의 외모를 한 성공한 프랑스 여자. 그렇게 플뢰르 펠르랭과 김종숙의 과도한 퍼즐 맞추기는 끝나는 듯했다.

2016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네이버와 함께 하는 스타트업 투자회사 ‘코렐리아캐피탈’ 대표로 변신한 펠르랭의 행보를 나는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를 뛰어넘듯 공공과 민간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점프하며 사는 그 꿋꿋한 균형 감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펠르랭의 자전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국경을 넘어 버려졌던 아이가 어떻게 한 명의 성숙한 인간으로 통합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섬세한 심리보고서이며, 동시에 동양인, 여성, 서민 출신의 한 여성이 다양한 허들을 넘어가며 프랑스 엘리트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회 드라마다.

나는 마치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듯이, 순식간에 이 치밀하고 우아한 서사에 빨려 들어갔다. 자신을 백인이라 착각했던 아이는 장관이 되어서 ‘게이샤’라고 공격받는다.

펠르랭은 2012년 올랑드 내각의 디지털경제 특임 장관, 문화부 장관을 거친 후 현재 네이버와 파트너십을 맺은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회사 코렐리아캐피탈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사진=장련성 기자

서술자로서 그는 심리 밑바닥에 있던 수치심(잘못된 경로로 세상에 진입했다는 )과 정당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트라우마를 적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단번에, 그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꿰는 드넓은 시야를 확보한다.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는 특별한 성공 스토리에 머물지 않는다.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내적 불안과 더불어 온 힘을 다해 주류 공동체에 진입하고도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세상의 모든 ‘마이너리티’를 보듬는 울림 있는 서사로 마음을 만진다.

플뢰르 펠르랭을 만났다. 그가 버려졌던 망원동 317번지는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대신, 문화적으로 깊게 연결된 한국인 친구들과 그 골목을 찾아가 웃으며 점심을 먹었다.

-언제 한국에 도착했습니까?

“지난주에 왔습니다. 부산에서 BTS 공연을 봤어요. 저는 한국의 콘텐츠를 정말 사랑합니다. 블랙핑크, 박찬욱, 봉준호, 드라마 ‘우영우’와 ‘나의 아저씨’ 등등.”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라던 당신의 과거 발언을 기억합니다. 이번 책(’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의 가제는 ‘마음은 한국인’이었다)은 오해를 풀기 위한 세심한 편지 같더군요.

“(미소 지으며)그 워딩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제 속마음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어요. 이제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소속된 사람으로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 사람으로 느낀다'고 해서 마음 상한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지금은 이해한다고 했다. 고향과의 관계를 유전자가 아닌 사고와 지성으로 다시 회복 중이라는 펠르랭./사진=장련성 기자

-책에서 ‘나는 프랑스의 르부르제 공항 라운지에서 ‘태어났다’고 썼습니다. 부모님은 ‘태어났다’는 말 대신 ‘도착했다’는 표현을 썼다고요. ‘도착’이란 단어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어요.

“네. 버려진 채 발견됐다는 저의 시작점은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폭력적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안정된 어른이 되기 위해 저는 인생의 한 부분을 의식적으로 지워야 했어요. 그래서 부모님을 만났을 때를 시작점으로 했죠.

도착이라는 단어는 부모님이 썼어요. ‘너의 출생’ 대신 항상 ‘너의 도착’이라고 하셨죠. ‘공항에 네가 도착했을 때’라고요.”

-당신에겐 도착이 곧 출발인가요?

“맞아요. 저에겐 모든 처음이 ‘도착’입니다.”

-’아이가 도착했다’는 말은 좀 더 쌍방향으로, 진취적으로 느껴집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오는 것은 일방이 아니라 양방향이죠. 그게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부모와 내가 만나 서로의 결핍을 채웠다’고 했어요. 놀라운 자의식입니다.

