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찾아 몰려든 이민자들이었지만 … 다양성 · 자유 · 관용이 넘쳐났다

2022. 11.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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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엔 거대한 고층 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동시에 다채로운 빅토리아풍 건축물이 줄지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금문교(골든게이트브리지). 게티이미지뱅크

■ 지식카페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20) ‘골드러시 상징’ 샌프란시스코

1848년부터 유럽 · 중국인 대거 이주 ‘캘리포니아 드림’ 전진기지 … 은행 · 철도 등 들어서며 40년만에 ‘상전벽해’

1906년 대지진으로 ‘잿더미’ 됐다 재건, 랜드마크 금문교 건설 … 히피 문화 · 실리콘밸리 혁신 꽃피워

“어떤 사람은 계급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영웅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신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돈을 숭배한다.”

풍자소설 ‘도금시대’에서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1873년에서 시작해서 1893년까지 미국은 ‘골드러시’라는 이름으로 서부 개척이 활발해지는 동시에 급격한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농민적 청교도의 세상에서 자본주의 기업가의 나라로 변신,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발전의 열매는 소수에게는 달콤했으나 다수에게는 쓰디썼다.

탐욕스러운 부동산 회사들은 빚에 허덕이는 농민들한테서 닥치는 대로 땅을 몰수했고, 무자비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러운 공장에 몰아넣어서 개돼지처럼 부렸다. 샌프란시스코의 광적인 토지 투기에 놀란 사회사상가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을 통해 빈부 격차의 원인이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후대의 부동산 정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람이 처음 거주한 것은 약 5000년 전이다. 미국 원주민들이 작은 촌락을 이루어 살아가던 이 땅에 유럽인이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769년 스페인 탐험대부터다. 1776년 스페인 정복자는 이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할 때 넘겨줬다. 183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인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날 무렵, 인구 1000명이 거주하는 황무지는 미국 영토로 편입됐고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얻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해 만에 인구가 2만5000명으로 불어났고, 그다음 해에는 10만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항구에 내린 후, 배를 버리고 선장과 선원까지 모조리 황금을 찾아서 황야로 떠났다. 배들은 방치돼 썩어 가다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1859년 은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밀집했다. 트웨인은 말했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이 도시는 장차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될 것이다.”

예언대로였다. 바다 건너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직접 건너오고, 중국에서 모집한 노동자들이 밀려와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다국어 도시로 변해 갔다. 이민자 중에는 청바지의 발명자인 리바이 스트라우스와 초콜릿 제조업자인 도밍고 기라델리도 있었다.

‘운명의 딸’에서 이사벨 아옌데는 엘리사의 삶을 통해서 여성 이민자의 삶을 조명한다. ‘영혼의 집’에 나오는 클라라의 딸인 그녀는 골드러시에 홀려 캘리포니아로 떠난 애인 호아킨을 찾아 밀항을 감행한다. 중국인 의사 타오치엔의 도움을 받아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녀는 남자에 얽매인 수동적 운명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회복한다. “난 남자가 벌어다 준 돈으로는 절대 살지 않을 거야.”

넘치는 황금을 노려 은행이 문을 열고, 항구와 철도가 들어서면서 도시 꼴이 갖추어졌다. 1870년엔 세계 최대급 도시공원인 골든게이트가 계획됐다. 1873년 해안가 항구와 내륙의 언덕을 잇는 트램이 세계 최초로 설치돼 사람을 실어날랐고, 태평양 연안을 방어하고 호령하는 미국의 핵심 군사 기지가 들어섰다. 이 모든 일이 4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그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골드러시를 미국의 타락으로 보고 도덕적으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운 좋은 사람이 운 없는 사람들을 마구 부리는 수단을 얻는다니! 그게 사업이라니! 나는 직업의 부도덕성이 골드러시보다 더 놀랍게 발달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금 캐는 사람은 정직한 노동자의 적이다. 금을 캐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마도 열심히 일한다.”

1906년 물질에 홀린 마음에 대한 징벌처럼 재앙이 닥쳐왔다.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치면서 엄청난 화재를 일으켜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레베카 솔닛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이 놀랍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골든게이트에 모여서 텐트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고 밤마다 모여서 서로를 위로했다. 재난이 우애와 사랑, 협력과 연대를 낳는다. 화재 후 도시는 빠르게 재건됐고,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37년 도시의 상징인 금문교도 건설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절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 드림, 즉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낙원이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의 전진기지였다. 한적한 바닷가 황무지에서 순식간에 황금이 넘쳐나는 대도시로 변신한 샌프란시스코는 다양성이 넘치고 배타성은 적었다. 모두 황금에만 정신이 팔려 나머지엔 무신경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관용과 자유, 도전과 낭만, 공생과 평화가 이 도시의 정신적 기풍을 이루었다. 이 도시에서는 늘 다양성이 공존하고 차이가 존중받았다.

