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 특집 민주지산] 공수특전대원들의 비극이 만든 대피소

서현우 2022. 10. 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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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지산 무인대피소.

산장은 등대다. 산행의 이정표가 되고 지친 산객들이 쉬어가는 공간이다.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대피소와 산 아래 무수한 펜션들에 밀려 산장은 시간이 갈수록 잊혀지고 있다. 운영 주체가 모호하고 일부 무인시설은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럼에도 산객들은 누구나 저마다 산장의 추억을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낡았지만 그리운 흑백사진 같은 곳으로 떠나보자.

물한계곡 입구.
황룡사와 등산로를 잇는 출렁다리는 유독 반동이 심해 재밌다. 

민주지산에서 만난 태양은 천재 화가였다. 처음엔 청량하고 맑은 하늘을 정수리에 들이붓더니 다음엔 온 천하를 따뜻한 유황색으로 물들였다. 황금 밀물이 빠져나간 산그리메는 푸른 잿빛을 띤 채 침잠했지만 그는 어느덧 반대편 하늘에 뜬 달빛을 잡아 분홍색 파스텔을 칠한 구름으로 덮어버렸다. 눈을 뗄 수 없는 빛의 향연에 취해 전라·경상·충청 삼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시린 줄도 몰랐다. 이 화가의 작품을 만나는 편하고 좋은 방법이 바로 민주지산 무인대피소에 묵는 것이다.

정오의 햇빛이 드리운 물한계곡

충북 영동 민주지산 무인대피소를 찾았다. 민주지산 정상으로 바로 치고 오르는 최단코스로 올라 대피소에서 1박하며 일몰과 다음날 일출을 즐긴 뒤, 석기봉까지만 간 후 물한계곡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들머리인 물한계곡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상촌마을 감나무의 이파리가 반짝을 넘어 '빤딱'거린다. 이미 태양은 남중고도를 지났다.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느지막이 물한계곡으로 든다. 이틀에 걸쳐 산행하기에 평소라면 없을 여유가 있다.

물한계곡은 녹색 철조망으로 시종일관 막혀 있어 답답하다. 추락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허리 높이의 나무 울타리 정도면 충분할 터. 아예 사람이 넘지 못할 정도로 막아두니 20km에 달하는 국내 최대 원시림 계곡의 계곡미가 무색해진 점이 아쉽다.

1.3km 걸어들어와 잣나무숲에 이르자 비로소 철조망이 사라지며 물한계곡에 깊게 안겨든다. 한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명성대로 시원하다. 잣나무들은 시종일관 수형이 구김살 없이 늘씬하다. 싱그러운 샛초록 도토리들이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모습이 앙증맞다.

큰 비가 지나간 산은 계곡물이 불어나 있다. 골 곳곳에서 물한계곡으로 합류하는 지류들이 연신 등산로를 덮쳐와 아슬아슬하게 징검다리를 건넌다.

무엇보다 환상적인 건 잔가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하얀 빛무리. 백경록씨의 눈이 햇빛을 받아 마찬가지로 반짝인다. 백씨는 인플루언서이자 산에서 인물 사진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포토그래퍼. 그는 "진짜 너무 멋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셔터를 연신 눌렀다.

완만하지만 자갈이 많아 거슬렸던 길은 어느덧 큼지막한 바위와 계단으로 바뀐다. 발걸음은 편해졌지만 대신 경사가 주어진다. 하얀 로프를 따라 분주하게 보랏빛 봉오리를 땋아 올린 투구꽃이 듬성듬성 있는 화원을 성큼성큼 걸어 오른다. 정상이 지척이다.

늦은 오후에 등산을 시작했기에 머리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깊은 원시림에 신비감을 더해 준다. 
등산로는 물한계곡으로 흐르는 지류들을 수없이 가로지른다. 

특수부대 사고로 건립된 대피소

한 번 땀을 세게 쏟아내면 사람 키보다 큰 정상석이 들어서 있는 민주지산 정상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민주지산岷周之山은 물한리에서 바라봤을 때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의 사투리)하다고 해서 민두름산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로 음차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민주지산은 산세가 매우 유순한 육산이다.

정상에 서자 사방팔방 막힘없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조망이 인상적이다. 무주, 진안, 장수 일대에 무진장 많은 산줄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겹쳐 흐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덕유산이 헌걸차다. 동쪽으로는 뾰족하게 솟은 석기봉이 시선을 잡아끈다. 점점 그림자를 늘리는 오후의 햇살은 골과 능선의 실루엣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하룻밤 지낼 무인대피소는 정상 북쪽으로 36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슬픈 역사를 간직했다. 1998년 4월 1일 천리행군 훈련 중이던 공수특전여단 부대원 6명이 이상 한파로 순직했다. 이를 계기로 유사사고를 방지하고자 이곳에 대피소가 설치됐다. 지금도 대피소 바로 앞에 국제평화지원단이 세운 원점비가 있고, 지난해에는 물한계곡 앞 민주지산 안보공원에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와 추모탑이 설치됐다.

