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마음 전하고 싶었다"..1280쪽 '고병권의 자본 강의' 마무리[인터뷰전문]

김종목 기자 2022. 9. 1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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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병권의 자본 강의>(천년의상상)를 두고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지난달 2일 ‘합법적으로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자본주의 체제의 범죄성을 비판하다’라는 제목으로 먼저 인터뷰 기사를 냈다.


☞ [인터뷰]합법적으로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자본주의 체제의 범죄성을 비판하다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208021812001

1280쪽짜리 책에 관한 인터뷰 요약이라 저자 뜻을 온전히 전하기 힘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기사 중간중간 기울인 돋움체 부분은 <고병권의 자본 강의> 중 인터뷰 관련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집필 주안점은.

“서구에 컴패니언북(Companion Book, 고전을 자세히 안내하는 일종의 가이드 북)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개 개론서들 같은 걸 모아놓은 것이다. 진짜 컴패니언북을 만들고 싶었다. 보통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책들은 요약본이 많다. 반대로 가려고 생각했다. 더 늘려서 <자본>보다 훨씬 두꺼운 책을 쓰려고 했다. 더 음미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제 책을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라 <자본>을 읽으라고 쓴 책이다. 혼자 산행에 오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산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둘이 어딘가에 걸터앉아 상대방이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하는데, 너 생각도 궁금해’ 할 때 그 생각을 들려줄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여겼다. 가급적 모든 단락에 관해 썼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물어볼지 모르니까. 책이 굉장히 길어지기도 했다.”

<자본>의 공부길에 나선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지금 <자본>을 집어든 당신은 아마도 소수일 겁니다. 한 사람이어도 좋습니다. 직접 이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과 걷겠습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왕보다 고귀하고 부자보다 풍요롭습니다.

- 여러 분야의 지식을 총동원한 듯하다. <성경>부터 <허삼관 매혈기>까지 인용했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마르크스 학자 이론에다 한국 노동의 현실 문제까지 다뤘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중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아우슈비츠 정문에 새겨진 구절에 관한 인용도 떠오른다.

아우슈비츠의 체험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비유나 비교가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럼에도 강제노동수용소로서 아우슈비츠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기본 성격을 선명하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극단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본문에서 보겠지만, 실제로 마르크스는 19세기 공장(factory)의 원형을 18세기 구빈원(workhouse)에서 찾고 있는데, 원어가 말해주듯 구빈원은 ‘노동의 집’ 즉 노동수용소였습니다. 강제노역을 통해 빈민과 부랑인의 나태한 심성을 근절하겠다며 만든 시설이지요. 시설 제안자들은 노역을 ‘치료’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이 너희를 치유하리라’였던 겁니다

“일부러 때려 넣은 건 아니다. <허삼관 매혈기>도 그렇고, 레비 책도 예전 <자본>의 맥락에서 읽지 않았다. 이번에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 같다. 소처럼 되새김질해서 여러 맛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 참고문헌도 괴테나 실러, 단테 같은 문학 텍스트가 많다. 마르크스도 <성경>을 인용했다. 철학 인용도 많다. 이 책이 정확히 말하면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대학 때 ‘정치경제학 개론’이나 ‘정치경제학 원론’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마르크스가 한 일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말을 <자본>에만 쓴 게 아니고 모든 책에 썼다. 경제학 비판 책이지만, 마르크스의 시선은 경제학 이론에만 한정돼 있지 않았다. 신학, 문학, 철학 텍스트를 녹였는데 그게 옳다고 본다.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녹아 있다. 고상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고상한 책은 무슨 뜻인가.

“고상하다는 말을 자칫 잘못 쓸 수도 있는데, 풍요롭게 삶을 보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 우리 삶이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충분히 고귀한 사람들이고, 우리 삶이 더 고귀해야 한다’ 같은 함의를 담은 책이다. ‘(자본가가) 내 돈을 얼마 뺏어갔느냐’도 중요하고, 그것도 지적은 해야 한다. 사람을 끌어들여서 노예적인 일을 시키는 그런 삶을 비판할 때, 시장에서 통용되는 가치(value)에 대한 평가 방식인 이벨류에이션(evaluation)이 얼마나 특이한지도 봐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시작부터 우리가 어떤 걸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지, 어떤 행동과 어떤 생산을 할 때 어떤 소비들이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두고, 많은 음미할 거리를 던져준다.”

