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생존 광부 “살아야겠다 버티니 살아지더라... 국민에 희망 됐다면 다행”

안동/권광순 기자 2022. 11. 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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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4일만에 매몰됐던 50대 광부
“커피믹스 18개로 허기 달래… 지하수 계속 마셔 구토하기도
이마 안전등 꺼지던 바로 그날, 암흑 속에서 구조불빛 보여”
“우리의 생환 소식이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었다면 다행이죠”
시력보호 위해 안대 착용 - 지난달 26일 오후 6시쯤 경북 봉화군 한 아연 광산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로 광산 내부에 갇혔다가 지난 4일 오후 11시쯤 구조된 작업 조장 박정하(62·오른쪽)씨와 보조 작업자 박모(56)씨가 지난 5일 경북 안동병원의 병상에 누워 있다. 의료진은 어두운 광산 내부에 장기간 머무른 탓에 갑자기 햇빛을 받게 되면 시력에 손상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안대를 착용하면서 서서히 빛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갱도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9일 만인 지난 4일 작업 조장 박정하(62)씨와 보조 작업자 박모(56)씨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이들 중 보조 작업자 박모(56)씨는 6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에 작업 조장 박정하씨와 함께 출입구 쪽에 쌓인 돌멩이와 토사를 괭이로 3일간 치웠다”고 말했다. 그는 “매몰되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에 대한 공포심과 두려움에 팔다리가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면서도 “살아야겠다고 버티니 살아지더라”고 했다.

221시간 만에 작업조장과 함께 구조된 박씨는 봉화 광산업체 A사에 입사한 지 4일 만에 사고를 당했다. 안동병원에 입원 중인 그는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매몰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중 흐느끼기도 했다. 박씨는 본인의 신원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박씨는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갑자기 ‘우르릉, 쾅쾅’ 하는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니 붕괴되기 시작했다. 출입구가 매몰되는 순간 경험이 없던 터라 이성마저 마비되더라”며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광부 경험이 풍부한 작업 조장 박정하씨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립됐을 때 주로 뭘 먹으면서 버텼느냐’는 질문에 “매몰 당시 사각 플라스틱 통에 담긴 식수 4L와 커피믹스 18개를 소지했다”며 “커피믹스를 하루에 1개씩, 심하게 허기지면 하루 2~3개씩 물에 타서 마셨다”고 말했다. 커피믹스를 ‘식량’ 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박씨는 커피를 끓이는 데 마침 현장에 있던 커피포트를 사용했다고 전했다. 그는 “장작불을 피워 커피포트를 불 위에 올렸더니 플라스틱은 모두 타고 스테인리스 용기만 남았다”며 “이 용기를 이용해 물을 끓여 커피로 허기를 달랬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일한 식량이 된 커피믹스와 마실 물도 고립 3일째 바닥이 났다. 박씨는 “바닥 일부에 고인 물은 더럽고 오염된 것 같아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모아 마시기로 했다”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플라스틱 통에 받아 필요할 때마다 마셨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 물도 계속 마시니 구토를 두 번이나 했다”고 전했다.

탈출하려다 깨진 손톱 - 붕괴 사고가 일어난 경북 봉화군 한 아연 광산에서 221시간 만에 구조된 두 사람 중 작업조장인 박정하(62)씨의 손. 손톱이 깨지거나 손끝 살갗이 찢어져 피가 맺혀 있다. /연합뉴스

박씨는 작업 조장 박정하씨와 함께 고립된 뒤 사흘 동안 갱도 곳곳을 돌아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탈출을 모색했다고 했다. 박씨는 “사고 후 둘이서 갱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큰 암석이 길을 막아 출구를 찾지 못했다”며 “괭이 등으로 눈에 보이는 암석을 10m 정도 파나갔지만 뚫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70도 경사에 올라가서 암석을 치우다가 수차례 미끄러지기도 했다”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화약 20여 개를 이용해 두 번에 나눠 발파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파에도 암석 일부만 떨어져 나가는 정도에 불과해 탈출구를 만들진 못했다. 박씨는 “지상과 소통을 해보려고 고함을 지르고 갱도 내 파이프를 번갈아 가며 30~40분 동안 두드리기도 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어떻게 갱도 내에서 불을 피웠느냐’는 질문에 “지하 갱도에 장기간 있으면 추위에 노출되는 만큼, 주변에 있던 목재를 이용해 불을 피웠다”며 “다행히 연기가 빠지는 통로가 있어 질식 위험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불을 피울 목재는 작업 당시 챙겨 가는 토사 방지용 널빤지 20여 장을 사용했다”며 “갱도에 비치된 비닐을 활용해 텐트를 쳤는데 추위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발파 소리를 듣고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31일부터인가 발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지난 1일부터 더 크게 들렸다”며 “‘아, 살 수 있겠구나. 누군가 우리를 구조하러 오는구나’라는 생각에 희망도 생겼다”고 말했다.

박씨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고도 했다. 그는 “구조되기 이틀 전부터는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며 “공교롭게도 구조되던 지난 4일 이마에 달린 안전등이 ‘깜박깜박’했다. 안전등이 컴컴한 지하를 밝혀줬는데 배터리가 다 소진된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생기더라”고 했다.

박씨는 ‘구조대원이 처음 들어올 때 어땠냐’는 질문에 “암흑 속에서 불빛이 보이더니 구조대원이 ‘이젠 안심해도 된다.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눈물만 주르르 흘렀다”고 말했다. 미혼인 박씨는 고립됐을 당시 부모님 등 가족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고 했다. 박씨는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바닷가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먹고 싶은 음식으로는 “콜라, 미역국과 오리탕부터 쇠고기까지 맛있는 건 뭐든 먹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많은 분의 도움으로 새 삶을 살게 됐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작업 조장 박정하씨 아들 박근형(42)씨는 기자들에게 “아버지가 안(갱도)에 계시는 동안 세상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다”며 “아버지도 처음에 많이 놀라셨지만 ‘나의 생환 소식이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었다면 다행’이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박정하씨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하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박근형씨는 또 “아버지는 ‘이마에 부착한 안전등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오니 그때는 절망감을 느꼈다’고 말했다”며 “하지만 아버지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둘이서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었다’고 하셨다”고도 했다.

박씨는 입사 4일밖에 안 돼 작업 조장 박정하씨와 별다른 친분은 없었지만 체온을 나누며 함께 버텼다. 두 사람은 광부 일을 시작한 이유, 취미 등 살아온 얘기를 하며 누구보다 친해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달 26일 오후 6시쯤 봉화 아연 광산에서 토사 900t이 아래로 쏟아지는 사고로 지하 190m에 고립됐다가 지난 4일 오후 11시 3분쯤 9일 만에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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