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스타강사 김미경 "대입시 수학시험 5분만에 끝냈다"

윤근영 2022. 10.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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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강사 김미경(58)은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

-- 강사가 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 왜 직업을 강사로 바꿨나.

-- 20대 후반의 젊은 강사에게 강연 요청이 그렇게 많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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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진 천재적 자질 개발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 주는 게 인생의 목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자기 계발 강사 김미경(58)은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 그래서 계속 발전한다.

연세대 작곡과 졸업 후 피아노학원 원장이었던 그는 기업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해왔으며 이제는 유튜버, 평생교육 온라인 플랫폼인 MKYU 학장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는 학창 시절에 학업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수학 문제는 아예 풀 수가 없었다. 현재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대입 학력고사 수학 시험에서는 답안지에 한 번호로 찍어놓고 그냥 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강연에서 찾아냈다. 이제는 그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그는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언니의 독설', '김미경의 리부트' 등 20여 권의 책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MKYU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미경 [촬영 정한솔]

-- 어릴 때 부모님은 무슨 일을 했나.

▲ 아버지는 돈을 벌고 싶어 하셨다.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8차례나 사업을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하셨다. 쌀장사도 하고, 양옥집을 지어서 파는 사업도 했다. 마지막에는 돼지농장을 운영하셨는데. 이마저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 집의 생계 책임자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충북) 증평 읍내에서 옷 만드는 양장점을 운영했다. 나는 증평 '리리 양장점'의 둘째 딸로 통했다.

-- 어머니가 양장점을 운영했으면 부유한 편 아닌가.

▲ 가난하게 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성복 브랜드가 나오면서 양장점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결국, 어머니는 양장점을 그만두고 인근 친구 등을 대상으로 관광객을 모집해서 관광버스 회사에 연결해주는 일을 하셨다. 설악산, 내장산 등 곳곳으로 향하는 관광객은 맞춤복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옷을 만들어 제공하면서 추가로 수입을 올렸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대단했다.

-- 초중고 시절 성적은 어떠했나.

▲ 반에서 중상 정도 수준이었다. 상위 10∼20%에 해당한다.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해서 줄곧 반장을 했다. 성적이 좋아야 가능한 전교학생회장은 맡지 못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2차 방정식이 나오면서 수학을 포기한 것이다. 고교 3학년 때 치른 대입 학력고사(현재의 수능)에서 수학 시험을 볼 때 모든 문제의 1번 답안을 정답으로 찍었다. 5분 걸렸고 남은 시간은 잤다. 연세대 작곡과에 수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수학 외에 영어, 국어, 역사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 초중고 시절에 주로 무엇을 하면서 지냈나.

▲ 음악을 좋아했다. 증평 감리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내가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학교 때에는 전교생 조회를 하면 내가 연단에 올라가 애국가를 지휘했다. 서울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내려오신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성악을 배워 군 대회, 시 대회 등에도 나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에 들어갔고 기타를 많이 쳤다.

가족과 함께 포즈를 취한 고교시절 김미경(왼쪽에서 두번째) [본인 제공]

--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나.

▲ 양장점이 사양길로 접어든 상황이어서 어머니가 경제적 부담을 느끼셨다. 청주에 있는 사범대에 가서 교사가 되라고 권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은 의견이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방에 들어가서 방문에 못을 박고 단식투쟁을 했다. 차라리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 유학을 허락했다.

-- 대학 생활은 어떠했나.

▲ 연세대 응원단인 '아카라카'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다른 지원생들에 비해 내가 촌스럽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지원자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인데다 얼굴도 예뻤다. 나는 아카라카 대신에 다른 동아리를 찾아 나섰는데. 들어간 곳이 학생운동 서클이었다. 그곳에서 2학년 때까지 활동했다.

--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학생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천재성 5개씩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중 하나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우리 교육은 이 천재성을 무시하고 종합점수로 서열을 매긴다는 데 있다. 일정 수준의 평균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개개인이 꿈을 키울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10년, 20년 몰입하고 매진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게 진정한 교육이다.

-- 요즘 몇 시에 일어나나.

▲ 오전 4시나 5시쯤에 일어나 영어 공부도 하고 명상도 한다. 자는 시간은 오후 11시쯤이다.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매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본인 삶은 성공적인가.

▲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목적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그것을 통해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 독서를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지금도 한 달에 책 4권은 읽는다.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강사 생활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지속해서 자극받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그게 독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뭔가 인생이 안 풀릴 때도 공부에 몰입했다. 책 한 권과 나 자신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 술은 잘 마시나.

▲ 아버지를 닮아서 잘 못 먹는다. 맥주 2잔이면 그 술집에 있는 술을 다 마신 것 같은 얼굴이 된다. 온몸이 가렵고 두드러기도 난다.

2008년 강연중인 김미경 [본인 제공]

-- 강사가 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다. 원생이 200명이나 됐다.

-- 학원장으로서 성공한 것인데, 비결은 무엇인가.

▲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당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학원으로 출근한 다음에 원생 부모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아이가 피아노학원에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을 담았다. 이 편지를 레슨비 청구 봉투에 함께 넣어 보냈다. 그러면 원생 부모님은 그 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 편지를 냉장고 앞면에 붙여놓는 경우가 많다. 이를 옆집 아주머니가 보고는 자기 아이를 나의 피아노학원에 보내게 된다. 나는 학원생들을 정성스럽게 챙겼다. 피아노학원인데도 1년에 한번씩 큰 합창대회를 개최했고 가족들이 참여하는 행사도 열었다.

-- 왜 직업을 강사로 바꿨나.

