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오지산] 조난 신고도 불가능..간신히 계곡 탈출

한효희 2022. 9.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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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가리산 지류 계곡 12km 개척 산행
수량이 많아 물에 빠지지 않고는 계곡을 오를 수 없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쏴아! 쏴아!" 귀를 찢는 듯한 물소리에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젖은 몸으로 험한 원시 계곡을 오르느라 모두 말수가 적어졌다. 끝없는 계곡 속에 나 홀로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혹여 비라도 내리면 꼼짝없이 계곡이 우리를 집어삼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물소리가 온 정신을 뒤흔든다.

한북정맥 지능선 오지로 남은 산

한북정맥에서 갈려 나온 산줄기인 포천 가리산 산행에 나섰다. 가리산은 국망봉에서 포천 방면으로 뻗은 지능선의 바위산이다. 오르기 까다로운 암봉인데다 국망봉의 인기에 가려 찾는 이가 드물다. 국망봉자연휴양림에서 가리산을 오르는 산행기는 몇 있지만 도마치계곡에서 오르는 산행기는 거의 없다. 군부대 때문에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되었던 도마치계곡은 최근에야 백패킹 명소로 유명해졌지만 등산로가 없는 중류부터는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 계곡이다.

횡으로 길게 뻗은 도마치계곡 중간쯤에서 지계곡으로 꺾어 가리산을 오를 계획이다. 지계곡 상류에서 능선으로 올라 가리산 정상을 거쳐 이동면 도평리로 원점회귀한다. 산행의 관건은 가리산 지계곡을 거슬러 올라 능선까지 가는 것. 지류계곡치고 거리가 3km에 달해 꽤 깊은 계곡인데다 등산로가 없어 개척산행을 해야 한다.

며칠간 내리던 비가 잠시 소강한 틈을 타 포천으로 향했다. 까다로운 산행에 동행한 이는 한문학 박사과정인 성균관대 산악부 박기완씨와 국내 여성 최연소 백두대간 일시종주에 성공한 성예진씨다. 시원하게 뻗은 47번국도를 따라 포천으로 가는 길에는 1,000m대 고산인 한북정맥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수많은 할머니들이 원조임을 주장하는 이동 갈비 골목을 지나 도마치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이동면 일대는 도마치계곡과 백운계곡이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날씨가 우중충한 평일인데도 도로 갓길에 차가 빼곡하다. 한때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도마치계곡은 요즘 SNS에서 오지 백패킹 계곡으로 유명해져 핫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도마치계곡의 인기가 반갑지 않은 이들도 있다.

계곡 초입의 한 캠핑장은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캠핑장 뒤편에 계곡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는데 사람들이 계곡에서 나오는 길에 캠핑장에 쓰레기를 버린 탓이다. 현재 캠핑장 입구에는 등산객 출입을 금지하는 푯말이 여럿 붙어 있고 심지어 철조망이 둘러진 바리케이드까지 쳐있다. 적의 출입을 막는 요새처럼 등산객의 출입을 절대 방어하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진다.

도마치계곡에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과 용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하류부터 계곡을 그대로 거슬러 오르는 방법을 택했다. 하류는 캠핑장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물놀이하기 좋게 정비되어 있지만 며칠 동안 계속된 비로 수량이 많고 물살이 거세다. 해외 유명 브랜드 중등산화를 신고 온 성예진씨가 잠시 망설인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수가 안 보이자 이내 단념하고 풍덩 계곡에 빠진다.

하류 300m 지점에서 오른편 다리를 오르면 임도로 오를 수 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계곡을 건너려고 하지만 물살이 거세 애를 먹고 있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인간 띠를 만들어 한 명씩 손을 잡고 계곡을 건넌다. 자칫 중심을 잃으면 휩쓸리기 십상이다. 수량은 많지만 수심이 허벅지 정도로 깊지는 않다.

임도에 오르고 나니 '아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1km가 안 되는 거리였지만 길을 찾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고 거센 물살에 온 몸이 긴장돼 있었다. 계곡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취재를 못 하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큰 산을 넘은 느낌이다.

중류부터는 길이 없어 개척 산행을 해야 한다.

원시 모습 간직한 가리산 지류계곡

임도를 따라 30분 정도 들어가면 SNS에서 유명한 도마치계곡 명소가 나타난다. 너른 바위와 적당한 수심의 청정 계곡이 바위 절벽과 어우러져 운치가 있다. 아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라지만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계곡 주변에는 야영하기 좋은 터가 여럿 있고 텐트도 군데군데 보인다.

왁자지껄하던 계곡이 금방 조용해진다. 인기 있는 물놀이 장소를 지나자마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임도를 따라 더 들어가면 무너진 출렁다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개척 산행이 시작된다. 길이 사라지자마자 일체의 인위도 사라진다. 공깃돌 같은 바위가 계곡에 널려 있고 거센 물살이 바위를 넘나들며 흐른다.

