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사이렌과 모비딕, 그리고 존 만지로

조성관 작가 2022. 10. 2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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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사이렌 카드 / 사진=조성관 작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골든 사이렌(Golden Siren)'

스타벅스 매장 계산대에 붙은 안내문이다. 직원에게 무슨 카드인지 물어보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스타벅스 혜택이 있는 OO카드입니다."

나의 관심은 스타벅스 혜택이 아니라 새 카드의 이름이다. 사이렌(Siren). '드디어 사이렌이 등장했구나.'

스타벅스! 줄여서 스벅. 스타벅스의 기원은 이제는 제법 알려졌다. 1971년 미국 시애틀에서 창업한 스타벅스의 브랜드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서 따왔다.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로 포경선 선원 전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선장 에이해브. 미치광이 선장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 1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이다. 1등 항해사는 선장과는 달리 언제나 냉철하고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은 에이해브의 폭주를 막아내지 못했고 피쿼드 호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스타벅스 로고에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半人半漁) 사이렌이다. 매혹적인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바닷물에 빠트려 죽게 하는 죽음의 사신(使臣). 그러니 사이렌이 노래를 부르면 선원들은 귀를 막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

사이렌은 불길, 비극, 죽음 등을 상징하는 부정의 은유다. 영국에서 2차대전 당시 적군의 공습을 알리는 스피커의 경보음을 사이렌이라 부른 배경이다. 그 영향으로 우리는 현충일 오전 10시에 울리는 추도 경적을 관습적으로 '묵념 사이렌'이라 하고, 경찰차나 구급차가 경광등을 켜는 것도 '사이렌이 울린다'라고 말한다.

1870년의 허먼 멜빌 / 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인이 자랑하는 미국소설로 상위에 드는 게 '모비딕'이다. '모비딕'에 대한 찬사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하다. 3년 전인 2019년 미국에서는 허먼 멜빌(1819~1891) 탄생 20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멜빌은 뉴욕에서 나서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부모는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이민 1세.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빚을 남긴 채 사망하면서 그는 스무살에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뉴욕-리버플을 오가는 상선의 견습 선원이 된다. 얼마 후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뉴베드포드에서 포경선을 탄다. 1840년대~1850년대 초반은 포경산업의 전성기.

고래잡이는 '고위험 고수익' 비즈니스였다. 고래잡이는 16세기의 향신료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고래 지방 1톤당 대략 1배럴의 기름이 생산되었다. 고래 한 마리의 평균 몸무게는 40~60톤. 그러니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40~60배럴의 기름이 나왔다. 포경선이 한번 출항해 40마리의 고래를 잡는다고 치면 최대 2400배럴의 기름을 실어 올 수 있었다. 고래기름은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사용되었고 산업혁명 이후에는 윤활유로 수요가 급증했다.

대서양은 매사추세츠 뉴베드포드, 태평양은 샌프란시스코가 포경업의 중심도시였다. 일개 견습 선원에 불과한 멜빌은 수익의 175분의 1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포경선 어커쉬넷 호와 계약했다.

1841년 어커쉬넷 호가 출항했다. 그는 포경선을 타고 고래가 출몰하는 바다를 찾아다녔다. 남태평양까지 간 적도 있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틈틈이 소설로 풀어냈다. 두 권의 모험 소설을 쓴 뒤 서른두 살 때인 1851년 '모비딕'을 출간했다.

1835년의 고래잡이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혜성 충돌을 다룬 재난영화 '딥 임팩트'(Deep Impact). 핵무기로 혜성을 폭파하겠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요원 한 명이 태양광에 눈이 먼다. 다친 채 사령선으로 돌아온 그에게 메시아 호 선장 키니(로버트 듀발 분)가 가져온 책을 읽어준다. '모비딕'의 첫 도입부였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딥 임팩트'를 쓴 시나리오 작가는 브루스 루빈. 삶과 죽음의 문제를 형이상학과 공상과학적 감각으로 다뤄온 루빈은 왜 선장이 '모비딕'을 읽어주는 것으로 설정했을까. 학창 시절에 읽은 '모비딕'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문명을 크게 두 개로 나누면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이다. 몽골 같은 나라가 대표적인 대륙 문명의 국가다. 섬나라나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들은 숙명적으로 해양 지향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영토의 한 면이 바다에 면한 나라들은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이 공존한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한 면이 대서양으로 열려 있다. 좁은 땅덩어리로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네덜란드. 그들은 16세기 초부터 해상 무역과 포경업에 승부를 걸었다.

될 수 있으면 강대국의 발길이 닿지 않은 대양으로 나가야 했다. 그들은 인류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VOC)를 앞세워 한때 세계의 바다를 나눠 가졌다. 북미의 뉴욕, 남미의 수리남, 아시아의 대만과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그들은 쉴 새 없이 대양을 떠돌았다.

하멜과 박연을 비롯한 몇몇은 조선에까지 표착(漂着)했다.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출렁이는 바다를 떠돌며 단단한 육지를 갈망하는 저주받은 네덜란드 선원들의 이야기다.

일본 도쿄의 공원묘지 '조시가야 레이엔'에는 존 만지로(John Manjiro·1827~1898)의 묘가 있다. 미국 본토를 방문한 최초의 일본인이면서 개항기 최초의 영어통역관 존 만지로!

1880년 무렵의 존 만지로 / 사진=위키피디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만지로는 열네살 때인 1841년 친구 네 명과 연안에서 고기를 잡다가 배가 난파되어 어떤 섬에 표착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미국 포경선이 소년 어부 다섯 명을 구조한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포경선 선장 윌리엄 휫필드는 소년 어부들을 내리도록 했지만 만지로는 배에 남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지로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매사추세츠 뉴베드포드에 가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영어 이름 '존 만지로'가 된다. 휫필드 선장의 보증으로 만지로는 그곳에서 1년간 영어와 항해술을 익힌다. 그는 미국 포경선 선원으로 태평양을 돌아다닌다. 10년간 골드러시의 현장을 비롯해 미국 여러 곳을 가보았고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도 익혔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0년 뒤인 1851년. 나가사키에 머물던 그가 1853년 에도로 불려간다. 그는 에도 막부의 쇼군에게 10년간 보고 경험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해 올린다. 이 보고서를 읽은 쇼군은 그를 측근인 하타모토로 앉혀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뒤 1853년 6월,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해군 함대가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한다. 미국 증기선들은 선체를 검게 칠했다. 일본인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 검은색 배들을 구로후네(黑船)라 불렀다.

존 만지로가 쇼군에게 제출한 여행보고서의 세계지도 / 사진=위키피디아

개항 협상에서 쇼군을 대리해 페리 제독 측과 통역을 맡은 이가 만지로였다. 1854년, 페리 제독이 다시 함대를 이끌고 도쿄만으로 왔을 때도 역시 그가 통역을 했다. 이렇게 일본이 오랜 쇄국에서 개방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존 만지로다.

그는 초대 주미일본대사관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었고, 훗날 도쿄제국대학의 강단에 서기도 했다. 일본 최초의 영어통역관 존 만지로의 탄생은 포경선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노마드 집필실'로 애용하는 곳이 서울 정부종합청사 뒤편에 있는 스타벅스다. 일주일에 평균 2~3일 오후 작업을 이곳에서 한다. 갈 때마다 보는 단골들이 여럿 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이사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도 이곳의 단골이다.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손님들도 보인다. 그중에 한 신사는 항상 스마트폰 영어사전을 세워놓고 영어 원서를 두세 시간씩 읽는다. 우연히 화장실을 가다가 그 신사가 읽는 책 표지를 보게 되었다.

Moby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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