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날씨 이겨낸 ‘神의 술’은 말했다… “최고의 작품은 최악의 고통에서 탄생한다”

오빌레·에페르네·파리/이혜운 기자 2022. 10. 22.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돔페리뇽 마스터 뱅상과 함께한 샹파뉴·파리 여행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역 에페르네 지하에 28km 길이로 뚫려 있는 돔페리뇽과 모엣 샹동의 지하 와인 셀러. 연도별로 저장된 샴페인들이 숙성 중이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 동굴. 암호 같이 적힌 프랑스어 표지판을 따라 숨죽이고 걷는다. 28㎞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온도는 섭씨 10~12도로 가을용 바람막이를 입고 있어도 살짝 서늘하다.

그 길의 어느 중간, 와인 병들이 양 옆으로 쌓여 숙성 중이다. 그 옆엔 가늘고 높은 받침대가 설치돼 있고, 위에는 와인잔이 하나씩 놓여 있다. 서른 명의 참가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잔 앞에 섰다. 받침대 밑에 불이 켜지고, 중세 수도사 같은 옷을 입은 두 명이 와인병을 들고 나타났다.

“둥~둥~둥~둥~둥.”

장엄한 음악이 동굴 안을 채우자 두 남자가 앞에서부터 차례로 와인을 따른다. 병 속 와인은 빛을 만나 초록 은하처럼 빛난다. 이 병에서 흘러나온 건 금빛 투명한 액체에 별처럼 반짝이는 기포. 잔을 살짝 돌려 향을 맡으니 초콜릿, 커피, 구운 견과류, 브리오슈(프랑스 빵), 꿀 향이 느껴진다. 한입 머금자 자몽과 오렌지의 맛이 느껴지다, 서서히 무화과에 자리를 내준다. 그 뒤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맛은 감초다. 누군가 “이건 절정이야(Plénitude)!”라고 외쳤다. 이 와인의 이름은 곧 출시될 ‘돔페리뇽 플레니튜드 2(P2) 2004′. 이곳은 돔페리뇽의 거대한 지하 셀러다.

지하 셀러를 안내하는 표지판.
돔페리뇽 직원이 숙성 중인 샴페인에 있는 효모 찌꺼기를 보여주고 있다. /돔페리뇽

◇셀러 마스터와 떠나는 샹파뉴 여행

프랑스 파리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곳. 이곳은 샴페인이 만들어지는 ‘샹파뉴’ 지역이다.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 중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만이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샹파뉴 지역은 크게 오빌레, 에페르네, 랭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돔페리뇽 와이너리가 있는 곳은 오빌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 돔페리뇽의 지하 셀러는 샴페인 모엣 샹동과 함께 사용한다. 여기서 20분 정도만 차를 타고 나가면 모엣 샹동 와이너리가 있는 에페르네도 나온다.

최근 국내에서도 샴페인 인기가 높아지면서 ‘샹파뉴 여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와인도 산지에서 마셔야 제맛이다.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나 전문 여행사 등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이번 파리·샹파뉴 여행에는 돔페리뇽의 최고 책임자인 뱅상 샤프롱(Chaperon·46) 셀러 마스터가 동행했다.

프랑스 북동부 상파뉴 지역 오빌레에 있는 돔페리뇽 와이너리를 바라보고 있는 뱅상 샤프롱. /돔페리뇽

뱅상 샤프롱은 보르도 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와이너리를 운영했고, 그의 집 식탁에는 늘 와인이 놓여 있었다. 그는 “부모님은 와인 관련 일을 하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와인은 내 삶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그는 모엣 샹동에 입사해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에서 경험을 쌓은 후 돔페리뇽으로 왔다. 그리고 마흔세 살에 가장 높은 자리인 셀러 마스터에 올랐다.

그는 와인을 만드는 것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해 포도 농사가 어떠냐에 따라 와인 맛도, 품질도 바뀐다는 것이다. 이날 시음한 ‘돔페리뇽 P2 2004′는 2004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샤프롱은 “이 해는 이상할 정도로 이상적인 날씨였다”고 말했다.

“최근 프랑스 와인 메이커들의 고민은 기후 변화예요. 엄청난 서리와 더위, 가뭄 등 예측할 수 없는 날씨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요. 2003년에는 포도 수확량 중 70%를 버려야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다사다난했던 2003년을 지나니 2004년은 너무 완벽할 정도로 차분한 해가 왔어요.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역경을 끝내고, 평화를 찾아가는 지금과 비슷하지요.”

돔페리뇽 샴페인을 만든 수도사가 살았던 베네딕트 수도원.