인위가 사라진 자리에 자연이 빈자리를 채운다. 며칠 동안 내린 비를 잔뜩 머금은 산은 토해내듯 막대한 수량을 쏟아낸다. 골이란 골마다 물이 쏟아져 나오고 물과 바위의 마찰음이 계곡을 가득 메운다. 물소리의 파동이 온 몸을 떨게 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소리는 압도되어 사라진다.

계곡 중류에서 도마치계곡과 가리산 지류계곡이 합류하는 Y자 지대가 나온다. 오른쪽 지류계곡으로 들어선다. 바위가 많고 넓은 도마치계곡과 달리 지류계곡은 좁고 나무가 드리워 스산하다. 북향이라 볕도 잘 들지 않아 바위는 이끼가 가득 껴 푸르다 못해 검다. 세상에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검은 계곡에 첫 발을 들였다.

이끼가 많고 음산한 지류계곡.

조난 신고도 불가능한 음침한 계곡

가리산 지류계곡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계곡에는 물길과 바위, 나무 모양조차 원시적이다. 사람에게는 이질적이고 거칠지만 자연에게는 당연하고 필연적인 모습이다. 원시자연을 탐험하는 기쁨은 자연의 무위가 주는 경외와 그 속에서 최선의 길을 모색하며 나아가는 것이리라.

계곡 양옆으로 마땅히 오를 데가 없어 쏟아지는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른다. 좁은 계곡에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니 물과 바위의 마찰음 때문에 귀가 멍멍하다. 미끄러운 바위를 손발을 다 쓰며 넘나들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고 쉽게 피로해진다.

가리산 지류계곡 곳곳에서 물이 쏟아져 내린다.

계곡을 오른 지 몇 시간째. 끝없는 물소리에 온 감각이 마비된 느낌이다. 압도적인 수량에 좀처럼 속도는 나지 않고 계곡은 여전히 험난하다. 비 예보는 없었지만 언제 날씨가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혹시나 비라도 오면 꼼짝없이 조난되겠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거센 물살 때문에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다. 혹여 조난되어 구조대가 온다 하더라도 계곡이 더 불어난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릴 것 같았다. 두려움이 몰아닥친다.

망상에 빠져 주저앉을 수는 없다. 무조건 상류로 치고 오르는 게 안전을 담보하는 길이다. 올라갈수록 수량은 줄어들었지만 계속 거친 장애물의 향연이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계곡을 정신없이 오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능선으로 치고 올라야하는데.'

원래 계획한 코스는 상류에서 작은 골을 따라 가리산 능선으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곡을 오르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계획한 지점을 지나버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의욕은 없었다. 괜히 길을 잘못 들어 운행 거리가 길어지고 변수가 늘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천둥 같은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운다.

"쏴아쏴아!"

물소리에 몇 시간 동안 노출되어 있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넋이 나간 느낌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처럼 음침한 계곡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모두 계곡에 홀린 것 같았다.

그때 오른쪽으로 작은 골이 보였다. 가파르지만 조금만 오르면 금세 능선에 닿을 것 같았다. 두 대원도 동의하는 눈빛을 보내 온다. 직감을 믿고 오른쪽 골로 오른다. 골은 쿨와르Couloir처럼 좁고 가파르다. 낙엽이 두텁게 쌓여 설상 지대를 걷는 느낌이다. 스틱을 깊이 찌르고 킥스텝으로 사면을 차며 골의 왼쪽으로 오른다. 계곡에서 멀어질수록 골이 깨질 것 같던 물소리는 잦아들고 거친 숨소리만 들린다.

가파른 사면을 100m쯤 오르니 경사가 완만해진다. 어려운 등반을 끝내고 볼트에 확보한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호흡을 가다듬고 완만한 사면을 오르다보니 이내 가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랐다. 휴대폰 신호도 잡힌다. 드디어 계곡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에 발걸음이 가볍다.

지류계곡 상류의 독특한 폭포.

포천이 한눈에 조망되는 가리산 정상

가리산으로 오르는 능선에는 정비된 등산로는 아니지만 제법 뚜렷한 산길이 나있다. 가리산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가팔라지고 로프가 있는 암릉이 나타난다. 로프가 낡아 보여 꺼림칙하다. 잡아당겨보니 끊어질 것 같지는 않다. 고정 로프 구간을 지나 몇 번 바위를 오르면 가리산 동봉이다. 동봉에는 조망이 없다. 짧게 내려온 뒤 다시 산을 오르면 가리산 정상인 서봉이다. 바위 봉우리인 가리산 정상에서는 저 아래 도마치계곡과 포천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가리산 정상 오르기 전 로프 구간을 오르는 박기완씨.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다 능선 안부에서 표지기를 따라 하산한다. 하산 계곡은 가리산 지류계곡에 비해 덜 험하다. 곳곳에 장뇌삼 재배지를 알리는 푯말이 있고, 검은 배수관이 흉물처럼 나뒹굴고 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거대한 배수관을 상류까지 가져와서 방치해 뒀는지 궁금하다.

