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 1박2일 해맞이 백패킹 | 복계산~복주산 종주 르포] 복된 햇살이 묵언의 하얀 능선을 비추니

신준범 기자 2022. 9. 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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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이 머문 복계산과 한북정맥 복주산 잇는 19km 흰 산 제대로 밟기
복계산 정상의 상고대 너머로 듬직한 한북정맥 줄기가 흘러간다. 갈 수는 없고 볼 수만 있는 민통선 안의 대성산이 정면으로 솟았다.

김시습이 이곳에 처음 왔던 날도 이랬을까.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매월당 김시습은 방랑의 길을 택했다. 이 여정 한편에 철원 복계산이 있다. 지금도 이토록 깊고 고요한 산인데, 560년 전에는 얼마나 더 깊은 오지였을까. 절망에 사로잡혀, 속세를 잊을 만큼 깊은 이곳 복계산에서 안도감을 느껴 은거했는지도 모른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 철원으로 갔다. 1052.7m의 복계산 정상에서 자고, 다음날 14km를 종주해 복주산까지 갈 계획이었다. 동장군과의 피할 수 없는 정면승부, 게다가 험준한 한북정맥 종주까지 모처럼 제대로 근육이 뜨거워지게 생겼다. 만만찮은 산행에 함께한 이는 젊은 백패커인 이재승, 민미정, 고영분씨다.

수피령에서 복주산으로 이어진 한북정맥 철원·화천 구간.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등산객이 적은 탓에 조용한 겨울 능선을 독차지할 수 있다.

복 복福자에 계수나무 계桂자를 쓰지만 계수나무는 없다. 굴참과 밤나무, 드문드문 소나무만 보일 뿐 달콤한 향이 나는 계수나무 낙엽은 없다. 90%가 이용하는 매월폭포 코스 대신 매월대 코스를 택했다. 매월대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짓고 은거했다는 김시습의 흔적을 좇기 위해서다.

난처하다. 매월대 능선으로 붙는 이정표가 없었는데 진행하다 보니 매월폭포 방향이다. 다시 되돌아가 샅샅이 뒤져 희미한 매월대 갈림길을 찾아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윗길이 위험해 매월대 방면 초입 이정표를 모두 철거했다고 한다.

덕구암장 동굴 옆으로 이어진 매월대 능선길. 거친 바윗길이 많아 사고 위험이 있어 군청에서 초입 이정표를 모두 철거했다.

40m의 바위벽이 김시습의 절개처럼 도도하게 솟았다. 어릴 적부터 명석해 신동이라 불리며 이름 떨쳤던 그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하자 통분하여 책을 모두 불태우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설잠雪岑(눈의 봉우리)이었다.

산꾼들의 발걸음 멈춰 세운 건 왕릉처럼 단단한 10m 높이의 바위굴이다. 깊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패어 있고 마당처럼 평탄한 터가 있어 아늑하다. 매월대 아래에 이보다 더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매월당의 흔적을 가늠해 보지만 지금은 벽에 붙은 볼트만이 '덕구암장'임을 알려 준다.

복계산 명물 진돗개 덕구

1082m봉에서 복주산으로 이어진 임도길. 오르내림이 적어 모처럼 빠르게 속도 낼 수 있는 구간이다.

'덕구'는 복계산의 명물로 통했던 진돗개다. 2000년쯤 산 입구의 매점에서 기르던 개 덕구는 가게를 찾은 등산인의 냄새를 맡아보고 마음에 들면 산행가이드를 해주었다.

정상까지 길잡이를 해주는 건 기본이고, 하루에 두 번 정상에 오를 때도 있었다. 덕구는 당시 암장을 개척 중이던 서울 태백산악회원들을 잘 따랐다. 클라이밍 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2002년 매점 주인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개 도둑이 훔쳐갔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납치를 당한 것이다. 태백산악회는 석굴암장이라 부르던 바위를 덕구를 기리는 마음으로 덕구암장이라 바꿨다. 덕구가 사라진 후 아내격인 깜순이가 산행가이드를 했으나 역시 도둑맞았다고 한다.

한북정맥 주능선 암릉구간 우회길. 복계산 정상에서 900m봉까지는 능선을 우회하는 길이 많다.