고병권 뒤 책장엔 최근 1권으로 묶어 출간한 <고병권의 자본 강의>와 격월간으로 낸 12권이 꽂혀 있다. 김종목 기자

- 개인적으로 새로운 저술 경험 아닌가.

“많은 사람이 읽고 나서 쓴다고 하지만 쓰는 것은 또 새로 읽는 방식이더라. <자본>의 언어로 제 삶을 돌아보고 정리한 듯하다.”

- 김수행과 강신준의 <자본> 번역본을 주로 두고 읽고 쓴 듯하다. 독일어 원본도 참조했는데.

“독일어를 잘못하지만, 가급적 한국어 번역본과 대조했다. 김수행, 강신준 두 선생님의 번역이 다 훌륭하다. 책 작업 중 황선길 선생의 번역본이 나온 걸 알았다. <자본>은 그간 진짜 많이 읽었다. 이번에도 김수행, 강신주 두 선생의 번역본을 몇 차례 읽었다. 다만, 아까 문학 이야기도 했지만, 마르크스가 어떤 단어를 골랐을 때, 그때 맥락,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노동 가치설’에서 애덤 스미스는 노동을 ‘노고(toil)’와 ‘수고(trouble)’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지만, 마르크스는 생명력, 창의력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가치란 노동자에게 내재한 ‘능력’이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노동자의 소중한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책 12권이 ‘포겔프라이 프롤레타리아(vogelfreie Proletarier)’인데, 마르크스는 명확하게 근대적 프롤레타리아의 원형적인 어떤 형태나 개념으로 ‘새처럼(vogel) 자유롭다(frei)’는 뜻의 ‘포겔프라이’와 ‘프롤레타리아’ 두 단어를 붙여 한 단어로 쓰는데, 김수행 선생은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강신주 선생은 ‘보호받을 길 없는’으로 번역했다. 이렇게 보면, 원형 느낌이 없어진다. 마르크스는 단어를 새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있는 단어 용법을 바꾸는 사람이구나, 창조자이기보다 변혁자에 가깝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잉여가치(Mehrwert)도 사람들이 쓰던 걸 단어를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런데 이 핵심 개념을 우리의 번역본들은 하필 ‘잉여’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잉여라는 말은 쓰고 남은 것, 부차적인 것,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게다가 사사키 마사노리(佐々木正憲)가 지적한 것처럼, 회계상에서 잉여금이란 총수입에서 지출을 빼고 남은 것인데요. 이는 총액이 주어져 있고 필요한 부분을 빼고 남은 부분이란 뜻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 크게 다릅니다. 마르크스는 전체 가치의 증대를 말하기 위해 ‘Mehrwert’라는 말을 썼으니까요(그래서 사사키는 “Mehrwert는 ‘잉여가치’라기보다 ‘증가가치’다”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잉여가치는 자본을 정의하는 핵심이고, 자본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며, <자본>에서 그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중심 개념입니다. 또한 그것은 ‘빼고 남은 부분’이라기보다 ‘더 증가한 부분’입니다. 이미 굳어버린 번역어인지라 바꿔 쓰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런 지점을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합니다.(…) 재밌는 것은 ‘자본’도 그렇지만 ‘잉여가치’도 일상어였다는 사실입니다. ‘Mehrwert’는 마르크스가 창안한 학술용어가 아닙니다. 사사키에 따르면 이 단어는 1809년에 처음 사전에 등장했습니다. 34 라틴어권에서 쓰던 ‘plus-value’라는 말을 독일어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plus-value’는 1457년 문서에 처음 나타나는데요. 16세기에는 부르주아들이 회계장부에 적는 항목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사업상의 ‘초과이익분’을 가리켰죠. 그래서 당시에는 ‘초과이익분에 대한 과세’(Impostions sur les plus-values) 같은 표현이 통용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완전히 다른 조명을 쏘여줍니다.친숙하고 일상적인 것을 아주 낯선 것으로 뒤집어놓는달까요. 말하자면 그는 창조자라기보다 전복자입니다. 외견상으로는 태양이 도는데 실상은 지구가 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이죠.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책은 역사책, 문학책 같기도 경제학책 같기도 하다. 종합적인 느낌이 든다.