하산은 길이 이어졌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좋은 길이 나타나며 우리를 안심시켰다가 이내 사라지며 희롱한다. 하산길 중간에는 포장이 잘된 시멘트 도로가 나타났다 이내 감쪽같이 사라지고 수풀이 무성한 길로 바뀌었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산 한복판에 잘 포장된 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가리산 정상에서는 포천 일대와 도마치계곡이 조망된다.

하산 계곡은 볕이 잘 들어 잡목들이 생명의 각축을 벌인다. 가시덤불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에 문경 오지 산에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행했다가 팔다리에 풀독이 올라 며칠 동안 잠도 못자고 병원 신세를 졌다. 올해는 제발 무사히 넘어가고 싶어 최대한 살금살금 수풀 헤쳤다. (결국 허사였다.)

수풀을 헤치며 계곡을 내려가다 보니 넓은 시멘트 공터가 나온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계곡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이다. 계곡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시달린 기분이다. 산행 출발지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1.5km 정도 도로를 걷는다. 젖은 채로 오랫동안 산행했더니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다. 퉁퉁 부은 발은 천근만근이고 발톱이 빠질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

셋 다 아무 말 없이 도로를 걷는다. 덥고 습한데 온 몸이 젖은 채로 땀과 뒤섞여 악취가 코를 찌른다. 하산지로 돌아오자마자 도마치계곡 하류로 뛰어가 몸을 내던진다. 시원한 계곡물에 찌든 땀과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겨 내린다. 계곡에 누워 이동갈비 먹을 생각을 하니 나른함이 가시고 군침이 돈다.

하산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박기완·성예진씨.

산행길잡이

계곡에서는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고 능선에 오르면 잡힌다. 우천 시 물살이 거세며 협곡이라 대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수량이 적을 때는 계곡에 빠지지 않고 산행할 수 있다. 등산로가 없고 미끄러운 바위가 많다. 비 예보가 있을

때는 산행을 금한다. 초보자는 혼자 산행하지 않는 게 좋다.

산행은 도마치계곡 유원지에서 시작한다. 도마치 캠핑장으로 들어서지 말고 초록색 펜스가 있는 왼쪽 백운계곡 캠핑장으로 들어선다. 다리가 나오는데 건너자마자 우회전한다. 흙길을 50m 정도 걸으면 오른쪽에 계곡으로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계곡을 그대로 따라간다. 300m 지점 오른쪽에 짧은 굴다리가 있다. 굴다리를 통과하자마자 오른쪽으로 오르면 임도다.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민가 몇 채가 나오고 시멘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지나면 무너진 출렁다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임도가 없어 길을 개척하며 가야 한다.

무너진 출렁다리에서 1km 지점에 도마치계곡과 가리산 지류계곡이 합류한다. 오른쪽 지류계곡으로 들어선다. 지류계곡에는 길이 없고 미끄러운 바위가 많다. 지류계곡 2km 지점에서 오른쪽 골로 치고 올라 가리산 능선에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는 사면은 가파르고 흙이 무너져 내린다. 1.5km 지점에서 오르면 산행을 단축할 수 있다.

능선길은 뚜렷하고 표지기가 여럿 있다. 가리산으로 오르기 직전 능선 왼편에 표지기가 여럿 걸린 삼거리가 있다. 하산하기 위해서 가리산 정상을 올랐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정상에 오르기 전 로프가 있는 암릉 구간이 짧게 있다. 바위를 타고 오르다보면 조망이 없는 가리산 동봉에 이른다. 동봉에서 짧게 내려간 뒤 오르면 가리산 서봉이다. 서봉 정상에는 국가지점번호 말뚝이 있다.

표지기가 걸린 곳으로 되돌아간다. 하산길에는 희미한 등산로가 있다. 능선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돌우물이 있고 장뇌삼 재배지 출입금지 푯말이 곳곳에 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등산로는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중간에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보가 설치된 계곡 옆길로 가다보면 넓은 공터가 나오며 산행은 끝난다.

교통

일동버스터미널에서 버스(3, 3-1, 7-1, 7-2, 12, 138-5번)를 타고 도평4리에 내리면 된다. 시간은 약 30분 소요된다. 자가용 차량을 타고 이동할 경우 갓길에 주차할 곳이 있다. 일동에서 택시를 이용할 경우 요금은 2만 원 내외이다. 문의 이동콜택시 031-531-2114, 일동택시부 031-532-4070.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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