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8cm나 기운 첨성대, 진짜 천문대였을까[이기환의 Hi-story](54)

2022. 10. 1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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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황리단길과 벚꽃길도 각광받지만, 경주 시내의 ‘랜드마크’는 역시 첨성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주 시내 한복판, 대릉원과 월성 사이의 평지에 다소곳이 서 있는 첨성대는 남녀노소와 밤낮을 막론하고 사계절, 사진발 잘 받는 핫플레이스니까요.

첨성대의 첫 기울기 측정 때 북쪽으로 20㎝ 기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2016년 경주 지진 때 2.13㎝(동으로는 1㎝) 더 기울어졌고, 이후 2021년 10월까지 4.5㎜ 더 기울어졌다. 동쪽으로는 1.3㎝ 더 나아갔다. 첨성대는 이로써 총 22.58㎝ 북(동)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저는 첨성대를 볼 때마다 괜히 조바심이 납니다. 혼자 이리저리 나름대로 수평을 가늠해보고 기울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게다가 지난 9월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경주지역을 휘몰아쳤잖습니까.

지진 때문에 북으로 2.13㎝, 동으로 1.3㎝ 기움 ‘기우(杞憂)’는 아닙니다. 실제로 첨성대가 기울어졌으니까요.

2009년 발표된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첨성대 실측 훼손도 평가 보고서〉는 첨성대가 북쪽으로 200㎜(20㎝), 서쪽으로 7㎜(0.7㎝) 정도 기울어져 있다는 측정결과를 담았습니다. 첨성대의 높이(8770㎜)와 기운 거리(북쪽 200㎜)로 계산하면 1.19도 정도의 기울기로 계산된답니다. 2년 뒤인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석조문화재 안전관리연구 보고서〉는 피사의 사탑을 인용하면서 첨성대의 기울기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5년 뒤인 2016년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죠. 9월 12일 경주를 중심으로 관측 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한 겁니다. 이후 8일간 모두 600회가 넘는 여진이 이어졌습니다. 첨성대는 어찌됐을까요.

지난해(2021) 첨성대 모니터링 결과 보고서를 토대로 분석해봤는데요. 첨성대의 기울기를 처음 공식측정한 2014년을 0으로 놓은 정밀 측정결과입니다. 그랬더니 북쪽으로 2.13㎝, 동쪽으로 1.3㎝ 정도 탑 전체가 기울어진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4.5㎜의 배부름 현상도 포착됐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2019년까지 3년간 3㎜ 수치 범위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지금까지 22.58㎝ 기울어졌다 다만 연구원은 2020년부터 2년간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답니다. 그럴 이유가 있답니다. 2020년 10월 6일 측정 때는 ‘북쪽으로 22.7㎜ 정도’(2014년 기준) 기울었는데요. 6개월 뒤인 2021년 3월 31일에는 그보다 1.8㎜ 더 기운 24.5㎜로 집계됐습니다. 이어 6개월여 뒤인 2021년 10월 7일 측정 때는 ‘25.8㎜’이 됐고요. 1년 사이 22.7→24.5→25.8㎜로 변한 겁니다.

이상의 측정결과를 종합해볼까요. 2009년 첫 측정 때 북쪽으로 20㎝(200㎜) 이상 기울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요. 이후 2016년 일어난 경주 지진 때문에 2.13㎝, 4년간(2016~2020) 1.4㎜, 지난해와 올해 사이 3.1㎜ 정도 계속 기울었다고 했죠.

종합해보면 지금(2021년 당시)은 2009년 이전에 비해 22.58㎝ 더 기운 셈입니다.

현재 첨성대의 관리등급은 ‘주의 관찰’을 요하는 ‘C등급’입니다. 그렇다고 심각한 상태는 아니랍니다.

현대 건축물 관리등급(A·B·C·D)을 첨성대처럼 세운 지 1400년이 넘는 고건축물에까지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도 늘 예의주시해야겠죠.

북쪽으로 기울어가는 첨성대 첨성대에는 창문(개구부)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다 보니 그쪽으로 흙의 압력이 가중되겠죠. 그래서 북쪽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까지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북쪽의 윗부분 석재 일부가 바깥으로 이탈되는 구조적인 변형이 보입니다.

남쪽 부분은 무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면서 흙의 압력이 그쪽으로 쏠리겠죠. 반면 남쪽벽에서는 상대적으로 흙의 압력이 약해지게 되겠죠. 그러니 남쪽의 석재들이 이완돼 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찬민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제공


2021년 실측조사 보고서도 “첨성대에서 지반침하 등으로 인해 기울기가 변화될 경우, 밑 부분 흙 압력의 증가로 배부름이 증가하거나 상부 석재의 연쇄적인 미끄러짐(이탈)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첨성대 내부에 상시계측시스템을 설치해 수시로 점검하고 있답니다.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경주 지진 같은 대형변수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첨성대는 의심할 바 없는 천문대’ 이쯤에서 첨성대의 기능과 관련된 학계의 견해가 어떻게 정리됐는지 점검해봤는데요.

여전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더라고요.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조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기록(별기)이 있다”고 썼는데요. ‘별(星)을 바라보는(瞻·혹은 우러러보는) 구조물’이라고 했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천문대로 인식됐죠.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등 후대의 사서도 ‘첨성대=천문대’로 설명했습니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돼 있다.”

1476년(성종 7)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삼국사절요〉는 첨성대의 축조연대를 ‘647년(선덕여왕 16) 1월’이라고 했고요.

‘첨성대=천문대’설은 1909년 일본 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가 첨성대를 답사한 후 재확인했는데요.

