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장벽 뛰어 넘은 배리어프리 콘텐츠
2년 전, 영화 ‘기생충’을 통해 한국 최초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막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이 말은 편견에 사로잡힌 전 세계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문화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말에도 적용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노인이든 누구나 문화를 향유할 자유가 있고, 기회는 주어져야 마땅하니 말이다.
한 자동차 극장, 영화를 보는 부녀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위해 아빠는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간다.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어떤지, 생김새는 어떤지, 표정이나 분위기 등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이 이어간다. 아이의 머릿속엔 어느덧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앞서 이야기한 줄거리는 KOBAFF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공식 채널에 올라온 영화 ‘반짝반짝 두근두근’의 배리어프리 버전이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란 ‘고령자나 장애인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인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출처: 우리말샘, 네이버국어사전)을 일컫는 말이다. 평소 TV를 시청할 때, 뉴스 화면에서 앵커, 아나운서, 기자의 말을 수어로 옮기는 수화통역사들, 또 화면 상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방송’이라는 자막, 스마트폰 속 문자를 음성으로 인식해주는 서비스 역시 우리가 쉽게 말하는 배리어프리 서비스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배리어프리란 용어가 건축학계에서 처음 사용된 만큼 보다 넓게는 주택이나 도로 등의 물리적 장벽을 포함,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의 매체로 얻는 문화 정보, 법률적 제도, 실생활 등에서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출처: 시사상식사전). 그중에서도 최근 문화 콘텐츠 업계에서 앞다투어 관련 제도 및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비장애인, 장애인, 노인 인구 등 ‘모든 사람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만큼 ‘배리어프리 콘텐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배리어프리 콘텐츠, ‘함께 즐기는 것’에서 시작하다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법에 의거해, 방송사업자는 장애인의 시청을 도울 수 있도록 한국수어, 폐쇄자막, 화면해설 등을 이용한 방송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서비스를 최초로 제공한 것은 2001년 MBC ‘전원일기’와 KBS ‘일요스페셜’이 시작이다. 현재 지상파와 케이블 등에서는 뉴스, 드라마, 교양 및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 등에 오디오 화면 해설과 자막을 제공하고 있는 중이다. 작년은 화면해설 서비스를 시작한 지 약 20년이 넘은 해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는 화면해설 방송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다. 또 자막이나 수화 역시 필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만, 해당 서비스가 필요한 이용자들에게 얼마만큼 제공되고 있는지(방송 편성 시간, 횟수 등) 무관심한 경우도 많다.
OTT 업계에서는 최근 1~2년 새 배리어프리 서비스, 콘텐츠 강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 추세다. 다음 문장을 보자. 지난해 1월 기사 제목이다. ‘콘텐츠 서비스 대세 OTT, 시청각 장애인에겐 ‘그림의 떡’’(2021.1.10 연합뉴스). 반면, 이어진 8월엔 다음 기사가 실렸다. ‘비장애인도 원하는 배리어프리 서비스’(2021.8.17 조선일보). 해당 기사는 OTT 내 배리어프리 자막 서비스가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이용, 편리성이 높아졌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일부 콘텐츠에서 배경음에 묻히는 대사들을 폐쇄자막 속 배경음에 대한 설명을 통해 확인시킨다는 것이다. 폐쇄자막(CC)은 대표적인 배리어프리 서비스다. 한글자막을 비롯해 화자 및 대사, 소리정보를 함께 넣어 청각장애인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 장애가 없는 자막을 말한다. 넷플릭스의 경우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일찌감치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폐쇄자막, 음성해설 등을 지원하고 있고, 이를 적극 홍보 중이다.
국내 OTT 브랜드 역시 최근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티빙은 자체 오리지널 시리즈와 드라마, 예능 VOD, 최신 영화, 해외 시리즈 같은 인기 채널 콘텐츠에 배리어프리 자막 서비스를 적용 중이다. 자막이 적용된 콘텐츠는 ‘유미의 세포들 시즌1,2’, ‘돼지의 왕’, ‘괴이’ 등 총 84개 작품으로 에피소드 기준으로는 약 1200편 정도이다. 해당 자막은 화면 해설을 추가로 제공하고, 인물의 대사 외에도 화자 정보, 음악 및 소리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웨이브(Wavve)의 경우 국내 콘텐츠 자막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자막이 삽입된 콘텐츠를 늘리고, 이를 통해 배리어프리 정책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현재 웨이브에서 제공 중인 한국어 자막 서비스 규모는 배리어프리 자막을 포함 약 9만 편 규모로 전해진다.