인터넷 포털 지도에도 뻔히 등산로가 표시된 코스라 이렇게 험할 줄 몰랐다. 더구나 20kg이 넘는 야영배낭을 메고 오르는 것은 미련한 도전이었다. 8m 암릉의 고정로프 구간을 필두로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위태로운 바위가 유격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바위를 잡고 올라가다 보면 배낭 헤드가 나뭇가지에 걸려 몸의 균형이 깨어지기 십상이었다. 산악회 대장이었다면 "왜 이런 길을 택했냐"고 몇 년은 두고두고 욕먹을 상황이었지만, 백패킹과 암릉산행 전문가인 일행 덕분에 "큰 배낭 메고 가기엔 빡세네요"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방향에 따라 눈길과 마른 낙엽길이 번갈아 나온다.

매월대 상단에 올라섰지만 너른 전망 터나 시원한 경치는 없었다.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잊을 만하면 주의를 요하는 바윗길이 나와 속도를 내기 어렵다. 결국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먼저 정상에 도착해 촬영 준비를 마친 김영선 사진기자가 다급하게 우리를 불렀다.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앵글에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마라톤 결승지점을 통과하듯 헐떡이며 정상에 닿자, 이토록 부드러운 세상이라니! 세상의 모든 보석이 용광로 속에 잠기는 것 마냥 아리따운 빛을 뿌리며 노을이 잠기고 있었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찰나의 시간이 깜짝 마술처럼 신비롭게 지나갔다.

눈밭으로 변한 헬기장에 배낭을 풀자, 땀이 식기도 전에 얼음으로 된 칼바람이 찔러온다. 평소 박지 않던 펙까지 꼼꼼히 박아 돌풍에 텐트가 날리지 않도록 한다. 좁은 쉘터 안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먹는 소박한 저녁 시간. 맹렬한 추위 속에서 더 끈끈해지는 정을 느낀다.

매월대 능선에서 가장 까다로운 바윗길. 몸이 옆으로 돌아가는 트래버스 오름 구간이라 고정로프에 완전히 체중을 실어 일어나야 한다.

밤의 추위는 새발의 피였다. 몸이 침낭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지만 꾸역꾸역 밖으로 나와, 밤에서 낮으로 변하는 두 번째 마술을 목격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압도적인 어둠이 미세한 빛의 기운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연의 대서사시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웅장한 장면, 절망한 것들이 서서히 날아오르는 시간이다.

매월당도 해돋이를 보며 힘을 얻었을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이 죽자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때, 초연히 나서 찢어진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굳은 심지를 복계산에서 다졌는지도 모른다.

곱빼기 복 받으러 가는 험한 길

복계산 정상의 장엄한 해돋이. 겨울 상고대와 어우러진 일출은 풍경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큼직한 흑곰처럼 솟은 민통선의 대성산이 가깝다. 대성산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한북정맥 종주에 나선다. 지평선 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가야 할 복주산은 멀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에 충실하면 금방 다가올 것을 알고 있기에 등산화 끈을 질끈 묶고 스패츠를 꼼꼼히 체결한다.

복계산에서 복주산으로 이어진 산길은 능선이 뚜렷하고 간간이 이정표가 있어 길찾기 쉬운 편이다.

초반 능선은 거칠어 등산로는 능선을 우회하는 구간이 대부분이다. 낙엽의 바다와 빙판길, 눈길이 번갈아 등장한다. 종일 걸어도 산은 조용하다. 사람도 없고, 새들의 지저귐도 없고, 마른 가지와 얼어붙은 길, 바람 소리뿐. 화려한 바위도 시원한 전망대도 없이 고저의 파도만 치는 수수한 능선, 모두가 잠든 세상에 홀로 깨어 평소 잊고 살았던 욕망 너머의 본질을 찾아 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벙커와 통신용 삐삐선이 계속 나타나 군사지역임을 실감한다. 거리는 멀어도 이름 난 산은 없어 941.7m봉, 950m봉처럼 높이가 이름이 된 무명봉을 연이어 지나친다. 봉우리 하나씩 제치는 맛도 종주산행 특유의 재미다.

복주산 정상은 좁지만 남쪽으로 광활한 경치가 펼쳐진다.

