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야영] 옥천 피레네에서 "헉, 헉", 산 정상에서 "오들오들"

민미정 2022. 9. 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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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어깨산
역에서 정상까지.. 낮에는 땡볕, 밤엔 추위와 사투
접이식 자전거는 거치가 용이해서 장거리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옥천역에 도착해서 어깨산 들머리까지 자전거로 이동했다.

요즘 자전거 캠핑에 빠졌다. 그래서 캠핑 장소를 정할 때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무거운 짐과 함께 자전거를 싣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자전거를 고집하는 건 자연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천천히 야영장까지 달리면서 누릴 수 있는 낭만이 있다.

이번 여행은 충북 옥천에 있는 해발 441m의 어깨산이다. 낮지만, 산자락을 따라 굽이도는 금강과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메가 장관인 곳이다. 우선 옥천 기차역에서 자전거로 40분쯤 달려 부소담악에 들를 예정이었다. 부소담악은 원래 산이었지만, 대청댐이 준공된 다음 산 일부가 물에 잠겼다. 기암괴석과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다. 부소담악을 둘러보고 다시 옥천역을 지나 금강 물줄기를 따라 40여 분 달리면 어깨산이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어깨산 정상 근처 전망대에서 멋진 일몰과 함께 하룻밤을 보낼 것이다. 평일이라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기대했다. 지난주 계곡에 갔을 때 너무 더워서 잘 때 침낭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배낭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침낭을 뺐다. 산에서 날파리나 모기가 얼굴 앞에서 앵앵대는 걸 방지하려고 '버그넷Bug Net(벌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메시로 얼굴을 가리는)'모자와 모기 기피제 등도 꼼꼼하게 챙겼다.

오전 9시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카페 칸에 자전거 거치대가 있다고 했는데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역무원이 다가왔다.

"접이식 자전거는 좌석 맨 뒤에 넣어도 됩니다."

어깨산 임도길을 달리며 고프로 맥스로 촬영한 사진. 자전거 핸들에 거치해도 정면에서 찍은 사진처럼 편집이 가능하다

휴대폰 충전 케이블을 놓고 왔다!

스트링으로 자전거를 고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해 케이블을 찾았다. 보조 배터리까지 챙겨왔지만 케이블을 찾을 수 없었다. 전날 급하게 짐을 싸느라 빠뜨린 것이다. 노후된 배터리가 빨리 닳는 탓에 충전 케이블을 구할 때까지 휴대폰을 껐다. 창 밖의 풍경은 쉴새 없이 빠르게 스쳐갔다. 금세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옥천역이었다. 충전 케이블 살 곳을 검색하고 옥천역에서 나와 휴대폰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열기를 가득 품은 옥천 군내를 이리저리 돌아가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케이블을 구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무더위에 도로 위를 활보하고 다니느라 체력도 떨어졌다. 이 더위에 장거리 라이딩과 산행을 함께 감행하는 건 무리다! 오만했던 어제의 나를 꾸짖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음료를 들이켰다. 냉정하게 판단하자. 어깨산과 반대 방향에 있는 부소담악에 들렀다 가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욕심부리지 말고, 가능한 한 코스를 여유 있게 즐기자면서. 인덕션처럼 달궈진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탔다. '택시를 탈까?' 잠깐 고민했지만, 어느새 두 다리는 페달을 돌리고 있었다. 일단 고! 막상 출발하니 그늘도 많고 달릴 만했다. 기나긴 언덕길을 오를 때까지는.

금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해바라기 밭을 만날 수 있다. 여행객들을 위해 옥천군에서 재배하는 해바라기 밭이라고 한다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 피레네 구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한겨울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기 위해 피레네산맥을 넘었고 이때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 길을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여유롭게 넘었다. 엄청난 피레네 고개를 가뿐하게 통과했던 내가 한국의 이름 모를 언덕길에서 혀를 내두르다니! 여긴 옥천의 피레네 구간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다.

'발을 멈추면 나는 패잔병이 되는 것이다!'

