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딸을 위해 1,000번 산에 오른 아빠

신준범 2022. 10. 2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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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딸과 모친을 잃었던 류재호씨의 산사랑, 그리고 인생 이야기
'아빠의 1,000번째 산행은 꼭 함께 가겠다'고 했던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8월 15일 사천 와룡산 산행을 한 류재호씨

"우리 딸이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같이 버스정류장에 있었는데 5톤 트럭이 덮쳤어요. 우리 딸만 머리를 크게 다친 거예요.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가다가 딸이 죽고,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오다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같은 날 줄 초상이 났어요."

1996년 8월 20일이었다. 날짜도 시간도 심지어 날씨조차 잊지 않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집에서 멀지 않은 산을 찾았는데 "아이가 다쳤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갔더니 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머리를 크게 다친 딸은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숨이 멎었고, 함께 구급차를 타고 가던 아빠 류재호(70)씨는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기절한 것. 내리막 과속으로 인한 운전자 과실인데, 책임 보험도 들지 않은, 완전 무보험 상태였다.

류재호씨는 주말이면 산을 찾았다. 산악회 회장은 물론, 지방 산악연맹 부회장과 대한산악연맹 환경보존 이사까지 맡았을 정도로 등산에 열성이었다. 이렇게 등산에 열심인 아빠를 딸 희정양은 자랑스러워했다.

1989년 내장산을 찾은 류재호씨 가족. 이때가 딸과의 첫 산행이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었죠. 가족 산행으로 내장산을 갔었어요. 그때 딸이 '아빠는 산이 그렇게 좋아?'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산을 1,000번 오르는 게 아빠의 꿈'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이 녀석이 '아빠 1,000번째 산행 때 꼭 나도 같이 갈게'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딸과 1,000번의 산행을 약속했고, 26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지난 8월 15일 경남 사천 와룡산을 아내와 단둘이 올랐다. 그는 "집사람과 조용히 희정이를 기억하고 싶었다"며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 같아…"라고 말끝을 흐렸다.

급변하던 1970~1980년대에 청춘을 살았던 이들 중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가난과 비극을 이겨내고 지금의 미소를 짓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의 산을 넘었을까. 류재호씨의 인생 종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봉제공장 차렸으나 "쫄딱 망해"

그는 1953년 포천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그의 집은 더 가난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왔으나, 생계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봉제 공장장 소개로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공부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릴 적 시작한 봉제업은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성실하고 사람들과 잘 어우러졌던 그는 성인이 되고부터 공장의 관리자를 맡게 되었다. 공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29세에 서울 신길동에 35평 2층 단독주택을 구입했을 정도로 모든 게 잘 풀렸다.

안정된 일상에 금이 간 건, 사업을 시작하면서였다. "와이프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라고 지금도 후회하는 그는 1990년 자신의 봉제공장을 차렸다. 3년 만에 직원이 70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1990년대부터 외주공장의 해외 이전이 이루어졌다. 기업들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중국과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면서 사업이 망한 것. 그의 말을 빌리면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빚도 빚이었지만 마음의 상처도 컸다.

1983년 지리산 노고단산장에서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산악동인지등회 김미숙 총무, 함태식 산장지기, 류재호, 황화성 대장.

"공장이 망해서 밤에 아이 둘을 데리고 무척 친했던 친구집을 찾아갔는데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때도 펑펑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는 가족을 데리고 맨몸으로 도망치듯 천안으로 터전을 옮겼다. 가진 건 빚과 기술뿐이라 당시 큰 봉제공장이 많았던 천안으로 갔다.

그는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 집에서 부업으로 미싱을 돌렸다"고 한다. 성실히 일에 매달려 10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천안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쯤 딸과 모친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사업만 시작하지 않았어도…"하는 탄식과 "망해서 천안으로 내려오지만 않았어도…"하는 말을 조용히 읊조린다.

1톤 트럭으로 전국 철물점 누벼

"월간<山>에서 일하다 퇴직한 박영래 선배와 친형(류재흥)이 친구였어요. 1980년부터 산 좋아하는 형을 따라 북한산 다니며 등산에 맛을 들였어요. 처음 간 지리산은 잊을 수 없어요. 노고단 산장에 묵었는데 함태식 산장지기께서 '산에서 술 먹으면 안 된다. 혼숙하면 안 된다. 환경 지켜야 한다'고 밤새도록 엄한 얼굴로 얘기하셨어요. 그 후에도 5번 정도 더 뵈었는데 지리산과 겹쳐져 그분이 떠올라요."

1980년대부터 매주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산으로 향했다. 사업 실패 후에도 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직접 '천안 에델바이스산악회'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등산을 했다. 외지인이 산악회를 만들어 다닌다며, '산에서 각목으로 이유 없는 매를 맞는 등' 일종의 텃세를 겪기도 했다. 대결 구도로 가기보다는 두루두루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친목 산악회를 안내산악회로 바꿔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는 "10년간 산악회를 운영했다"며 "회비를 받는 안내산악회였지만 합리적인 금액으로 운영했기에 남는 건 없었다"고 한다.

