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 뒤에도 만나자" 논산훈련소 동기들과 64년간 교류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16〉 별난 모임 ‘86회’
당시 대학생은 3학년 때 징집 영장을 받았다. 재학 중이나 졸업 뒤 사병으로 입대하거나, 학교를 마치고 간부후보생으로 선발돼 장교로 병역을 마치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나 행정과 시험을 볼 가정형편도 아니었고, 합격할 자신도 없어 재학 중 입대하기로 했다.
그해 11월 11일 서울법대 동기인 박종덕과 강상렬을 용산역에서 만나 함께 입영 열차에 올랐다. 역 일대는 입대 장정과 환송 가족으로 인산인해였다. 휴전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아서였는지,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아들이나 형제를 환송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당시 서울법대는 법학과와 행정학과가 각각 150명으로, 동기라도 서로 모르기 일쑤였다. 나는 청량리에, 상렬이는 이문동에 각각 살면서 자주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였지만 종덕이와 상덕이는 이날 처음으로 서로 인사했다.
종덕이는 나의 고교 동기였고, 상렬이는 경북사대부고 출신이었다. 우리 셋은 같은 자리에 앉아 논산으로 향했으며, 내무반에서 훈련소를 떠날 때까지 한 이불과 요를 썼고 항상 함께 행동했다.
논산훈련소에 도착해 군복으로 갈아입고 신체검사를 거쳐 11월 13일 군번을 받았다. ‘0017091’ 이른바 “빵빵” 군번이다. 일반 병은 ‘1043…’으로시작됐지만, 재학 중 입대한 우리는 ‘00…’으로 시작됐고, 복무 기간은 1년 6개월이었다. 그 대신 최전방 근무였다.
몇몇 회원은 자진 재입소 1박2일 훈련도
우리는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2개월간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추억도 많았다. 주말에 가족이 면회를 오면 여러 명이 따라 나가 점심을 함께하고 돌아오거나, 훈련 도중 교관의 눈을 피해 훈련소 주변에 음식을 들고 와서 파는 ‘이동 주보’에서 간식을 사서 나눠 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성탄절엔 성가대를 편성해 이웃 막사를 돌기도 했다.
우리는 훈련을 마칠 무렵 ‘군 복무 뒤에도 서로 만나자’고 의견을 모았고, ‘8중대 6소대’에서 딴 ‘86회’를 결성했다. 각자의 약력과 주소·좌우명을 적은 ‘비망록’을 인쇄해 나눠 가졌다. 전방에 배치되더라도 외출이나 휴가를 나오면 무조건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종각 옆 ‘자이언트 다방’에 들리거나 메모를 남기자고 약속했다.
훈련을 마친 우리는 대부분 전방에 배치됐다. 나는 강원도 철원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의 민통선 안에 주둔한 28사단 268포병대대(2021년 11월 임무해제 뒤 통폐합)의 포수로 1년 4개월간 복무했다.
처음 5~6개월은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한겨울에 눈 덮인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었고, 호된 기합도 받았다. 그 뒤 대대본부에서 행정을 보다가 60년 5월 일등병으로 제대했다.
86회 회원들은 그해 11월 11일 입대일을 맞아 서울 중구의 한식집 용금옥에서 단합대회를 열었다. 그 뒤 매년 같은 날 모였고, 각자 결혼하면서 부부동반으로도 만났다.
그동안 많은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났다. 신중현(서울상대·제일은)과 함께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1년 전인 2021년 7월 30일 고인이 됐다. 지난 7월 17일엔 두 달 전까지 모임에 나왔던 초대회장 박해용(서울상대)마저 타계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8~9명은 모였는데 앞으로 몇 명이나 나올지 모르겠다.
5·16 직후인 61년 9월 대학을 졸업하게 됐지만, 나는 무엇보다 취직이 급했다. 가장 먼저 나온 직원모집 공고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낸 것이었다. 서울법대 동기인 이용권과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찾아갔지만 9월 졸업예정자는 응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경복고 출신인 ‘머리 좋은’ 이용권은 나보다 세 살 많았지만 절친한 친구였다.
7월 초 공보부 직원채용 공고가 둘째로 발표됐다. 행정 요원 30명과 국립영화제작소, KBS(당시는 국영방송) 요원 등 100명을 모집했다. 이번엔 9월 졸업예정자도 응시할 수 있어 이용권과 나는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10대 1의 경쟁률이었지만 다행히 둘 다 합격했다. 8월 4일 기획조정관실의 촉탁으로 발령받았고, 9월 24일 ‘행정주사보’로 정규직 공무원이 됐다. 오랜 기간 문화공보부에서 함께 일했던 이용권도 지난 2020년 11월 내 곁을 떠나갔다.
공보부에 들어간 건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만약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응시가 가능했고, 그래서 합격했더라면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로 발령받아 ‘유능한 수사관’으로 근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탐정소설의 귀재로 평가받았던 김래성의 작품을 초등학생 때부터 탐독했고,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과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스』 시리즈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공보부의 채용 공고가 나오지 않았다면 9월 졸업까지 기다렸다가 당시 최고의 ‘선망직업’이었던 국책은행이나 시중은행에 취업했을 수도 있다.
그동안 공보부의 기능은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48년 7월 17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공보처로 출범했다가 55년 2월 7일 대통령 직속의 공보실로 개편됐다. 4·19가 터지고 60년 7월 1일 내각책임제로 바뀌면서 국무총리 산하 국무원사무처의 공보국과 방송관리국으로 축소됐다가, 5·16 뒤인 61년 6월 22일 공보부로 승격됐다. 그 뒤 68년 7월 24일 문화공보부를 거쳐 2008년 2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로 확대됐다.
일 가르쳐준 김기완 조정관, 성 김의 부친
기획조정관실(63년 12월 16일 기획관리실로 변경)에 근무하면서 한기욱·홍태환 사무관으로부터 일을 배웠지만, 특히 오재경 장관과 김기완 조정관의 지시에 따라 거의 매일 새로운 계획서를 작성하고, 을지로 입구의 인쇄소에서 밤새워 공판 인쇄한 다음 제본해 보고하는 ‘고된 훈련’을 거쳤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를 정도로 정신없이 일했다.
‘신라문화제 창설’ ‘향토문화 공로상 제정’ ‘대종상 창설’ ‘62 파리 민속예술제 참가계획’ ‘신문용지의 관세율 인하 계획’ ‘16밀리 극영화 제작보급 계획’ ‘영화제작기구 개편(안)’ ‘방송기구 개편(안)’ 등 수많은 계획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실현된 것도 있었지만 폐기된 것도 많았다.
이처럼 계획서를 만들어 수정하고, 원고 쓰고 보고자료 만들며, 인쇄소에서 밤새워 교정보고 인쇄하는 등 좌고우면하지 않고 우직하게 일하면서 30년간의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오재경 장관과 김기완 조정관으로부터 기획능력을 배울 수 있었고, 공무원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자질과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처럼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기회와 만나게 된다. 그 기회들은 선택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인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간에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지혜와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이 지금까지 걸어 온 내 삶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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