“글쎄요. 자의식 이면의 무의식에는 부모가 채워줄 수 없는 근본적 결핍이 있었어요. 되돌려보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죠. 입양아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가족과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에너지를 다 짜내서 씁니다. 지금의 저는 인정받기 위해 성공을 추구하지 않아요. 안정된 뿌리, 평화, 밸런스를 찾았죠. 그래서 20~30대보다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솔직하고 우아한 문체로 유년기의 버려진 상처와 프랑스 엘리트 정계의 입문기를 그려낸 펠르랭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

-어떤 환경에서든 ‘오염 서사(결국 비참해질 거야)’가 아닌 ‘구원 서사(결국 잘 될 거야)’를 선택했기에, 당신의 스토리는 보통 사람에게 영감을 줍니다. ‘구원 서사’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나요?

“어머니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어요. 사람들에게 “얘는 특별한 사람이 될 운명이야”라고 말씀하셨죠. 부모님의 서사에서 저는 ‘생존자’였고, 항상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의 분위기를 느꼈어요. 저와 비슷한 서사로 시작해서 어두운 과정을 겪는 입양인들도 많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시작점과 화합하지 못할 수도 있죠.”

-4살 때 입양된 동생은 어떤가요?

“1986년에 네 살 된 최정아라는 한국 여자아이가 우리에게 왔어요. 동생을 보며 애틋한 마음이 들었어요. ‘말 한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지구 반대편으로 온 아이의 심정은 어떨까?’ 다행히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동생은 6개월 만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한국에서 4년을 살았던 동생은 88올림픽 때 한국을 응원했고, 저는 프랑스를 응원했던 게 기억나네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제가 한국 친구들이 더 많고, 한국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죠. 동생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웃음).”

-어린 시절에 자신을 백인으로 느꼈다는 고백에 놀랐습니다.

“어머니는 “너는 내 몸이고 내가 낳은 것 같은 딸이야”라고 하셨고, 저는 스스로를 백인으로 인식했어요. 거울을 봐야 다르다는 걸 알았죠. 프랑스 사회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삽니다. 지하철에 앉아있으면 북아프리카인과 백인들이 섞여 있죠.

사실 프랑스 사회는 이민자가 많아서 대놓고 차별하진 않아요. 오히려 인도차이나에서 온 이민자들은 지식인이 많았고, 아시아인은 근면하다는 긍정 평가도 많았어요. 어찌 보면 저 또한 ‘다른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이른 나이에 공직에 등용될 수 있었어요.”

펠르랭의 프랑스 부모는 둘 다 희귀한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도 생존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지난한 입양 절차를 거쳐 홀트아동복지회에서 6개월 된 아기 김종숙과 연결되었다./사진=장련성 기자

플레르 펠르랭은 엘리트 코스인 에섹 경영대학, 파리 정치대학, 국립 행정학교를 나왔다. 감사원을 거쳐 2012년, 사회당의 올랑드가 엘리제궁에 입성한 뒤, 그는 디지털 장관으로 임명됐다. 17명의 남성과 17명의 여성, 역사상 최초로 완벽한 성평등을 이룬 내각이었고 선출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펠르랭이 유일했다.

다양성과 양성평등이라는 정치적 과제와 잘 맞아 장관직에 발탁됐지만, 정치 생태계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한 주간지는 그에게 ‘게이샤’라는 성차별과 외국인 혐오 표현을 쓰기도 했다.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고, 계속해서 실력과 실적으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고 했다.

-어떤 사건들이 있었습니까?

“수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2015년 문화부 장관을 할 때는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범의 공격을 당했어요.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애도의 시간을 보냈죠. 즐거운 시간도 많았어요. 하지만 정치인은 그 가족까지 24시간 노출이 되어 있어서, 일을 정말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이에요. 그 점에서 저는 모든 정치인을 존경합니다.”

-4년 동안 장관으로서 어떤 정책을 펼쳐나갔나요?

