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배우들의 낯선 얼굴이 돋보이는 '고속도로 가족'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원만 빌려주시겠어요?"
스마트페이가 일상화된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저런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다. 금액의 단위가 다를 뿐,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다는 비슷비슷한 사연. 성공 타율은 저 말의 발화자에 달려 있지만 대개 "지금 현금이 없어서요"란 말이 돌아오기 일쑤다. '고속도로 가족'의 기우(정일우)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저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 다만 기우의 어린 자녀들이 달려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고속도로 가족'의 기우와 지숙(김슬기), 그리고 그들의 자식인 은이(서이수)와 택(박다온)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다.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끼니를 해결하고, 휴게소 화장실에서 씻으며, 밤에는 휴게소 화단 구석 한 켠에 텐트를 치고 잔다. 그렇다고 우울하지만은 않다.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음악에 맞춰 춤추고, 한 휴게소에서 쫓겨나면 다른 휴게소로 유랑하듯 옮겨간다. 심성 좋은 사람을 만나 2만원을 얻으면 휴게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거나 식당에서 메뉴 하나를 시켜 네 식구가 오손도손 나눠 먹는다. 그러니까, 기우 가족이 영선(라미란)을 만난 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던 셈이다. 화장실에서 물을 마시던 기우의 첫째 딸 은이를 눈여겨봤던 영선은 요청한 2만원을 넘어 자발적으로 5만원권 지폐를 한 장 꺼내 줬고, 이들은 그날 각자 메뉴를 시키며 포식했다. 단, 그 영선을 다른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남편과 함께 중고가구점을 운영하는 영선은 처음부터 기우의 자녀들에게 깊은 시선을 던진 인물이다. 사고로 아들을 잃고 아직도 그 내상을 오롯이 감내하고 있는 영선의 눈에(그리고 관객의 눈에) 두 번째 마주친 기우 가족의 모습은 전형적인 앵벌이 가족이다. 셋째를 임신 중임에도 노숙을 하는 지숙은 물론, 학교도 가지 않고 커다란 화물트럭과 차들이 수시로 오가는 위험천만한 휴게소 주차장에서 숨바꼭질하며 노는 은이와 택이의 모습은 '이것이 학대가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탄식을 낳게 한다. 영선은 경찰에 기우를 신고하고, 그의 감행은 알고 보니 경제사범으로 수배 중이었던 기우의 수감으로 이어지며 의도치 않게 가족을 해체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고속도로 가족'은 가족을 잃은 지숙과 아이들에게 역시 가족을 잃은 영선이 손을 내밀며 메시지를 드러낸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치르는 이상문 감독은 "가족의 의미는 혈연 관계가 아닌 정서적인 유대"라며 "사람과 사람 사이 온기에 대한 영화, 연민에 대한 영화"라고 '고속도로 가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정서적인 유대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이는 대안 가족의 모습은 올해 개봉했던 '브로커'나 '말임씨를 부탁해'에서도 보였고, 10여 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대안 가족 영화의 레전드'로 꼽히는 '가족의 탄생'도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점점 옅어지는 시대에서, 영화가 새로운 가족의 모습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선의 도움이 그저 호의로만 그치지 않고 깊은 내상을 입은 영선과 그의 남편 도환(백현진)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사람의 따스한 마음이 결국 돌고 돌아 순환하며 서로를 보듬어준다는 내용은 그야말로 인류애가 돈독해지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씁쓸함도 거둘 수 없다. 기우네 가족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고, 그들의 모습을 묘사함에 있어 우울함을 최대한 덜어내려 했지만, 기우와 지숙의 서사를 적절한 타이밍에 설득력을 갖춰 삽입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 모양새다. 그렇기에 어떤 관객들은 나처럼 아동 학대(방임)에 해당하는 기우와 지숙에게 분노할지도 모른다. 선택과 집중에 따라 자의로 유랑과 노숙을 선택한 '소공녀'의 미소와는 다른 상황이니까. 기우가 수감되면서 경찰이라는 행정기관에서 은이와 택이의 존재를 인지했음에도 그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영선이라는 개인의 도움에 기대는 모습도 씁쓸한 포인트. 마땅히 작용해야 할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선의 있는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판타지스러운 결말은, 영화를 영화로만 오롯이 즐길 수 없는 책임감 있는 어른의 시선으로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보는 시선에 따라 무수히 많은 질문이 생성되고, 그에 따라 곱씹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영화가 '고속도로 가족'이다.
온전히 칭찬을 쏟을 수 있는 부분은 단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배우들. 물론 작품마다 변화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요 미덕이다. 그러나 배우 본연 이미지와 그간 배우가 쌓아온 이미지에 기대어 안일한 캐스팅을 하는 감독도 많고, 안일한 수락을 하는 배우도 많다. '고속도로 가족'에 등장하는 라미란, 정일우, 김슬기는 대중에게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익숙한 얼굴들은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올해만 세 번째 영화 주연을 맡은 라미란은 익히 잘 알려진 유쾌한 모습을 지우고 온몸으로 슬픔과 선의를 드러내는 영선을 체화한다. 역시 희극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김슬기는 말과 표정을 최대한 지우고 말간 얼굴로 등장해 연기에 대한 그의 진정을 짐작케 한다.
변신으로 따지면 노숙 가정의 가장인 기우를 연기한 정일우가 가장 파격적.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대표되는 밝고 긍정적인 역할을 주로 맡던 정일우는 이 영화에서 작심하고 연기에 대한 갈망을 표출해낸다. 그 갈망과 노력이 눈에 선히 보여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선의 남편 도환을 맡은 백현진과 은이를 연기한 아역 배우 서이수에게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백현진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지숙과 아이들을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작은 역할임에도 눈길을 끌었다. 라미란과의 자연스러운 부부 호흡도 일품. 아홉 살 어린 나이지만 이미 부모의 고됨을 헤아릴 줄 아는 은이의 처연한 눈빛을 표현한 서이수는 앞날을 기대하게 만든다. 15세 관람가, 11월 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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