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돋보기](16)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 박두성 기념관

손현규 2022. 10. 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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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교동도 출생…일제강점기 일본어 점자 교육에 저항
제자 8명과 연구회 조직…1926년 한글점자 '훈맹정음' 반포

[※편집자 주 = 인천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서 신문물을 처음 맞이하는 관문 도시 역할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유산만 보더라도 철도·등대·서양식 호텔·공립 도서관·고속도로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연합뉴스 인천취재본부는 이처럼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이 서린 박물관·전시관을 생생하고 다양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모두 30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 기사는 매주 토요일 1편씩 송고됩니다.]

송암 박두성 기념관 내 유품들 [촬영 손현규]

(인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글을 볼 수 있는 건 두 눈이 있기 때문이다. 중증 시각장애인은 글을 볼 순 없지만 만지고 이해할 수는 있다.

송암 박두성(1888∼1963년) 선생이 1926년에 만든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 덕분이다. 그가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 시절(사진 오른쪽) [송암 박두성 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장애인 가르치던 교사…한글점자 6년 연구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에서 태어난 박 선생은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13년 제생원(현 국립 서울맹학교) 맹아부 교사로 부임했다. 제생원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국내에 설립한 장애인 교육기관으로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가르쳤다.

부임 후 일본에서 점자 인쇄기를 들여온 그는 비록 일본어였지만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점자로 장애인들을 교육해야 하는 현실에 저항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탄압 수위를 높이며 조선어 과목을 없애려 했다.

박 선생은 "눈 밝은 사람은 자신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읽고 쓸 수 있지만,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먼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그는 1956년 성서한국 4월호의 '한글 점자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한국인인 이상 한국어를 가르쳐야만 한다'며 '그러자면 한국말 점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고 제생원 교사 시절을 회상했다.

일본어 점자로만 교육해야 하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은 박 선생은 1920년부터 한글점자 연구에 몰두했고 3년 뒤에는 제자 8명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26년 11월 4일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반포했다. 훈맹정음에는 맹인을 위해 만든 글자라는 뜻이 담겼다. 2020년부터 11월 4일은 법정기념일로 지정돼 '점자의 날'로 불린다.

박두성 선생이 만든 훈맹정음 점자 일람표 [송암 박두성 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글과 같은 '훈맹정음' 원리…"배우기 쉬워야"

박 선생이 점자를 연구하며 세운 원칙은 3가지였다. 배우기 쉬워야 하며 점 수가 적어야 하고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박 선생은 생전에 "가르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한 말로 설명해 누구나 알아듣고, 혼자서 기억해 응용할 수 있고, 읽고 쓰고 하는 동안에 비판하는 지식을 얻게 하는 게 (한글점자를 만든) 목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만든 훈맹정음의 기초 원리는 한글과 같다. 초성(자음 첫소리), 중성(모음), 종성(자음 받침)으로 이뤄진다. 세로 3개 점과 가로 2개 점 등 총 6개 점으로 구성되며 이 6개 점을 조합해 총 64개의 한글 점형(형태)을 만든다.

점자는 풀어쓰기 방식으로 나열한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를 점자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점자 일람표에서 'ㄴ', 'ㅏ', 'ㅁ', 'ㅜ'를 찾아 각 자음과 모음에 맞는 4개의 점형을 순서대로 표시하는 식이다.

점자는 점자판(점자기)의 점칸에 송곳처럼 생긴 '점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간다. 그러면 점자판 사이에 끼운 종이에 점필로 누른 자국이 표시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이유는 점자를 읽을 때 점필로 누른 종이를 뒤집은 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음과 자음뿐 아니라 물음표나 말 줄임표 같은 문장부호와 숫자도 점자로 나타낼 수 있다. 더하기나 나누기 등 연산기호와 두 개 점형을 한 번에 표시하는 약자를 의미하는 점자도 있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 시절(사진 가운데) [송암 박두성 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송암 박두성 기념관, 해마다 방문객 1천명 찾아

박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은 인천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다. '송암점자도서관' 건물 3층이 기념관이다. 인천시 시각장애인 복지연합회가 시 보조금을 받아 기념관과 도서관을 함께 위탁 운영한다. 바로 옆 건물에는 시각장애인복지관이 있다.

148㎡(45평) 규모의 기념관에는 박 선생의 손때가 묻은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점자를 원판에 출력하는 기계인 '제판기'와 글쇠 6개를 조작해 원하는 점자를 찍어낼 수 있는 '점자 타자기'는 모두 박 선생이 생전 직접 사용한 물건이다.

훈맹정음을 창제 과정 등을 기록한 '일지'와 훈맹정음 사용법을 정리한 책자인 '한글점자' 등 그가 손수 쓴 기록물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정선이 송암점자도서관 독서문화팀장은 29일 "1년에 1천명가량이 기념관에 견학을 온다"며 "동네 주민이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오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서 방문하는 시각장애인이나 학생도 많다"고 설명했다.

기자도 기념관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생전 처음으로 점자를 배웠다. 플라스틱 점자판에 종이를 넣고 점자 일람표를 보면서 점필로 이름을 꾹꾹 눌러 썼다.

한글점자를 모두 외우고 자유자재로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름만 점자로 써봐도 훈맹정음의 원리를 익힐 수 있었다.

정 팀장은 "후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신 분들은 보통 기초과정 3개월과 중급 과정 3개월 동안 점자를 배운다"며 "다들 원리를 익힌 뒤에도 손끝으로 점자를 읽기까지 더 큰 노력을 한다"고 말했다.

기념관과 도서관 개방 시간은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이며 주말에는 휴관한다. 기념관은 유품 전시뿐 아니라 한글점자 체험과 촉감·저시력 체험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프로그램 참여나 기념관 관람은 모두 무료다.

송암점자도서관·박두성 기념관 건물 전경 [촬영 손현규]

s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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