1996년은 혹독했다. 납품하는 트럭의 짐이 쏟아져 머리를 다친 그는 여파로 지금도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성대 종양 수술을 하여 목소리가 잠길 때도 많지만 산행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지리산 2박3일 종주할 때의 류재호 손미자 부부. 새벽 3시 종주를 시작할 때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국립공원 입산시간 제한이 없었다

"전국의 철물점과 농약가게를 트럭으로 돌아요. 아내가 만든 농사용 앞치마, 토시, 마스크 같은 걸 제가 전국을 돌며 팔아요. 시골 철물점 가면 꼭 내 상품이 아니더라도 '낫 없냐? 장갑 없냐?' 묻는 게 다반사예요. 1톤 트럭에 여간한 건 다 싣고 다녀요."

이렇게 아내와 함께 일주일씩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니는데, 이 와중에 야영하고 산행을 한다. 한적한 계곡에 텐트를 치거나, 시골 정자에서 야영을 한다. 트럭으로 거래처를 오가는 중에 영동에서 백화산 올랐다가 내려오고, 영주에서 소백산 당일산행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100대 명산과 정맥 여럿을 완주했다.

트럭으로 전국을 누비는 또 다른 이유는 시골 노인들과의 대화가 재미있다는 것. 그는 "오지마을 노인들이랑 얘기해 보면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산행도 하고 겸사겸사 시골을 다닌다"고 한다.

"등산으로 상처를 이겨냈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지난 8월 15일 사천 와룡산 정상 새섬봉을 오른 류재호씨. 1,000회 산행을 자축하는 글귀를 직접 쓴 종이를 들었다.

"제왕절개로 어렵게 낳은 딸이에요. 둘째를 가졌을 때부터 딸 낳으면 원하는 거 다 해주겠다고 집사람한테 얘기했었어요.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에요. 무보험 대포 차량 기사가 1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사람도 나처럼 어린 딸이 있더라고요. 형 집행 5개월 만에 풀어 주라고 했어요."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보고 싶을 때면 포천 선산에 가서 야영해요. 화장해서 거기 뿌렸거든요. 산에 혼자 가서 야영하면 마음 놓고 울 수도 있고, '류희정'하고 이름을 크게 불러볼 수 있거든요."

딸과 모친을 보내고, 처음에는 등산도 싫었다. 아내는 우울증에 걸려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산도 필요 없다. 내가 죽을 건데 다 필요 없다"며 1969년 창간호부터 모았던 월간<山> 잡지와 등산 장비를 모두 내다버렸다.

​그는 평생 제단 일을 했으며, 아내는 재봉틀을 다뤘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했으나

"자살하려 몇 번이나 마음먹었고 산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했는데…, 죽는 것도 아무나 못하겠더라고요. 막상 무서워서 못 뛰겠더라고요. 살아야지 어떡해요."

원래 등산을 싫어했던 아내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남편과 등산을 시작했다. 류재호씨는 딸을 보내고 나서부터 산악회 단체 산행에 섞이지 못했다. 혼자 산에 가거나 아내와 단둘이, 혹은 친한 지인들 4~5명과 산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행운도 있었다. 우울증의 아내를 위해 미싱을 사주고 유림산업이라는 개인 공장을 시작했는데, 면으로 만든 유림마스크가 히트를 쳤다. 오랫동안 여성 브래지어를 만든 경험을 살려 부직포로 입에 달라붙지 않게 만든 것이 농사용 마스크로 인기를 끌었고, 코로나 초기에 "며칠 밤을 새워 제작했을 정도"로 주문이 줄을 이었다.

산악회를 운영하던 시절과 달리, 조용한 산행을 하면서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아내를 위해 다시 시작한 산행은 그에게도 약이 되었다. 산에서 실컷 걷고, 울고, 웃으며 일상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렇게 딸과 약속했던 1,000회 산행을 지난 8월 15일 지켰다. 그는 새로운 약속을 하늘에 있는 딸과 맺었다. 5년 내에 2,000회 산행을 하겠다는 것.

일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쾌한 웃음을 짓는 류재호씨. 1980년대 지리산 산행을 함께했던 지인들과 맞춰 입은 체크남방, 아내가 재봉틀로 만든 휴대용 파우치를 산행 때 즐겨 사용한다.

칠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그에게 일주일에 2회 이상 산행하는 건강 비결을 물었다.

"건강하게 산에 다니는 게 제겐 최고의 행복이에요. 산에 올라가서 탁 트인 경치 보면 부자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부자들이 산에 가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게 건강의 비결이고, 최고의 행복이에요."

8월 15일 그의 1,000회 산행에 천안 산꾼들이 현수막을 만들어 오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아내와 조용히 단 둘이 올랐다. 사천 와룡산 정상에서 수기로 쓴 종이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아빠는 산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상에 서자,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었다며 "딸이 곁에서 함께 걷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눈물 많은 아빠, 류재호씨의 행복한 2,000회 산행을 응원한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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