미국의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1876 ~1946)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1900~1995)도 ‘첨성대=천문대’로 국제학계에 소개했습니다.

‘백가쟁명의 설설설’ 1960년대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삼국유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견해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하죠.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겁니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무슨 관측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뭐 이런 회의감이 든 겁니다.

다양한 학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규표설(圭表說·1964)’이 처음 나왔습니다. ‘규표’는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를 뜻하는데요. 첨성대는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겁니다.

이어 ‘주비산경설’이 제기됐습니다. 첨성대에는 1:3의 원주율, 3:4: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 있다는 건데요. 즉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문(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원주율 3.14와 비슷)에 해당하고요.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4라는 겁니다. 이는 고대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3²+4²=5²’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첨성대에는 창문(개구부)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다. 언제부터 흙으로 채워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수미산설’도 흥미로운 주장인데요. 수미산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인데요. 병 모양을 닮은 첨성대가 수미산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이 제기된 겁니다.

최근에는 우물설도 제기되는데요. 첨성대 맨 위에 ‘우물 정(井)’ 자 돌을 올린 모양이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겁니다.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죠.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57~기원후 4)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다는 신화죠.

‘첨성대=우물설’과 관련해 흥미 있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표상이라는 겁니다. 즉 선덕여왕은 즉위할 때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뜻에서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존호를 받았는데요.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였다는 겁니다. 여성의 산도를 닮은 우물은 나정에서 보듯 박혁거세의 탄생을 상징한 것이고요. 한편으로 첨성대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뜻하기도 한다는데요. 첨성대의 창구가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석가모니의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라는 겁니다.

대낮에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 이렇듯 더러는 일리 있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흥미로운 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여전히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삼국사절요〉 등이 소개한 ‘첨성대’, 즉 ‘별을 관찰하는 구조물’이라는 기본틀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반증을 제시하진 못합니다. 그저 연구자들의 견해일 뿐이죠.

어떤 논문을 읽어보면 ‘견강부회’와 ‘아전인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다가 또 한 편의 재미있는 논문에 시선이 꽂혔는데요.

4면의 평면도에서 북쪽 방향으로 기운 첨성대의 모습. 2021년 실측조사 보고서도 “첨성대에서 지반침하 등으로 인해 기울기가 변화될 경우


맹성렬 우석대 교수가 해외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첨성대는 천문대인가’(2017)라는 글입니다. 즉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인 클레오메데스(기원전 1세기)는 “우물 바닥에서 태양을 보면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고 했답니다. 또 고대 로마의 자연과학자 플리니(23~79)는 “대낮에도 우물에 반사된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수증기 같은 대기 중 많은 미세입자가 햇빛에 난반사돼 별로부터 지구로 오는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낮에 별을 보려면 이런 난반사를 최대한 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죠.

요즘 대낮의 별 관측은 암상자(camera obscura)를 이용하는데요. 고대의 주간 별 관측에는 이런 깊은 우물이 암상자의 대체물로 이용된 겁니다. 실례가 남아 있습니다. 142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건립된 울루그 베그 천문대가 그런 형태이고요. 또 1579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천문대의 부속건물로 건립된 천체관측용 우물탑을 그린 그림이 전해집니다. 프랑스 파리 천문대(1667)와 오스트리아 크렘스뮌스터 천문대(1748)에도 우물 형태의 부속건물이 있답니다.

첨성대는 우물형 천체관측대? 그럼 ‘첨성대=우물’ 형상이라면 어떨까요. 첨성대가 고대에 알려진 주간 별 관측용 우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제기된 모든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즉 첨성대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천장을 지나는 낮의 별자리를 관측하라는 것이다. 뭐 이렇게요.

이와 같은 서양의 천문관측 지식이 어떻게 7세기 신라까지 들어왔을까요.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서역계 유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컨대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한 ‘커트 글라스(무늬를 새긴 유리)’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습니다.

이 고분에서 확인된 5~6세기 은제 잔은 어떻습니까. 한 여인이 조각돼 있는데요. 이란의 아나히타 여신상과 흡사합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수형 유리병은 어떻습니까. 이란 국립박물관 소장 유리병과 쌍둥이라 할 만큼 똑같습니다.

또 경주 구정동 방형 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을 보면요.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이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잡고 있어요. 우물의 원리를 갖춘 천문지식 역시 이때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북 경주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첨성대는 요즘도 남녀노소와 밤낮, 사계절을 막론하고 사진발 잘 받는 핫플레이스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의 3가지 신비로운 일을 기록한 뒤 마지막에 별기를 인용해 “선덕여왕 연간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전했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동지의 새벽에 뜨고 지는 해와 별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물 형태의 첨성대에서 무엇을 관측했을까요. 겨우 9m도 안 되는 깊이의 첨성대 안에서요.

맹 교수가 인용한 이스탄불의 우물형 천문관측대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달과 태양이 동시에 떠 있습니다. 대낮이 아니라 해가 뜨는 여명이거나, 지는 일몰 직후라면 어떨까요.

마침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모서리가 선덕여왕릉과 ‘동지 일출선’에 정렬돼 있다는 연구가 있잖습니까. 동지에 해가 뜨는 ‘동지 일출’은 예부터 태양의 부활을 알리는 새해의 출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고대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 등이 동지 일출선에 정렬된 대표적인 사례라 합니다. 첨성대도 해 뜨기 직전이나, 해진 직후의 별을 관측했던 시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답니다.

물론 이 견해 역시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역시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흥미로운 주장이라는 점에서 소개해보았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1400년 전 신라인들이 이 첨성대에서 관측한 별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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