칼로 쪼갠 듯한 바위 앞에 모처럼 벤치가 있다. 허나 피부가 드러난 곳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칼바람 때문에 쉴 수 없다. 겨울 철원의 하늘은 파랑의 농도가 달라,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추위로 압박해 온다. 1082m봉을 지나자 임도가 나타나 순백의 눈길로 안내한다. 쌍봉으로 솟은 복주산伏主山이 눈앞이다. 한자의 의미와 달리 복주산은 옛날 하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 이곳 산꼭대기만 복주깨(주발 뚜껑의 강원도 사투리)만큼 남았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시간은 오후 4시를 넘겨 벌써 해넘이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초조함을 모르는 복주산은 뾰족한 산세와 갑옷 같은 바위를 보여 주며 힘자랑을 하고 있다. 끝판 대장답다. 지나온 봉우리들과 난이도가 다르다. 얼어붙은 바윗길을 고정로프를 붙잡고 거친 입김을 토해내며 마침내 이번 산행의 최고 고도인 1,152m에 오른다.

매월대 능선 산행이 예상보다 길었던 탓에 복계산 노을이 끝날 무렵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의외로 좁다. 11년 전 한북정맥을 종주한 적 있지만 모든 게 새롭다. 경기도 최고봉 화악산을 비롯해 한북정맥 최고봉 국망봉에 이르기까지 억센 산들이 순둥이인 척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다.

빠르게 고도를 내려 보지만 야간산행을 피할 순 없다. 어두컴컴한 하오현에서 임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소음으로 치부되던 차 소리가 반갑다. 복계산의 복과 복주산의 복까지 한방에 받은 탓에, 신묘한 힘이 안에서 불끈 솟구치는 것만 같다.

복계산·복주산

1,052.7m 1,152m

강원 철원시 근남면, 화천군 상서면‧사내면

산행 거리

19km

산행 시간

1일차 3시간 2일차 7시간

산행 난이도

상(겨울 철원 1000고지 능선 1박2일 산행)

산행 길잡이

첩첩산중 설경의 복계산 정상 일출은 어느 산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그러나 추위가 매섭기로 유명한 철원의 산을 오르려면 보온 장비와 운행 장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최단거리로 올라 복계산 일출을 맞고 싶다면 수피령에서 오르는 것이 더 빠르다.

매월대 코스는 큰 볼거리가 없고 까다로운 바윗길이 있어, 야영 배낭을 메고 오르는 건 무리이므로 매월폭포 코스로 올라야 한다. 복계산만 산행할 경우 매월폭포 방면으로 올라 남쪽으로 종주해 '4지점'에서 지능선과 계곡을 따라 원점회귀할 수 있다. 이 코스 또한 5시간 정도 걸리는 만만히 볼 수 없는 코스다.

정맥답게 표지기가 많고 능선이 또렷하고 산길이 선명해 길찾기는 쉬운 편이다. 복계산에는 갈림길이 있는 기점마다 '1지점·2지점' 등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중간 탈출로는 벙커가 있는 1082m봉에서 임도를 따라 화천으로 가는 길, 복주산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초보자는 종주보다 산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좋다. 야영하기 좋은 장소는 복계산 정상과 950m봉, 1082m봉이 있으며, 특히 복계산 정상 헬기장은 해돋이와 해넘이가 아름다운 명소다. 능선상의 샘터는 없다. 겨울 장거리 산행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도전할 만하다.

교통(지역번호 033)

복계산 매월대는 버스로 접근 시 철원 근남면 와수리로 가서, 잠곡리행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와수리행 버스가 20~30분 간격(06:00~20:50)으로 운행한다. 와수리에서는 매월대폭포 정류장을 거치는 농어촌버스가 1일 4회(07:00, 11:00, 15:30, 17:30) 운행한다. 문의 철원 와수콜택시(458-8866, 458-7766).

하산지인 하오현 남쪽에서는 2km를 도로 따라 남쪽으로 걸어야 광덕4리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1일 5회(05:50~18:30) 운행하는 화천 농어촌버스를 타고 사창리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면, 동서울과 춘천행 버스가 1시간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광덕4리 버스정류장에서 사창리까지 8km로 가깝다. 문의 화천 사창리콜택시(441-3333, 441-4117).

숙식(지역번호 033)

복계산 매월대 입구에 매월산장(458-6719), 통큰폭포산장(458-0880)이 있다. 송어전문점으로 매월폭포가든(458-4645)과 대성송어횟집(458-5400), 생수양어장(458-1205)이 있다. 와수리와 서면사무소 일대에 식당이 밀집해 있다. 하오터널 북쪽의 복주산자연휴양림(458-9426·홈페이지 huyang.go.kr)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하산지점인 광덕리 일대에 갓바위산장(441-1950), 화천화이트힐펜션(010-6488-2742), 광덕그린농원(441-26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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