기술의 발전은 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줄이고, 사회참여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보접근에 대한 발전은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정보 격차가 심화되는 것은 아쉬운 점으로 꼽히고 있다.
눈 감아도 보여요, 배리어프리영화제
안방극장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계에서 사회적 약자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 특별 상영관 등이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들의 독립적인 미디어 콘텐츠 시청은 어려운 현실이고, 나아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동시에, 함께 콘텐츠를 즐기는 것조차 여건이 열악하다. 그런 이들을 위해 제작된 콘텐츠가 바로 ‘배리어프리영화’이다. 이는 화면해설, 한글자막을 넣어 장애와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말한다. 다문화 가정, 노인 및 어린이 등 모든 계층도 포함된다. 국내외에서는 이 같은 배리어프리 버전 영화 제작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배리어프리영화의 인지도가 높지 않을뿐더러, 제작자 입장에서도 비용, 저작권 등의 문제로 배리어프리영화를 추가 제작하기란 쉽지 않은 사정이다.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2년 사회적기업 (사)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Korean Barrier Free Films Committee)가 설립되었다. 배리어프리영화의 제작, 상영, 배급, 교육을 통해 장애와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영화문화를 향유하여, 대중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벌새’, ‘남매의 여름밤’, ‘감쪽 같은 그녀’, ‘김복동’, 애니메이션 ‘드림빌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메밀꽃 필 무렵’등이, 외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타인의 친절’, ‘파리로 가는 길’, ‘일 포스티노’ 등을 비롯해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오즈의 마법사’ 등 고전영화도 배리어프리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해마다 11월에 열리는 ‘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의 경우 배리어프리영화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한 영화제다. 올해 열리는 ‘제12회 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의 경우 11월9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개막, 13일까지 진행되며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충무아트센터 소극장블루에서도 상영이 이어진다. 이번 영화제 내 상영작으로는 7개 섹션 26편의 장·단편 배리어프리영화가 상영된다. ‘코다’, ‘오마주’, ‘그레타 툰베리’, ‘별의 정원’ 등 최신 배리어프리영화와 배리어프리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배리어프리단편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선보인다. 모든 영화와 부대행사는 무료로 진행된다.
배리어프리 자막은 일부 사용자에겐 불필요하게 느껴지거나 다소 귀찮은 요소로 느껴질 수 있다. 혹시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리어프리 콘텐츠가 무엇인지 몰랐거나, 또는 수화나 자막이 영화 몰입에 불편함을 끼쳤다고 생각해본 적 있다면, 폐쇄 자막, 화면해설 방송을 통해 콘텐츠를 보길 권해본다. 영상을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내가 가진 상상력이 그 여백을 채워나가고, 이는 곧 콘텐츠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누군가와 함께 이를 즐기고 감정을 공유한다면 그 즐거움은 두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화면해설 작가들의 삶을 다룬 도서 『눈에 선하게』
화면해설이란 ‘시력이 약하거나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서비스’를 일컫는다. 도서 『눈에 선하게』는 다섯 명의 베테랑 화면해설 작가가 쓴 고군분투기다. 시각의 한계를 언어화된 소리로 극복하는 그들의 업은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탁월함, 예술성을 요구한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대사 사이, 혹은 내레이션과 내레이션 사이 10여 초의 짧은 시간. 그 사이에 영상 속 등장하는 공간, 시간,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 그들의 동작, 표정 등 많은 정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해 정확히 해설해야 한다. ‘눈을 감고 들었을 때 빗소리와 전을 부칠 때 나는 기름 끓는 소리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고소한 기름 냄새나 비가 내릴 때의 축축한 느낌과 같은 단서조차 없다면 두 소리의 차이를 구분하긴 더 힘들 수도 있다.’(p.32), ‘보는 대신 듣는 것이기에 들어서 보는 것 같은 감동,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 이 상황에 가장 적정한 표현이 무엇일지, 지금 저 배우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정확히 뭐라 부르는지, 저 춤은 뭐라 부르는지,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잠깐 스쳐 지나는 것 하나라도 더 전달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p.44) 오늘도 그들은 ‘소리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화면 속 배우의 몸짓과 눈빛에 집중하고, 예능이나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집착하고, 같은 장면을 수십 번씩 반복해 돌려보며 자칫 놓친 정보나 비문은 없는지를 검토한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4호 (22.11.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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