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건국·자유민주주의·남침’ 빠진 교과서, 이대로 놔둘 건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2. 9. 19. 03: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의 문화 지체가 심각하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의 최근 지적대로 그들은 아직도 낡은 수정주의에 집착하고 있다. 자칭 ‘진보 세력’의 시대착오와 현실 왜곡은 뿌리가 깊다. 일례로 1980년대 후반 한국 지식계를 휩쓸었던 사회 구성체 논쟁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이 논쟁은 대한민국 체제 전복과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소위 ‘민중·민주 세력’이 이끌었다. ‘반미 구국’ 투쟁이 급선무라 여겼던 민족 해방(NL) 세력은 당시 대한민국이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라 외쳐댔고, 인민 해방을 표방했던 민중 민주(PD) 세력은 “신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라 우겨댔다.

한국사 교과서 자료 사진. /연합뉴스

돌이켜 보면 그 논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끼워 맞춰서 한국 현실을 왜곡한 좌파 지식인들의 관념 유희였다. 현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가상 현실의 이념적 판타지였다. 그들 주장과는 정반대로 당시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웅비하며 과학기술 혁신에 주력하던 민간 주도의 견실한 자본주의 독립국가였다.

구소련 붕괴 이후 그 허망한 논쟁은 일단 막을 내렸는데, 지성과 양심이 방심하는 사이 ‘어제의 용사들’이 한국의 역사학계를 점령한 듯하다. 아니라면 어떻게 한국사 교과서에서 건국, 자유민주주의, 남침을 언급조차 안 하는가? 이 세 용어는 한국 현대사의 키워드다. 영어권 대학의 거의 모든 교과서는 바로 그 세 용어를 강조해서 한국 현대사를 서술한다. 반면 한국의 교과서 편찬자들은 그 중요한 핵심어 사용을 극구 꺼린다. 학계의 좌편향이 빚어낸 개념적 혼란이다.

첫째,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성립이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일 뿐이라 강변한다. 일부는 대한민국이 1919년 상해에서 이미 건국되었다는 비역사적 궤변을 펼친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민·영토·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이국 소재의 망명정부였으며, 총선거로 다수 국민의 승인을 얻는 합법적 절차도 거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그러한 망명정부 수립은 그 자체로 건국이 아니라 건국 주비(籌備)의 제1보에 불과하다.

오늘날 중국에서 건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사건을 이른다. 1981년 중국 공산당은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는데, 이때 건국 기점은 1949년 10월 1일이다. 바로 그날 국가의 3요소를 갖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들은 모두 1949년 10월 1일을 건국의 국경일로 인정하는데, 한국 학자들은 왜 1948년 8월 15일 건국 사실을 부정하는가?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수치스러운가?

둘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다. 자유주의는 보편적 인권, 국민의 기본권, 시장경제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적 의사의 수렴 과정과 권력 창출의 민주적 절차를 밝힌 제도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소수를 억압하는 다수 독재,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그 때문에 1948년 제헌 국회는 근대 입헌주의 전통에 따라 보편 인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헌법에 명기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은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다.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고선 한국의 건국 과정을 정확하게 서술할 수 없다.

셋째, 6·25전쟁은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밀약에 따른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남침, 곧 대남 침략 전쟁이었다. 해방 공간으로 그 기원을 소급하는 수정주의 음모설은 구소련 비밀 문서 공개로 벌써 무너졌다. 제대로 된 교과서는 최신 논의까지 반영해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야만 한다. 6·25전쟁의 역사에서 침략 주체를 명백히 밝혀 남침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부작위에 따른 허위 선전이 되고 만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은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하며 진화해왔지만,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수구의 진지전을 펼치고 있다. 정보 혁명의 시대,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꼰대들의 교과서는 대체 누구를 위한 변명인가? 그들의 진부한 역사관은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사상투쟁 없인 쉬이 못 넘을 꽤 높은 장애물이다. 이제 열린 사상의 시장에서 깨어 있는 시민들이 진취적으로 기록 투쟁에 나설 때다.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편향된 역사가는 편향된 역사밖에 쓸 수 없다.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공산 전체주의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새롭게 써야 한다. 모름지기 현대사는 우리 모두의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