“<자본>이란 책이 그런 성격이 있다. <자본>을 이해한다는 건, 돈 투자 같은 걸 이해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자본의 축적 때문에 나오는 삶의 형태가 있다.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양식이 다 연관됐다. 출근하고 일하고, 아이들 교육하는 방식들 말이다. <자본>을 이해한다는 건 자본주의적인 상품 생산양식과 부의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삶의 양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책을 또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서문 격인 1권 ‘다시 자본을 읽자’에서 <자본>이 ‘착취에 입각한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규정했다.

“계약서만 보면,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누구도 (일하라고) 총칼을 안 들이민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노동자 파업 때도 그랬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에게 ‘일하기 싫으면 하지 말지. 어차피 그거라도 받으면 이익이니까 일터에 나온 거 아니냐’ 하는 논리가 있다. (삭감된) 임금 30%를 원상 복구하라는 노동자들에게도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 이게 우리 표면의 모습이다.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능력을 발휘했는데, 대통령도 모욕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그 돈을 받으면서 왜 나와야 했을까, 왜 수요 공급이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30% 인상으로 해도 좋은데, 왜 그리 됐을까. 한국 예를 들었는데,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은 거는 그 (임금을 정하는) 법칙과 원칙, 학문 너머 구조적 비대칭성이 있다는 거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끝부분에서 ‘자본의 전제정(Despotie)’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 취업하지 않고 살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장 굶어 죽게 된 조건에서 돈을 벌려는 자본가와 살아야 하는 노동자 둘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다. 이 사회 시공간의 성격이라고 할 이런 조건들이 어떤 것인지, 이 (조건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울어진 운동장은 왜 가능한지, 이 조건들이 왜 계속 생산되는지, 누구는 왜 계속 부유하고, 왜 누구는 가난한지 같은 데 대한 질문을 보여준다. 젊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 ‘부자가 가장 많이 생겨나는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도 왜 이렇게 많이 생기나’ 하는 질문들이 맞물려 있다(엥겔스는 “국부라는 표현은 … 영국인들이 거대한 국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난한 국민임을 볼 때 적절하지 못하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과학이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과학 이전에 이걸 보기가 쉽지가 않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가가 저지른 불법에 대한 고발이 아닙니다. 이 책이 고발하는 것은 합법적 약탈입니다. 나는 이 책의 의의가 착취에 대한 과학적 해명이 아니라 착취에 입각한 과학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본>은 착취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을 비판하는 책입니다.… 자유와 평등과 공리가 화려한 조명을 받을 때 마르크스는 그 음영을 따라 부자유, 불평등, 착취의 구조를 읽어냈습니다. 상품교환의 평면을 더듬어 자본독재 내지 자본주권의 입체 구조를 읽어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왜 노동자의 주사위는 불리한 눈만을 내놓는가. 우리는 주사위가 던져지는 공간을 읽어낸 뒤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 ‘<자본>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범죄 보고서’라고도 했다.

“마르크스가 실제로 자본(가)의 범죄성을 다루듯 썼다. 마지막이 기소문 형식이다. <자본>을 쓸 때 탈법, 위법을 저지른 자본가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임금 안 주고, 세금 떼먹고. 지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도 독점력을 활용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다. 마르크스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일어나는 범죄, 즉 말하자면 어떤 체제 안에서 법이나 룰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범죄성 문제를 지적하려 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하는 인간’(철학자)은 ‘고통받는 인간’(프롤레타리아)의 머리이고, ‘고통받는 인간’은 ‘사유하는 인간’의 심장입니다. 말하자면 신체적 고통의 정신적 번역이 사유이고, 신체의 열정에 상응하는 정신의 냉정이 비판인 셈입니다. 그러하기에 <자본>은 자신의 자리, 입장, 의지를 가진 책입니다. 자본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앎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이 우리 시대의 원칙의 불법적 적용이 아니라 합법적 적용에서 생겨난 사람들, 그 억울함을 우리 시대 법정에서는 풀 수 없고 오직 우리 시대를 법정에 세움으로써만 풀 수 있는 사람들, 이 책은 그들의 체험에 대한 요약이자 그들의 체험에서 나온 비판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바로 당신, 프롤레타이트에게 바치는 책입니다.

- 쌍용차, 한진중에 최근 대우조선해양 등에 다 적용되는 문제 같은데.

