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봉달호 '힘들 땐 참치 마요' 저자 2022. 9. 17.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 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일러스트=김영석

여정이는 고3이었다. 고교생을 편의점 알바생으로 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하고, 야간 근무는 시킬 수 없고, 책임감이 부족해 갑자기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선입견이나 경험칙으로 미성년자 고용은 꺼리게 된다. 나도 그랬다. 알바 모집 공고를 내고 “미성년자도 되나요?”라는 문의 전화가 오면 단호히 끊었다. 종이 아까우니 이력서도 가져오지 말라 했다. 여정이는 막무가내로 찾아왔다. 지금껏 편의점을 10년 운영하는 동안 유일하게 채용한 미성년자였다.

“왜 이 일을 하려고 그래?” 하는 질문에 여정이 대답은 “아빠 생일 선물 사려고요”였다. 효녀 심청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부모 선물 사려고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모 된 처지에서 “네 부모도 그걸 바랄까?” 묻고 싶었지만 꼰대 같아 그만뒀다. “그럼 선물 살 돈만 모으면 그만두겠네?”라고도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도 꿀꺽 삼켰다. 여정이를 채용한 건 내가 후덕하고 자애로운 점주여서가 아니라 당장 오후 알바를 채워 넣어야 할 긴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한 달 일하고 그만둬도 어쩔 수 없지 뭐. 다음 날 여정이는 어머니 명의로 된 동의서를 들고 출근했다.

문제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밤새워 근무하고 낮밤이 바뀐 잠을 자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다짜고짜 거친 목소리가 고막을 깨웠다. “왜 남의 귀한 자식을 일을 시키고 그러쇼!” 여정이 아빠였다. 내가 억지로 권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 동의서도 받았다고 했더니 ‘이놈의 여편네’ 어쩌고 하는 욕설이 이어졌다. 솔직히 똥 밟았구나 싶었다. 당장이라도 뛰어올 것처럼 격렬히 퍼붓던 남자는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시간을 묻더니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쇼” 하고는 끊었다. 어차피 편의점에서 꼼짝 못 하는 신세인데 어딜 가겠나.

여정이 아빠는 저녁에 찾아왔다. 시비를 걸어야겠다 작정한 사람 표정이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여정이를 조금 부풀려놓으면 저렇게 되겠다 싶을 정도로 얼굴이 붕어빵이었다. 알아볼 수 있는 일이 있고, 느닷없는 일이 있다. 예상과 달리 여정이 아빠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기서 일은 잘했소?” 밉상 짓 하는 손님은 없었는지, 그럴 때마다 여정이는 꿋꿋했는지, 다른 알바가 괴롭히는 일은 없었는지 등등을 툭툭거리며 물었다. 갑작스레 담임교사가 된 기분으로 답했다. “요즘 드물게 성실한 아이입니다. 자식 교육을 참 잘하셨습니다.” 남자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흘렀다. 겸연쩍었는지 어색한 당부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앞으로는 동의서를 받아와도 부모 양쪽한테 다 확인을 해보쇼.”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미성년자를 쓸 생각이 없으니까요.

여정이에 대한 평가는 과장은 있었지만 전혀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수준으로 일하는 친구였다. 근무 중에 계산대 옆에 휴대폰을 세워놓고 시종 웹툰만 본다는 점만 빼고. 물론 여정이 아빠에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님. 곧 생일이시라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소?” “여정이가 면접 볼 때, 아빠 생일 선물 사려고 일한다고 해서요.” 이런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랬더니 남자의 눈망울에서 빙그르르 눈물이 돋고… 하는 식의 소설 같은 이야기도 전개되지 않았다. 여정이에게는 바로 급여를 정산해줬고, 그것으로 아빠 선물을 샀는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을 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상관할 바 아니고. 은행 계좌 번호 하나 달랑 남기고 난데없이 그만두는 다른 알바들과 달리 여정이는 정중히 사과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알바를 그만둔 뒤로도 서너 번쯤 손님으로 찾아왔다. 내 섭섭했던 마음도 그것으로 깨끗이 지웠다. 막힘없이 시원시원하다는 것이 여정이 특징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요즘 애들 문제 있다”는 말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줄곧 하시던 말씀이고 5000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도 나오는 말이라는데, 요즘 애들이라고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태풍으로 제주와 영남 지방이 큰 피해를 보고 특히 포항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빼려다 안타까운 일을 당한 사연이 전해졌다. 물이 차오르는 지하에 고립된 엄마는 “나는 괜찮으니 너라도 살아라” 하고 중학생 아들을 입구 쪽으로 떠밀었고, 아들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는 소식에 울컥하며 문득 여정이가 떠오른 것은 좀 별스러운 기억의 연결 고리였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부모가 자식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은 언제 어디 누구나 다르지 않다. 그 마음을 수시로 꺼내 보여주느냐 꼭 껴안고 있느냐만 다를 뿐.

어떤 말인들 위로가 되랴만 포항 소식을 들으며 그 어머니가 더 굳건해지시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셨다. 자식 교육을 잘하셨다. 이 말밖에 어떤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착한 아들은 하늘 좋은 곳에 머물 테니 의연히 살아가시라는 위로밖에 달리 드릴 말씀이 없다. 모두의 자식이고 모두의 부모다. 어머니 아버지,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