대피소의 밤은 느리고 길다. 8평 남짓한 나무 오두막 안은 아늑하다. 비록 창에 달린 겹문 몇 개가 떨어져나갔고 천장 마감도 부실하지만 바람을 오롯이 막아 주니 매트와 침낭을 펴고 기대어 쉬기에 딱 좋다. 특히 무거운 텐트를 짊어지지 않아 몸이 한결 가볍다.

이번 산행에서 정상만 네 번을 올랐다. 처음에는 대피소로 가는 길에 한 번, 그 다음은 대피소에 짐을 풀고 일몰을 보기 위해 한 번, 다음날 자고 일어나선 가볍게 일출과 운해를 보기 위해 한 번, 마지막으론 대피소 주변 정리를 끝내고 석기봉으로 가기 위해 들렀다.

놀라운 건 네 번이나 올랐지만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었다는 것. 그래서 전혀 질리지 않고 오히려 매번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설렜다. 이신영 사진기자가 백경록 포토그래퍼와 함께 민주지산의 팔색조 같은 변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늦은 오후 민주지산 정상은 장쾌한 조망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한없이 시원하다. 
 일몰을 맞아 정상부 억새가 황금빛으로 따뜻하게 물들었다. 
화려한 일몰이 끝나고 어스름이 내리자 한층 도드라진 산그리메가 인상적이다. 
태양이 가라앉으며 단말마처럼 내뿜은 광선이 구름을 분홍빛 파스텔로 칠했다.  

내 고향 산천 내 손으로 깨끗이

긴 밤이 지나고 새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어제는 약간 지치고 금방 어두워진 탓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쓰레기들이 너른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벌써 일어난 산꾼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그 쓰레기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충청 지역 산꾼 류재호, 손미나씨 내외와 류씨의 제안으로 기꺼이 함께 온 박영자, 이동길씨 4인방이다. 나 혼자 대피소 주변의 쓰레기를 모두 가져 내려오긴 불가능할 것 같아 도와줄 수 있냐는 요청에 이들은 "고향 산천은 내 손으로 치워야죠!"라며 흔쾌히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지역 산꾼 4인방이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피소 주변의 쓰레기를 치웠다. 
대피소 내부에는 막걸리통과 다른 등산객이 잠시 휴식을 취하다 흘린 듯한 쓰레기들이 많았다.  

"임자~ 이것 좀 와서 주워~."

구수하고 느린 사투리와는 다르게 재빠른 동작으로 쓰레기들을 치운다. 4인방은 사실 못 말리는 산사랑을 가진 산꾼들이다. 류재호씨는 지난 8월 15일 1,000개의 산을 완등하고 2027년까지 2.000산 등정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산꾼. 이동길씨와 박영자씨는 전남 강진 병영면향우회인 설성산악회 소속이다. 두 사람은 2020년 8월 22일에 같이 100대 명산 릴레이를 시작, 1년도 채 안 지난 2021년 6월 5일 완등한 후 또 2021년 6월 22일부터 2022년 7월 6일까지 섬산100을 완등할 정도로 산에 중독됐다.

"제가 콩팥이 하나 없는데 등산하면서 몸이 더 좋아졌어요. 또 천식도 있는데 산에만 오면 천식 기운을 못 느껴요. 이러니 산에 미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동길씨가 너스레를 떨며 신명나게 쓰레기를 줍는다. 대피소 내부는 물론 대피소 외부까지 구석구석 숨겨진 쓰레기를 찾아낸다. 카메라 셔터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이신영 사진기자가 몇 번이고 "다시 한 번만 주워 달라"고 애걸하는 신파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내 최대 원시림 계곡을 품고 있다는 명성답게 민주지산 주능선에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영동군청에서 나눠준 마대가 순식간에 한가득 찬다. 지역 산꾼들은 힘든 기색도 없이 번쩍 마대를 들고는 먼저 길을 떠난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민주지산 정상을 지나 동쪽 지능선 삼거리에 닿는다. 산꾼들은 여기서 먼저 내려가겠다고 한다. 그들은 "석기봉까지 쓰레기를 들고 가기엔 무겁다"며 "우리 대신 고향 산의 매력을 맘껏 담아 달라"고 전했다.

따뜻한 배려를 받았기에 잠에서 덜 깬 발걸음에 힘이 절로 붙는다. 하지만 의욕과는 다르게 민주지산에서 석기봉으로 가는 능선 길은 큰 재미가 없다. 조릿대는 무성하고 신갈나무와 참나무가 번갈아가며 시야를 가로 막아 조망이 전혀 없다. 겨울에 눈이 내려야 예쁠 길이다.