뉴욕의 타락과 허영에 염증을 느낀 펄떡이는 영혼들이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에 와서 가식을 벗어던지고 표현의 자유를 만끽했다. 비트 문학이 시작되고, 히피 문화가 꽃피우고, 성 소수자들의 아지트가 생겨나고, 사이키델릭 음악이 탄생했다. 또 앨커트래즈섬을 점거함으로써 현대 미국 원주민의 저항이 일어선 곳이기도 하다. 1950년대 이후, 샌프란시스코는 억압에 저항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반체제 문화운동의 성지이자 전위가 되었다. 최근에는 쓰레기 제로 운동이 이 도시에서 일어섰다.

스콧 매켄지는 통기타 음률에 맞추어 노래했다.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머리에 꽃을 꽂는 걸 잊지 마세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무얼 해도 용인됐고, 어떤 자유도 금지되지 않았다. 한 가수의 노랫말처럼, 비둘기 나는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차별 없이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는 일, “그건 정말 멋진 얘기”였다. 실리콘밸리 혁신도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토양을 이루는 저항과 자유, 공유와 개방의 정신을 이어받아 탄생했다. 자유는 언제나 창조의 촉매였다.

1955년 식스 갤러리에서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이 처음으로 공개 낭송됐다.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로 파괴되고 굶주리며 광란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가 음란죄로 기소되면서 비트 운동은 미국 전역에 청춘과 반항, 자유와 저항의 열풍을 일으켰다. 1957년 잭 케루악은 비트 세대의 서사시인 ‘길 위에서’를 발표해 열풍을 이어갔다.

재즈 선율을 연상시키는 즉흥적 문체가 특징인 이 작품에서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청년 딘 모리아티의 열정에 감염돼 네 차례에 걸쳐 무작정 길을 나선다. “우리의 모든 혼란과 헛소리를 뒤로하고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고귀한 행위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즉, 움직이는 것. 우리는 움직였다!”

히치하이크로 북미 전역을 종횡하면서 그들이 만나려 하는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내게는 오직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는, 절대 하품이나 진부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길의 흐름에 따라서 드러나는 다채로운 풍경들, 그 안에서 전개되는 사람들의 삶은 정해진 일상에 결박된 채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가식적 도덕, 물질적 타락과 대비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별문제 되지 않는다. 길은 삶이니까.” 진정한 삶은 밥을 버는 사무실과 나태한 영혼을 달래는 안락의자에 있지 않다. 파라다이스는 길 위에 있다.

자유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인종 차별과 여성 억압에서도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도시에서 자랐던 한국계 여성 작가 차학경은 성폭행을 당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여덟 살 때 성폭행을 당하고 실어증에 걸렸던 흑인 여성 작가 마야 엔젤루는 자전 소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에서 질문한다. “백인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미워하는 거죠?”

인종과 성과 계급이라는 삼중 철망에 갇힌 어린 새인 작가는 해방의 열망을 담아서 노래한다. “새장에 갇힌 새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리로 노래하네. 알 수 없으나, 여전히 열망하는 것에 대해/ 그 노랫가락은 먼 언덕 위에서도 들을 수 있다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노래하니까.” 과연 이 이방인 여성들은 캘리포니아 드림 속에서 자유를 얻었을까. 머리에 꽃을 꽂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백인들만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면서 물어본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강도귀족

이 말은 본래 중세 독일에서 불법으로 높은 통행료를 징수한 영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선 악덕 자본가들을 풍자하는 비유로 쓰였다. ‘강도귀족’은 경쟁자를 짓밟고 시장을 조작하며 정부를 부패시키는 거대 독점 자본을 가리켰다. 1934년 매슈 조지프슨의 ‘강도 귀족들’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비트 세대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잭 케루악이었다. 1944년 루시엔 카가 윌리엄 버로스,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를 서로에게 소개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진정제 맞은 환자’처럼 평온하게 살아가는 기성세대에 맞서서 이들의 소비주의, 군비 경쟁, 검열 등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다. 모여서 함께 재즈를 듣고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작품을 낭송하곤 했다. ‘길 위에서’, ‘벌거벗은 점심’, ‘미국의 송어낚시’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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