“누가 마르크스는 페이스북이나 구글의 등장을 몰랐을 거라고 한다. 당연하다. 그렇다고 19세기 면방직 공장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날 구글이나 페이스북, 대우조선이나 쌍차에서도 일어난다고 할 때 ‘옛날에 있던 일이야’라고 해선 안 된다. 자본주의에선 (착취의) 방식 즉 쥐어짜는 방식은 다르지만 쥐어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힘의 비대칭성을 갖고 있다. 여전히 노동력을 팔지 않고 살길이 없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노동자들이 농노적 예속이나 길드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 강조하는데요. 마르크스는 이 자유의 이면, 즉 어떻게 해서 다수의 사람이 노동력 판매 외에는 살길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즉 우리가 지금부터 읽어나갈 이야기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이렇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탈의 역사는 피와 불의 문자들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 <자본>이 1980년대는 ‘불온한 책’, 1990년대는 ‘낡은 책’, 그 이후엔 ‘고전’이 됐다고 적었다. <자본>의 지금 의미는.

“왜 지금 <자본>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꼭 지금이 아니고 어느 시대 읽어도 좋고, 항상 읽으면 좋은 책이다. 다만, 우리 시대를 이해하려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했듯, 우리 삶의 양식을 이해하고,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다. 지금 일자리 문제도 그렇고, 기술 변동에 기후 위기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본주의가 지금 같은 방식이나 방향으로 성장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다면, 조금 멈춘 채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 무슨 점쟁이처럼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지금 방식으로 가다 자본주의가 망하면 삶이나 세상이 절대 좋아지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는 더 처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정말 좋은 발제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로마에 대한 비유를 많이 한다. 제23장 맨 끝엔 로마 공화정 말기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도 인용했다.

“가혹한 운명이 로마인들을 괴롭히도다, 혈육 살해의 죄악이 벌어졌으니.”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인간을 먹습니다. 그야말로 혈육 살해의 죄, 동족 살해의 죄, 식인의 죄라고 할 수 있지요. 마르크스가 인용한 호라티우스의 시구는 <비방시> epode VII에 나오는 것인데요.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로마가 스스로 멸망의 길로 미친 듯 뛰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늑대나 사자들도 다른 종이 아니라면 공격하지 않는데 로마인들은 도무지 칼을 놓지 못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복자인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에 쫓기는 신세입니다. 로마인들은 저주받았습니다. 호라티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저주받은 운명은 건국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구한 레무스(Remus)의 피가 대지를 적신 후 로마는 혈육을 살해한 그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로마는 정복 전쟁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재생산된다. 귀족들의 재산인 사유지를 가지려면, 다시 정복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동족을, 인류를 살해하며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유지한 것인데, 어느 순간 불안해진 거다. 치고 나가는 게 아니라 쫓기는, 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칼을 놓자고 말하지 못한다. 놓는 순간 바로 망하니까. 호라티우스의 한탄이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지금도 계속 축적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되면, 생태적으로든 뭐든 더 견디기 어려운데, 누구도 멈추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은 여러 맥락에서는 다시 성찰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 1장(상품)이 그런 점에서 너무 좋았다. 이번에 쓰면서 느낀 건 ‘상품’이 아니라 ‘가치’에서 시작하는 거구나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대의 부가 다른 시대 부하고 너무 다르다, 이상하다고 봤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경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않는다. 반대로 사회를 망치는 일도 돈이 될 수가 있다. 환경을 망쳐도 돈을 벌 수 있다. 부가가치도 창출된다.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일을 하는데도,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세상을 망치는 일에 자원을 막 쓰게 되는 일로 이어진다. 여기서 가치가 창출되니까. 다시 거기에 돈이 투자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적인 가치 평가 방식’을 비판하고, 다시 봐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다. 소방관이나 청소부의 일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나. 어떤 상품을 과장 광고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나 차액 투자를 해서 돈을 엄청나게 가져가는 펀드 매니저보다 가치가 없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 가치 없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된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다. 어떤 일이 가치 있다라고 하는 순간 뭘 더 생산하고 뭘 덜 생산할지, 어떻게 생산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눠줄지 같은 문제와도 연동된다. 지금은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 가치가 너무 많이 부여되고,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치가 거의 분배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굉장히 놀라운 삶을 사는 사람들한테는 전혀 가치가 가지 않는다.”