“디지털 장관을 할 때는 넓은 범위의 프렌치 테크 활성화를 위해서 일했어요. 휴대 전화 4G, 디지털 파이낸싱, 세금 제재 완화 등을 직접 결정했습니다. 미·중의 테크 패권을 앞설 수는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스타트업 연합군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문화부 장관은 전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혁신 정책을 펼치기엔 기간이 짧았습니다. 페스티벌이나 미술관, 베르사이유궁 보조금 등 매년 들어갈 굵직한 예산은 등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저는 서민들의 문화 접근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죠. 문화 민주주의에 힘을 쏟았어요.”

-당신이 겪은 계급 충돌, 가면 증후군, 계층 이탈자 같은 감정에 대해 얘기해주겠어요? 당신은 피와 피부색과 계층이라는 너무 많은 허들을 뛰어넘었습니다.

“사실은 피부색보다 계층의 차이가 더 충격적이었어요. 특정 사회문화로 이동하면서 저는 가족과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와 비슷한 가난한 집 출신의 프랑스인들도, 사회문화적 계급이 올라가면서 집안을 배신한다는 감정이 듭니다. 부모님은 저의 성공을 응원하고 자랑스러워하지만, 점점 저는 그분들과 제가 좋아하는 책, 오페라, 클래식 등 지적인 고급문화를 공유할 수 없어지죠. 관계가 한정되는 슬픔이랄까요.”

"아이로서의 욕심, 성공의 야망, 하고 싶은 것의 추구? 제 삶에 명확한 패턴은 없었어요. 오로지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었죠.”/사진=장련성 기자

-자유, 평등, 박애를 정치적 유산으로 갖고 있는 똘레랑스의 나라지만, 프랑스 사회는 어쩌면 더 계급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떻습니까?

“맞아요.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그랑제콜은 한국의 수능 시험 경쟁보다 치열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어떤 계열을 선택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시험을 준비하는지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학생은 최적의 선택을 하기 힘들죠. 출신 계층에 따라 출발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한국의 서울대,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특권 계층 출신들이 많은 것과 유사합니다. 그랑제콜 학생들도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들이죠. 그렇지 않은 환경 출신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수적인 벽을 넘기 어려워요.”

-계층 이동에 대한 어려움은 한국의 젊은이들도 겪고 있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에 세습 중산층 사회가 심화된다고요. 해법이 있을까요?

“프랑스에서도 실버 스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도심 외곽이나 빈곤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백인 프랑스인들과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없어요. 그 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지만, 한방의 해결책은 없어요. 학교 시스템, 사회보조금, 이민 정책 등등… 동등한 실력에 동등한 기회를 줄 방법이 없을까? 영국, 프랑스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21세기 클럽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빈곤층 출신의 뛰어난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해왔어요. 차별이 일어나는 위기의 순간을 감지하고, 유리 천장을 깰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합니다.”

-당신 인생에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었나요?

“계급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제 성격이 형성됐어요. 제 내면은 다양한 허들의 칵테일입니다. 부정적으로 몰아가면 경계성인격장애 상태가 됐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런 복잡성을 저의 장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나라 간의 이동, 인종 간의 이동, 계층 간의 이동…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몰랐을 일들이지요.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경험은 짐이 되기도 복이 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제가 어두운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부모님이 빈틈없는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셨어요.”

민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네이버와의 관계에 대해 프랑스 공직자 윤리위원회가 제기한 소송도 무혐의로 결론났다./사진=장련성 기자

-혹 ‘부유한 가정에 입양되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강하게 손짓하며)아니오. 다른 상상은 해본 적이 있어요. 사랑이 없는 나쁜 부모를 만났으면 어찌 되었을까? 공항에 입양아를 픽업하러 와서 맘에 안 든다고 돌려보내는 사람도 있어요. 가정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란 입양인도 있고요. 슬픈 일이 많습니다.

저는 수줍은 아이였는데, 부모님은 제게 무한신뢰를 보여주셨어요. 부모의 사랑과 신뢰는 부와 무관합니다. 만약 부유한 부모가 제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면? 저는 허들을 넘어서는 힘을 키우지 못했을 겁니다. 저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저는 부모님의 희망을 투사했어요. 나보다 나를 더 흔들림 없이 믿어주는 존재를요.”

