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수험생부터 교사, 경찰, 취준생까지… 그들이 ‘90분 무아지경’에 빠진 까닭은? [아무튼, 주말]

구아모 기자 2022. 9.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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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 속 3년 만에 열린
‘멍 때리기 대회’ 가보니

지난 18일 오후 서울 잠수교.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깔린 50개의 요가 매트 위에 75명이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튼 사람, 양발을 쭉 뻗은 사람, 무릎을 껴안은 사람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오를 정비했다. 패션도 각양각색. 핑크색 가발을 쓴 이가 있는가 하면, 경찰복을 맞춰 입은 일가족, 잠옷 차림의 참가자, ‘무직 백수’란 글자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한강 잠수교에서 3년 만에 열린 '멍 때리기 대회'. 75명의 참가자가 각자 대오를 정비하고 요가 매트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날한시에 이들이 모인 건 ‘멍 때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80대1의 경쟁률을 뚫고 결선에 진출한 이들은 90분 동안 머릿속을 하얗게 비운 채 1위를 거머쥐는 것이 목표다. 코로나 시기 인터넷 생활용품 쇼핑몰을 창업했다는 문건태(42)씨는 “여행하며 맛집 가고 풍광을 구경하는 것도 새로운 자극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라 진정한 의미의 쉼은 아니다”며 “창업 후 바쁘고 힘들었는데, 일이 안 풀릴 때마다 30분씩 멍을 때리며 뇌를 쉬게 했던 경험 덕에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고 했다. 반 친구들과 참여한 고등학교 3학년 김세진(18)양은 “고3이야말로 멍 때리기에 최적화된 사람들”이라며 “수업 시간 갈고 닦은 멍 때리기 실력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고3은 멍 때리기에 최적화된 나이"라며 "이 재능을 학교에서만 낭비하긴 좀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참가의 변(辯)을 밝힌 학생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오후 3시, 대회가 시작됐다. 기술 점수에 예술 점수를 더해 순위를 겨룬다. 의사 가운을 입은 스태프들이 선수들 손가락에 부착한 측정 기구를 통해 4차례에 걸쳐 심박수를 체크하는데, 안정적인 심박수를 보일수록 높은 기술 점수를 받는다. 예술 점수는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이 매긴다. 멍 때리는 모습을 본 시민들이 넋 놓고 무아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참가자에게 투표한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잠수교에서 3년 만에 열린 ‘멍 때리기 대회’. 핑크 가발을 쓰고 참여한 시민이 머릿속을 하얗게 비운 채 무아지경에 빠졌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입추가 지났지만 늦더위로 낮 기온 32도를 기록한 이날, 7분 만에 첫 탈락자가 발생했다. 땡볕과 더위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나름의 ‘비기(秘器)’를 준비한 사람도 보였다. 수학 문제집을 쳐다보며 멍 때리는 학생,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집중하는 어린이 등등. 중간중간 졸거나 하품을 해서 경고를 받는 참가자도 있었다.

시민들이 '멍 때리기 대회' 참가자들의 사연을 읽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물멍’ ‘불멍’ ‘달멍’ ‘파도멍’ 등 각종 멍 때리기 시리즈가 이어질 만큼 현대인들은 왜 ‘멍 때리기’에 집착할까.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일상에서 불안감을 느낄수록 안정과 휴식의 한 방편인 ‘멍 때리기’에 집착하게 된다”며 “스마트폰을 보며 여가를 즐긴다지만 이 또한 자신을 또 다른 걱정과 자극, 불안에 노출시킨다”고 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라며 '멍 때리기 대회'에 참가한 배우 엄현경씨/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 대회를 조언한 황원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소화 기능이 제한된다”며 “멍 때리기는 교감신경을 안정시켜 심장 박동수를 낮춰줌으로써 불안한 감정을 사라지게 한다”고 했다. 중학교 교사 한지원(29)씨는 “대회에 참가하니 머리가 맑아졌다. 휴대폰과 소셜미디어에 장시간 노출되는 학생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멍 때리기 대회' 우승자들. 왼쪽부터 1등을 차지한 김명엽(31)씨, 2위를 차지한 임우석(26)씨, 3위를 차지한 프랭크 레인(28)씨.

우승은 한화 이글스 10년 팬이라는 김명엽(31)씨에게 돌아갔다. 한화 유니폼을 입고 나온 김씨는 “한화가 경기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멍이 때려지더라”며 “내가 응원하는 팀은 절대 받을 수 없는 등수”라며 웃었다. 3등은 미군 프랭크 레인(28)씨에게 돌아갔다. ‘한국어를 못해요’라고 적힌 상자를 두고 캠핑 의자에 앉은 채 멍을 때려 시민들 시선을 끈 전략이 유효했다. 2등을 차지한 임우석(26)씨는 무채색의 반팔·반바지를 입었다. 참가 이유도 “아무 생각 없다”로 일축한 그는 오로지 멍 때리는 모습만으로 2위를 거머쥐었다. IT 계열로 취업을 준비 중인 임씨는 “공부하다가 지칠 때 혼자서만 멍을 때렸는데, 단체로 멍을 때리니 외롭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공부해야죠. 그러다 힘들면 또 멍을 때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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