동기부여를 한 덕분에 무사히 언덕 정상에 올랐다. 자전거를 세우고 인증샷을 찍으려는 순간 택시가 '쌩' 지나갔다. 피레네고 자시고 나는 왜 사서 고생하는가? 인증샷은 집어치우고 휴대폰을 다시 핸들에 고정시켰다. 다운힐의 시원한 바람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본격적인 라이딩 코스가 나타났다. 한참을 달리다가 거대한 가로수가 즐비한 길 위에 멈췄다.

등산로 초입의 느리골 전망대. 소나무 한 그루가 등산객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자전거에서 내려 삼각대를 설치하려는 순간 자전거가 요란스럽게 쓰러졌다. 맙소사! 허리에 메고 있던 보조가방 속 배터리와 자전거에 거치되어 있던 휴대폰을 연결하는 케이블이 망가졌다. 무더위 속에서 순간 얼음이 됐다. 정지됐던 두뇌 회로가 나지막이 신호를 보냈다.

'침착해, 침착하자고.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침착해!'

휴대폰은 충전 없이 하룻밤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냥 갈 것인가? 다시 비장하게 마음을 무장하고 옥천의 피레네 언덕을 왕복할 것인가? 너무 가혹한 선택지였다. 10여 분만 더 가면 어깨산이었다. 결국 다음날 길찾기와 기차표 예매를 위해 휴대폰 전원을 껐다. 하룻밤 '노디지털 노마드Nomad'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무기를 잃었지만 덕분에 주변 풍광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가을을 기다리며 토실토실해져 가는 밤송이와 오매불망 해를 바라보면서 광합성하는 해바라기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 '추억' 폴더에 저장됐다. 마침내 어깨산 들머리인 '옻문화단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전거를 세웠다.

장맛비를 이기지 못해 영글지도 못한 채 떨어진 밤송이들. 그럼에도 아직 나무에는 가을을 준비하는 밤송이가 즐비하다.

산행루트가 여러 개 있어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켰다. 폰을 만지작거리니 마음이 놓였다. 역시 나는 디지털 노예였다. 다시 전원을 끄고, 산행을 시작했다. 사소한 사건으로 시간이 지체됐지만 덕분에 일몰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길이 지그재그로 나 있어 힘들지 않았다. 대신 눈으로 돌진하는 날파리 떼에 정신이 혼미했다. 속눈썹에 '파리끈끈이'라도 발라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낭을 내려 버그넷 모자를 꺼내 썼다. 메시로 얼굴을 가려 시야가 좀 불편했지만 눈은 안전했다. 중간쯤 올랐을까? 산불 피해 알림 표지판이 보였다. 2016년 발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화재로 소나무 1헥타르가 소실됐다고 한다. 어느 블로그에서 백패커가 주범인 양 포스팅해 놓은 글을 읽었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요즘은 자연보호를 위해 비화식을 지향하는 백패커들이 늘어가는 추세다. 그리고 내 주변 백패커들은 모두 자연보호에 민감하다. 어쨌든 백패커들이 범인은 아니다. 확실하다!

어두운 밤이 찾아왔지만 금강을 따라 늘어선 불빛과 하늘의 별이 빛나고 있어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범인을 욕하면서 쉼 없이 올랐다. 온몸의 땀구멍이 쏟아낸 땀으로 범벅됐다. 곧 정상인데 그걸 못 참고 안달이 난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더위를 먹은 건가? 정상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이럴 땐 힘들어도 직선으로 치고 올라가는 길이 좋다.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며 정상에 올라섰다. 수십, 수백 개의 산이 겹쳐서 산그리메를 만들었다.

"장군님, 오셨습니까?"하고 늘어선 산들이 환영하는 것 같았다. 금강 물줄기가 그 사이로 굽이돌며 꿈틀댔다. 바람도 시원했다.

추워서 잠 설쳐

숙영지 '하늘전망대'는 정상에서 멀지 않았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었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일몰 사냥객이 있을 것 같아 한쪽 구석에 텐트를 쳤다. 서쪽 하늘은 이미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편의점에서 산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아름다운 일몰에 잔을 대고 건배했다. 승전병이 된 것 같았다. 나홀로 미션 완수를 자축했다.