류재호씨가 한가득 채운 마대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영동군청에 따르면 민주지산 무인대피소 쓰레기는 헬기로 수송하지 않고 모두 사람의 힘으로 수거해 내린다고 한다. 

민주지산과 또 다른 매력의 석기봉

쉼 없이 거리를 줄인다. 일출과 동시에 길을 나섰기에 오늘 첫 손님이다. 그래서인지 무수한 거미줄이 얼굴에 얽혀 온다. 하지만 기꺼이 길을 뚫고 나간다. 석기봉은 스릴 있는 암릉 구간도 있고 민주지산 정상과는 또 다른 매력의 조망을 만날 수 있다는 설명을 사전에 확인했기 때문에 기대가 됐다.

그러나 3km에 이르는 오솔길을 주파하고 난 뒤 석기봉 정상 직전 로프로 잡고 오르는 암릉은 추락 위험으로 폐쇄돼 있다. 아쉬움을 삼키고 남쪽으로 빙 도는 우회로를 따른다. 예기치 않게 커다란 삼신상이 맞이해 준다. 처음에는 마애불인 줄 알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삼신상이다. 고려 혹은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 민간신앙의 근간을 엿볼 수 있는 상이라고 한다.

좁다란 길을 따라 마지막 계단을 지나면 갑자기 그동안 생이별 당했던 일망무제의 하늘이 버선발로 달려든다. 석기봉 정상이다.

민주지산 정상에 비해 전망의 장쾌함은 떨어지지만 석기봉 정상은 대신 군데군데 돌출된 바위들이 있어 이를 활용해 사진을 찍는 맛이 난다. 특히 한반도의 등뼈라는 별명을 입증하려는 듯 척추처럼 겹겹이 봉우리를 이루며 뻗어 내린 백두대간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우뚝 튀어나와 있는 민주지산 정상석도 진기하다.

석기봉이 이번 산행의 최고점이다. 이제부턴 물한계곡주차장까지 5km의 기나긴 내리막이다. 정자 한 채를 지나 300m쯤 삼도봉 방면으로 진행하면 골짜기로 내려서는 계곡길이다. 초반에 너덜만 견디고 지류를 몇 번 건너면 이후로는 편안하게 산허리를 따라 내리는 오솔길이다. 삼도봉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한 번 땀을 씻어내면 물이 마를 때쯤 주차장에 닿는다. 환상의 절경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눈이 얼얼하다.

석기봉은 시원한 전망과 더불어 정상부의 바위를 활용해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어 매력적이다. 

민주지산 1,242m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

산행 거리

12.4km(최단 동선 기준. 일출, 일몰 촬영 소요로 취재진은 19km 산행)

산행 시간

첫째 날 2시간, 둘째 날 3시간 30분(야영 짐 무게 비례해 30분~1시간 이상 추가 소요)

산행 난이도

★★(등산로 전반적으로 완만하고 잘 정비)

산행길잡이

민주지산 산행은 보통 물한계곡을 기점으로 이뤄진다. 가장 대표적인 코스는 민주지산으로 바로 오른 뒤 석기봉과 삼도봉을 거쳐 물한계곡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다. 산행시간은 6시간 정도 걸리며, 난이도도 당일산행하기에 딱 적당하다.

대피소에서 하루 묵는 산행을 계획하는데 산행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고 싶다면 첫째 날에 각호산을 먼저 오른 뒤 대피소로 가서 1박 후 석기봉과 삼도봉을 거쳐 물한계곡으로 돌아오면 된다.

대피소 이용 시 주의할 점이 있다. 무인대피소며 따로 예약 받지 않기 때문에 묵으려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사전에 얼마나 사람이 올지 알 수 없으므로 휴일 유무나 날씨, 계절을 고려해서 텐트를 준비하거나 대피소에 일찍 도착해야 한다. 또 붐비는 것이 싫다면 최단 탈출코스인 민주지산휴양림 방면으로 하산하는 방법도 미리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맛집(지역번호 043)

물한계곡에 다래나무식당(745-0967), 대전식당민박(745-7033)에서 김치찌개, 닭백숙, 버섯찌개 등을 판다. 선택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상촌면 소재지로 나오면 된다.

청학동(743-1837)은 널리 알려진 맛집으로 자연산 능이버섯 전골을 판다. 맞은편 다담식당(743-9621)도 한 끼 깔끔하게 먹기 좋다. 돌솥밭과 구수한 된장찌개를 함께 내놓는다.

교통

영동역과 영동정류소에서 출발해 황간을 경유, 물한계곡으로 오는 640, 641, 642번 버스가 하루 5회(06:30, 07:30, 12:20, 14:40, 17:50) 운행한다. 해당 버스는 물한계곡 종점에서 영동으로 되돌아간다. 물한계곡 종점 출발 시간은 07:40, 09:30, 14:00, 16:30, 19:10이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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