◇돔페리뇽 수도사의 고민

돔페리뇽 와이너리를 방문한 이날도 햇살이 완벽할 정도로 따스했다. 지하 셀러를 나오니 드넓은 초록이 물결쳤다. 그 옆에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 한 채가 있었다. 종탑이 구름에 살짝 가리운 이 건물은 베네딕트 오빌레 수도원이다. 수도원을 지나 성당에 들어서니 바닥에 ‘돔 피에르 페리뇽(1639-1715) 베네딕트 수도사’라고 적힌 비석이 보인다. 샴페인을 개발한 돔페리뇽 수도사의 무덤이다.

프랑크 왕국의 전설적인 왕이었던 카롤루스 대제는 훌륭한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수도원을 세우고 그들에게 땅을 하사한다. 수도사들은 그 땅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오빌레 수도원 역시 이 땅에서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보르도 같은 와인 산지보다 높은 고도에 위치해, 날씨가 춥고 토양이 백악질로 좋지 않았다. 포도의 신맛이 너무 강하고 당도가 부족해 저급 와인만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마저도 겨울철 추운 날씨 때문에 와인 발효를 멈췄다가, 봄이 되면 다시 왕성하게 발효하는 과정에서 병이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해결한 것이 오빌레 수도원 와인 책임자였던 돔 페리뇽이다. 그는 기포를 조절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포도를 섞고, 발효 과정에서 터지지 않도록 코르크 등을 통한 현대식 마개 방법을 개발했다. 그 결과 ‘샴페인’이라는 고급 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샤프롱은 “최고의 작품은 늘 최악의 고통에서 탄생하는 법”이라며 “인간은 늘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시도하며, 언제나 그랬듯 결국에는 성공한다”고 말했다.

수도원 앞으로 펼쳐진 포도밭. /이혜운 기자

◇샹동과 바그너

오빌레의 돔페리뇽만으로 부족하다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에페르네의 ‘모엣 샹동 샴페인 하우스’를 가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샴페인 하우스로, 1743년 클로드 모엣이라는 와인 제조·판매 상인이 설립했다.

이 샴페인 하우스 옆에는 작은 궁전 ‘트리아농’이 있다. 베르사유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묵었던 그 성 같은 느낌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의외의 물건이 나온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 악보다. 이는 샹동 가문과 바그너의 우정 때문이다. 샴페인으로 부를 축적한 샹동 백작은 형편이 좋지 않았던 바그너를 이 트리아농으로 초청해 편하게 쉬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했다고 한다. 이 악보는 바그너가 그 보답으로 선물한 것이다. 바그너처럼 가만히만 있어도 영감이 떠오를 만큼 평온한 곳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쉽게 개방하지 않는다. 오빌레나 에페르네에서 점심을 먹어도 괜찮지만, 식당이 많지는 않다. 이럴 땐 그냥 파리로 돌아와 식사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파리 장식박물관 내 인기 식당으로 떠오른 룰루 레스토랑. /룰루레스토랑

◇파리장식박물관과 룰루 레스토랑

파리에선 ‘룰루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이곳의 위치는 굉장히 특이하다. 일단 모두가 아는 루브르 궁전으로 가자. 여기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투명 피라미드가 있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하겠지만, 우리가 갈 곳은 그 옆 ‘파리장식박물관’이다. 파리에서 작지만 아름다운 ‘카루젤 개선문’이 있고,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튀를리 정원’을 공유하는 곳이다.

높은 층고 아래 건축, 장식에 관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밥을 먹는 것. 도도한 파리지앵처럼 매표소를 지나, 바로 튀를리 정원으로 간다. 그곳에는 지중해 해변처럼 하얀 차양을 친 ‘룰루 레스토랑’이 있다. 현재 파리에서 가장 트렌디한 레스토랑 중 하나로, 최근 결혼한 미국 할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페즈와 벤 에플렉이 신혼여행을 왔다가 파파라치 사진이 찍힌 곳으로도 유명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익숙한 얼굴의 모델, 배우, 가수 등이 보인다. 정원에서는 루브르박물관도, 에펠탑도 보이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레스토랑을 만든 건 사업가 질과 클레어 말라포스 남매다. ‘룰루’라는 이름은 이브 생 로랑의 뮤즈였던 룰루 드 라 팔레즈에서 따왔다고 한다. 꽃무늬 두건과 보석으로 꾸민 당대 최고의 패셔니스타. 이곳에서 밥을 먹다 보면 왠지 옆자리에 룰루가 앉아 있을 것만 같다.

파리 센강변에 지난해 문을 연 슈발블랑 호텔의 옥상. 에펠탑을 배경으로 발레리나가 춤을 추고 있다. /이혜운 기자

◇86세 부자가 만든 피노 컬렉션

파리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지만, 여기에도 ‘신상’이 있다. 룰루 레스토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피노 컬렉션’이다. 옛 상업거래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문을 연 ‘피노 컬렉션’은 이름 그대로 구찌·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의 창업주 프랑수아 피노(86)가 문을 연 곳이다. 최근 방탄소년단 리더 RM도 다녀와 인증 사진을 올렸다.