-장관 펠르랭에서 벤처 캐피탈 대표로의 펠르랭, 그 변화는 만족스러운가요?

“장관일 때는 정책 로드맵과 재원이 매우 어렵고 복잡했어요. 아시아인 외모의 젊은 여성으로서, 저는 좀 더 새롭고 현대적이면서 정직한 정치 스타일을 구현했습니다. 때때로 정책 그 자체보다 동료의 모함이나 가십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요.

민간으로 돌아와서는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벤처 캐피탈을 설립한 이후 새로운 생태계와 새로운 만남에 눈을 떴어요. 디지털 장관으로 일할 때와 분야는 비슷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따라 신나게 일하고 있어요. 앞으로 유럽과 프랑스 회사가 한국에 잘 투자하도록, 그리고 한국의 기업이 유럽에 잘 안착하도록 돕고 싶어요.”

이제야 제대로 한국과 프랑스의 가교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가교가 당신 인생의 결정적 키워드로군요!

“맞습니다. 장관 시절에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함께했지요.”

펠르랭의 설득으로 영화 '덩케르크'는 벨기에가 아닌 프랑스 현지에서 촬영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연결자의 운명을 느낀 사례가 있나요?

“문화부 장관 시절의 일인데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부부를 만난 적이 있어요. 원래 영화 ‘덩케르크’는 벨기에에서 촬영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저의 설득으로 프랑스 덩케르크 지역에서 촬영했답니다. 프랑스에서 촬영할 경우 세금 혜택을 주는 법안을 제가 통과시켰거든요.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중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항구도시예요. 영화 촬영 덕분에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주민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프랑스에 와서 세금 혜택을 받으며 촬영하면 좋겠습니다(웃음).”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이 당신에겐 축복이군요!

“아마도.”

그는 ‘프라버블리, 메이비’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어떤 사실도 확정해서 가두기보다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고 섬세하게 접속해가는 모습은 내가 만난 여성 리더들의 특징이다.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 어느 쪽을 더 좋아하지요?

“그 둘을 잇는 여정을 좋아합니다. 영화 ‘괴물’을 보면 양궁선수로 나오는 배두나가 시합에 나가면 항상 2등을 해요. 실망해도 또 과녁 앞에서 활을 당기고 조준을 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 결정적 순간에 명중을 시키죠.

성공은 실력과 운의 칵테일이에요. 언제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모르죠. 그래서 저는 잘 될 때나 안될 때나 그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친구가 있으면 즐길 수 있어요. 제 친구들은 믿지 않겠지만 저는 사실 야심가가 아니랍니다. 살면서 명확한 목표조차 없었어요.”

영화 '괴물'에서 배두나가 활 시위를 당기는 장면. 펠르랭은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열정적인 팬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군요?

“네. 어린아이였을 때나 청소년기에는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를 썼어요. 그분들이 행복하길 바랐죠. 비즈니스 스쿨을 다녔고 정치학을 공부했고 정부 일을 했어요. 공공 부문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디서 무엇을 할지는 전혀 몰랐어요.

돌아보면 저 스스로가 인생의 핸들을 잡고 운전한 적은 없어요. 배를 타고 흘러온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그랬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목표가 명확해졌어요. 회사를 성장시키고 싶은 야심, 한국과 프랑스의 다리가 되고 싶다는 실질적인 목표가 생겼죠.”

메인 스트림의 금수저들은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디폴트지만, 차별의 밑바닥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격과 정당성’을 의심하고 증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런 검증의 시간을 통해 더 큰 세계를 포용하는 시야가 생긴다.

‘내 수치심은 사라졌고 우리의 운명은 얇은 트레이싱 페이퍼 여러 겹을 포개 그린 조화로운 그림처럼 겹쳐 있다.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선이 만나 한국과 나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것, 유전자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멀어짐과 망각, 무관심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만나는 선택을 했다.”-플뢰르 펠르랭의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 중에서

-’내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나를 생각한다’는 깨달음은 더 깊어졌나요?