이른 아침. 자연에게 인사를 건네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별사진을 찍기 위해 한참 밖에 있었다. 낮과는 달리 바람이 차가웠다. 밤이 깊어지자 멀리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이 없으니 텐트 밖 세상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백패킹으로 다녀온 세계여행을 되짚어 보자.' 시작은 네팔이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해 택시비를 흥정했었지.' 첫 여행지인 네팔 산행을 시작도 못 하고 잠이 들었다.

한기에 눈이 떠졌다. 저녁 무렵의 심상찮은 찬바람이 침낭도 없는 텐트 안을 냉골로 만들었다. 얇은 패딩조차 없었다. 그제의 나를 또 꾸짖었다. '야, 이X야 패딩을 챙겼어야지!' 땀에 젖어 널어놓은 옷을 덧입었다. 그래도 추웠다. 손수건과 발포매트 등 덮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덮었다.

변변한 동계 우모복도 없이 페루의 피스코(5,675m)를 등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상을 공략하기 전 캠프3에서 바닥으로는 냉기가, 위로는 한기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꼴딱 세웠던 그때, 냉동창고 그 자체였다. 결국 빙하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침낭, 배낭과 입고 있던 얇은 패딩과 우모 바지까지 벗어 발포매트 아래에 깔고 버텼다. 물론 지금은 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6년 전 화재로 되살아 나지 못한 고사목과 함께. 화재 원인이 어디에 있든, 산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화기 사용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추위와 싸우다 뜬눈으로 여명을 맞았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동쪽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정상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벌써 등산객이 올라왔다. 재빨리 숙영지를 정리했다. 배낭 위에 앉아 밝아오는 하늘을 감상했다. 산 그림자에 가려졌던 금강이 떠오르는 태양빛을 머금고 금빛 띠를 두르기 시작했다. 일몰과 일출 모두 환상적이었다. 뇌리에 새긴 멋진 하늘을 훈장처럼 간직한 채 하산했다.

해가 지기 직전 하늘전망대에 도착해 설영한 후 멋진 일몰을 감상한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자전거를 타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옥천 피레네 언덕을 쏜살처럼 달렸다. 휴대폰 가게에 도착해 케이블을 연결하는 순간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노디지털 노마드는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다. 자연과 문명의 이기는 함께 누릴 수 있을 때가 최고이다.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이번 꿀템은?>

버그넷 모자 피엘라벤 마린 모스키토 햇Marlin Mosquito Hat

모자에 메시가 연결되어 있다. 시야를 살짝 가리긴 하지만 많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얼굴에 벌레가 접근하는 걸 막는 용도로는 훌륭하다.

모기 기피제 무무스 가드Mumus Guard 플러스

모기, 진드기 등 해충을 막아주는 친환경 모기 기피제. 생후 6개월 이상의 영유아가 써도 되는 제품이다. 라벤더 향이라서 쓰기에 부담 없다.

360˚카메라 고프로 맥스Gopro Max

본문에 실린 사진 중 둥그렇게 왜곡된 이미지는 고프로 맥스를 사용해서 촬영했다.

선블록 캔서 카운슬Cancer Council SPF 50+

여름철 산행할 때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다. 자외선은 피부 노화를 불러올 수 있다.

휴대용 화장실 응가맨

큰 봉투에 배변 후 대변에 뿌려 주면 굳는다. 굳은 변을 잘게 부수어 쓰레기로 되가져 올 수 있다. 휴대용 변기도 있지만 산에 가지고 다니기엔 좀 번거롭다. 응고된 변에서는 냄새가 약간 난다.

2017년 테이블 마운틴 앞에서

'응가맨'이 나왔으니까 덧붙이는 이야기

베네수엘라의 카나이마Canaima 국립공원에는 일명 테이블 마운틴이라 불리는 로라이마 테푸이Roraima Tepui가 있다. 로라이마 테푸이는 하나의 바윗덩어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5박6일 트레킹 코스로 국립공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가이드, 변기통(좌변기, 봉투, 대변응고제, 원통)이 꼭 필요하다.

트레킹이 끝나고 대변용 원통이 비어 있으면 벌금이 부과된다. 6일 동안 변비인 사람은 벌금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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