피노 회장이 얼마나 많은 수의 작품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대신 자신의 취향에 대해 “한번에 끌리는 작품보다는 두고두고 메시지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에 투자한다는 신조를 고수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작품, 시장에서 외면을 받는 작품을 좋아한다. 이런 개성 강한 취향이, 파리의 젊은이들을 피노 컬렉션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150년 역사를 가진 파리의 사마리텐 백화점. 최근 1조원을 들여 리모델링 했다. /돔페리뇽

◇현대 상업의 대성당 ‘사마르’

피노 회장은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라이벌로 불렸다. 지난해 피노 회장이 파리 한복판에 박물관을 열 때, 아르노 회장은 ‘사마리텐 백화점’을 재개관했다. 그냥 백화점이 아니다. 150년 역사의 건축물로, 살 것이 없더라도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파리지앵들은 이 백화점을 ‘사마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1870년 행상이었던 에르네스트 코냑이 펌프장 자리에 가게를 연 후, 성경에 나오는 펌프장 이름을 붙였다. 이후 코냑은 프랑스 최초 백화점인 봉 마르셰 직원 마리 루이 제이와 결혼하면서, 소매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슬로건은 “사마리텐에는 모든 것이 있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사마리텐을 가리켜 “현대 상업의 대성당”이라고 말했다.

메인 건물 천장 아래 공작과 정원이 그려진 노란색 프레스코화는 이 건물을 예술품으로 완성시켜주는 마지막 한 점이다. 아르노 회장은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 벽화를 과거의 색상과 화려함으로 완벽하게 복구했다. 그리고 새롭게 거대한 파도가 치는 듯한 유리 외관을 설치했다. 일본 건축회사 ‘사나’의 작품으로, 19세기 아르누보 양식과 21세기 미니멀리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슈발블랑 파리 호텔 1층에 있는 플레니튜드 레스토랑을 책임지고 있는 아르노드 돈켈레 셰프. /돔페리뇽

◇미슐랭 3스타 돈켈레

사마리텐 백화점에서 센 강쪽으로 이동하면, 지난해 문을 연 슈발블랑 호텔이 나온다. 이 호텔 1층에는 문을 열자마자 첫 해에 미슐랭 3스타를 받아 유럽 전역의 외식업계를 놀라게 한 레스토랑 ‘플레니튜드’가 1층에 있다.

이곳은 ‘소스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아르노드 돈켈레(Donckele·45)가 주방을 맡고 있다. 그는 별명답게 “음식을 먹기 전 소스부터 먹고, 다른 건 남겨도 소스는 남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생굴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 같은 하얀 소스, 잘 구워진 농어와 브로콜리 위에 올라간 주황색 진한 소스 등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소스들의 향연이었다. 그는 “소스를 비롯해 메뉴 개발에만 3년 정도 걸린다”며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 같은 마음으로 요리를 한다”고 말했다.

곧 출시될 돔페리뇽 P2 2004(오른쪽)와 잘 어울리는 돈켈레의 굴 요리. /돔페리뇽

돈켈레가 직원들과 메뉴를 개발하는 방에는 벽면에 그가 직접 그린 메뉴들이 붙어있다. 이곳 손님이면 누구나 들어가볼 수 있다. 메뉴는 7가지 코스로 나오고, 가격은 340~415유로(약 47만~58만원) 선. 메뉴는 자주 바뀌지만, 대표 메뉴는 넙치와 제철 해산물, 헤이즐넛, 캐비어 등을 넣어 떠먹는 수프처럼 만든 ‘바다에 대한 찬가’다.노르망디에서 태어난 돈켈레의 부모는 샤퀴테리(육가공품) 장인, 조부모는 농부였다. 그는 “아버지가 요리와 사냥을 좋아했다”며 “집에는 항상 요리책이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16살 때 요리를 배우러 파리로 갔고, 명문 요리학교 에콜 페랑디를 졸업했다. 프랑스 최고의 셰프 중 한 명인 알랭 뒤카스 밑에서 수련을 한 후, 2013년 슈발블랑 호텔 생트로페점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미슐랭 3스타를 받았고, 지난해 이곳으로 옮겨 반 년 만에 또 한 번 별 세 개를 받았다.

식사가 끝난 후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밤, 한스 치머의 ‘마운틴’이 흘러 나오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발레리나가 등장했다.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오고, 센 강 위로 밤의 풍경이 내려앉는다. 뱅상 샤프롱은 샴페인과 자몽, 장미 꽃잎으로 만든 디저트를 맛본 후 “이것은 별빛의 맛”이라고 했다. 디저트 이름도 ‘별 위의 황혼’이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