▲ 내가 업계에서 (피아노학원 운영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 결과, 속리산에서 열린 피아노학원장 워크숍에서 내가 강연을 하게 됐다. 그 이후에 조금씩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연을 해보니 사람 사는 것 같았다. 인정받는 느낌이 좋았고 그 효용감이 하늘을 찔렀다. 강연이 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서히 강연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20대 후반의 젊은 강사에게 강연 요청이 그렇게 많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은데.

▲ 가뭄에 콩 나듯이 몇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더니 1∼2년이 지나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사료가 시간당 2만∼5만 원 정도에 그쳤다. 지금은 강사료가 많이 올라간 상태다. 갑자기 상승한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천천히 올라갔다.

2020년 홀트아동복지회에 기부하는 김미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 스타강사가 되기까지 노력을 많이 했나.

▲ 긴장돼서 잠을 못 자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준비해도 강연 시작 전까지는 긴장하게 된다. 강연 원고를 다 정리해놓고, 외우고, 연습도 한다.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 안에서도 계속 연습한다. 너무 긴장될 때는 강연 시작 직전에 화장실에 들어가 10분간 '잘할 수 있다'는 이미지트레이닝도 한다.

-- 그러면 강연은 순조롭게 진행되나.

▲ 그럼에도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청중이 40대, 50대 여성들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60대, 70대 남성분들이 많은 상황에 직면한다. 멘붕이 온다.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순간적으로 강의의 에피소드를 다 바꿔야 한다. 진이 다 빠지는 일이다.

-- 어릴 때부터 말을 잘했나.

▲ 그렇다. 아버지가 돈은 못 벌었지만 살갑고 여성스러웠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아버지와 학교 이야기를 3시간씩 하곤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도 나와 3시간 동안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남성이 드물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귀명창'이었다. 귀명창은 판소리를 할 줄 몰라도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명창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귀명창이 있어야 판소리 명창이 있다는 말이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미경 [촬영 정한솔]

-- 살다가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나.

▲ 몇 년 전이었다. 당시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나온 지 꽤 오래된 시점인데, 내가 이 트렌드를 놓쳤다. 그 결과, 기업으로부터 강의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완전히 밀려난 것이다. 강사료도 낮아졌다. 더욱 큰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 기업에만 적용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일반인과 4차 산업혁명과의 관계를 재미있게 강연할 수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

-- 강연에서 실패한 사례는 있나.

▲ 3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에 증권회사 고참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적이 있었다. 수강생들은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나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사전에 책을 많이 읽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막상 강연에 들어가니 수강생들 눈빛이 안 좋았다. "저런(한심한) 강사가 왜 왔을까"하는 눈치였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받은 평가점수는 80점 이하였다. 그 기업에서는 다시 강연할 수 없는 점수였다.

-- 강연 행태가 다양하지 않은가.

▲ 잔디밭에 누워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주의가 산만해 강연하기가 힘들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 강연을 잘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 청중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강연은 망친다. 나는 강연장에 가기 전에 참석자들의 대표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미리 파악한다.

-- 강사 생활을 하면서 보람 있는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 나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다.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는데, 내 강의를 듣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다시 도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친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그 트라우마로 자녀들한테 화를 내곤 했다. 그는 어느 순간 모든 희망을 잃고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전화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직접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전문 상담가를 찾아갔다. 그 이후로 그는 다시 밝아졌다.

대학시절 연고전 당시 친구와 포즈 취한 김미경(오른쪽). [본인 제공]

-- 혹시 우울증을 겪은 적도 있나.

▲ 내가 방송에 많이 출연할 때 우울감이 있었다. 당시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나와 관련한 기사가 지속해서 쏟아졌다. 신경이 곤두섰다. 특히 기사 댓글에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이 많이 쓰였다. 당시 나는 땅바닥으로부터 붕 떠서 꼬챙이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범한 성격인데도 불안했고 힘들었다. 유명하다는 것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우울증은 어떻게 극복했나.

▲ 기본으로 돌아갔다. 일을 많이 줄였고 놀러도 다녔다. 공부도 많이 했다. 물리학, 양자역학, 사주명리학 등을 읽었다. 재미가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증이 사라졌다.

--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

▲ 코로나 발생으로 수입이 없었다. 6개월 동안 강연 요청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당시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은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하지만 회사 일이 많아서 모든 요청에 응하지 못한다. 1주일에 1∼2번 정도 강연한다.

-- 소속 직원들은 몇 명인가.

▲ 90명가량 된다. 대부분이 온라인 평생교육 플랫폼인 MKYU 소속이다. 개발자만 해도 스무 명이 넘는다. 강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 매출은 어느 정도인가.

▲ MKYU 매출이 작년에 150억 원이었다. 회원들이 입학할 때 내는 돈이 있고. 유료강의 수강료가 있다. MKYU 회원은 현재 7만8천 명이다. 유튜브 '김미경TV' 구독자는 155만 명 정도인데, 수익모델로서는 어려움이 있다.

-- 김미경의 강의를 들으면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다". "노력하면 된다" 등의 신자유의적 관점이 지배적인데다 사회 모순구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실제로 나의 메시지는 개인을 깨우치는 데 집중돼 있다. 구조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내가 그 분야를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분야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곳에 몸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냥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불만만 이야기하면 안 된다. 구조적인 문제는 그 분야에 있는 사람이 다루면 된다. 나에게는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단법인 그루맘 이사장이다. 미혼 엄마 400명을 6년째 도와주고 있다. MKYU에서도 전국에 있는 도서관에 책을 보내고 있다. 그게 5년 됐다. 홀트아동복지회 지원, 디지털 격차를 겪는 노인들 지원 등을 전국 단위로 하고 있다.

--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은

▲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강연하고 싶다. 그래서 벌써 몇 년째 영어를 배우고 있다. 또 MKYU 대학을 잘 만들어나가고 싶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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