“네. 과거가 나를 생각한 덕분에 제겐 가족처럼 소중한 한국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게 제 인생의 럭셔리지요.”

사회적 신분 상승으로 통합과 관용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 플뢰르 펠르랭./사진=장련성 기자

-당신이 버려졌던 그곳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317번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까?

“그 주소를 네이버에 맵에 검색했더니, 존재하지 않는 주소로 나왔어요. 얼마 전 성지순례 하듯 들뜬 마음으로 그 주변을 방문했죠. 핫플레이스로 둘러싸인 세련된 동네에서 친구와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어요. 특별한 기분은 들지 않았어요. 그 주소는 현실에도 제 내면에도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2016년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코렐리아와 네이버 덕분에 많은 시간을 고향에서 보냈다. 40번 정도 한국을 방문하는 사이, 고향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비무장지대, 설악산, 제주도 해안 길을 걷고 서예를 배우고 한복을 입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지인이 생기고 술잔과 우정을 나누고, 삶의 의미에 대해 대화하고, 노래방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후회하지 않아’를 불렀다.

“거만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제 인생에는 한국의 성장 서사가 겹쳐집니다. 제가 입양 보내진 70년대,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한국은 고난의 시절을 보냈어요. 지금은 경제발전과 함께 놀라운 문화 콘텐츠로 전 세계에 영감을 주고 있죠. 제 운명은 한국의 운명과 비슷해요. 한국을 의인화하면 제 모습이 될 것만 같습니다(웃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과거를 통합하는 당신의 방식은 너무나 정직하고 우아하기까지 합니다. 유전자와 운명, 문화적 재결합까지. 현명함은 어떻게 무르익습니까?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을 생각해보면 현명함은 분석적인 두뇌보다는 사회적 지성이 아닐까 합니다. 정보를 수용하고 분석하는 능력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의 고충과 불편을 감지해서 반응하는 한국인의 ‘눈치’, 배려가 최고의 현명함이겠지요.”

그는 CJ 이미경 부회장,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 한석주 네이버 프랑스 대표, 김상헌 전 대표 등 수많은 인사와 교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현명해지고 있나요?

“하하. 저는 콤플렉스 덩어리였어요. 외모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제가 성취한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가면 증후군에 시달렸죠. 하하. 그래도 장점은 알고 있어요. 자기 객관화와 유머입니다. 나에게 비판적 거리를 두고,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활짝 웃을 때의 제가 맘에 듭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을 때 같이 웃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힘든 시련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회복력은 우리를 복합적이고 정교한 사람으로 만듭니다.”/사진=장련성 기자

-생부 생모에 대해서는 변화된 생각이 있으신지요?

“(단호하게)없습니다.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제 아이들도 알아요. 부모는 핏줄의 DNA보다 가치관, 신뢰, 지속적인 지지와 교육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걸. 뿌리를 찾는 사람도 존중하지만 저는 지금 제 선택이 좋습니다.”

플뢰르 펠르랭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질감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인터뷰하는 작은 북카페는 조도가 낮아, 테이블 너머로 그의 흰 얼굴이 어둠 속에 도드라졌다. 검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서는 웃음이 햇빛처럼 부서져 내렸다.

나는 그가 발견된 망원동의 거리의 쓰레기통과 비행기의 아기 바구니, 공항, 그가 공부하던 그랑제콜과 엘리제궁 등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근본적으로 그는 한 번도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가교의 운명을 지닌 채 도착한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플뢰르 펠르랭 혹은 김종숙의 인생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회복력 최강자인 당신의 조언을 부탁합니다.

“(가만히 허공을 주시하다가)사회적 배경을 기준으로 자기 인생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한 비법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을 믿어주는 사람이 주위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 인연의 끈을 붙잡고 성취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합니다. 기성 사회가 주입한 신념에 순종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삶 그 자체에 뛰어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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