근대 자본주의사회(현재 우리 사회라고 불러도좋겠습니다)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의 끊임없는 생산과 증식입니다. 사람들은 일정액의 가치를 투자하고 그렇게 해서 불어난 가치를 다시 투자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치의 증식운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대사회를 과거 사회와 구분해줍니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돈을 많이 쌓아두는 사회가 아니라 쌓아둔 돈을 계속 돌리는 사회, 그래서 돈을 계속 늘려가야만 하는 사회입니다. 가치의 증식과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인 것이죠.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는 이유는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가치증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말해 ‘자본’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본가들이 상품을 생산할 아무런 욕구도 느끼지 못할겁니다. 그들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물리적 시공간을 간명한 공식으로 표현해낸 것만큼이나 자본주의 경제의 성격 또한 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은 소비가 아니라 이윤을 위한 것이다.”

- 마르크스 문제 제기에 다 동의하는가.

“이번 책은 강력한 지지자 입장에서 썼다. 이 사람의 취지를 가급적 더 잘 설명해 보려고 했다. 다만, 고개가 갸웃해지거나 나라면 이렇게 안 쓸 텐데 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마르크스가 여성, 동물 등을 예로 든 이야기들이 그렇다. 노동 착취를 설명할 때는 동물을 곧잘 비유로 끌어들여 쓴다. <자본> 제4장 끝에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판매하고 난 뒤의 노동자를 ‘가죽을 팔고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처지의 사람’이라고 썼다. 노동자는 착취당하는 순간 여성을, 동물을 닮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다르다. 여성의 상품화 특히 성상품화는 실제 신체를 직접적으로 조작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신체 자체가 진짜 말 그대로 상품으로 팔려나간다. 노동자도 죽어간다는 표현을 쓰지만 동물은 진짜 죽는다. (존재마다) 조금씩 위기가 다르다. 어쨌든 노동자가 당하는 폭력 착취의 양상은 부분적으로 여성성, 동물성인 것인 것도 맞다. 여러 맥락을 논의해야 한다.

(마르크스는)노동자의 ‘노동력’ 판매를 여성이 ‘몸’을 판 것, 동물이 ‘가죽’을 판 것에 비유한 겁니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고 작업장에 들어가는 것은 ‘몸을 판 여성’처럼 자신의 생체에 대한 사용권을 넘긴 것이고, 상품을 생산하며 생명력을 소진하는 것은 가죽을 생산하기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처지와 노동의 성격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와 닿는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노동력의 판매와 성의 판매·가죽의 판매는 어느 선으로 딱 자를 만큼 그 경계가 선명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에서, 더 나아가 동물의 자리에서 생각한다면 이 비유는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킵니다.…똑같이 몸을 팔아 상품을 내놓는다 해도, 성이 여성에게 갖는 의미 그리고 가죽이 소에게 갖는 의미는, 일반 상품이 노동자와 맺는 관계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노동력을 판 노동자’와 ‘몸을 파는 여성’이 같을까요?…(중세 시대)가난한 여성들이 매춘과 하녀를 직업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노동과 가사노동은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었기에 얻은 직업, 다시 말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었기에 선택했던 노동이었습니다…가부장제 역사가 자본주의 역사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둘이 교차하는 곳에서 남성패권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과 관련해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패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패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한 바가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근대 가치론, 경제학을 비판한다는 얘기는 근대적 자본주의적 가치 개념을 비판하는 거다.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등의 근대) 노동가치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근대 노동가치설엔 인간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데, 마르크스는 그렇게까지(인간,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비판의 논의를) 열어주는 부분이 있다. 마르크스의 풍요에 대한 이미지도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 약간 (물건을 최대로 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지향하는) 생산력주의가 좀 있다고 할까? 마르크스가 기계에 대해 얘기할 때 보면, 풍요롭다고 말하는 게 많이 생산하는 것을 가리키는 느낌이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 이미지가 풍요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주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선전할 때 백화점에 많이 쌓아놓듯 배불리 먹을 거 잔뜩 쌓아놓지 않나. 다만, ‘기계와 대공업’에 관한 <자본> 13장에 가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10절엔 노동자만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착취를 언급한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수확을 높이는 모든 진보 또한 토 지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방식을 발전시킨다.

조금 이상한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르크스가 토지와 노동자를 ‘부의 원천’이라고 말할 때의 이 부는 자본주의적 부나 가치 개념이 아니다. 토지 즉 자연의 작용 자체는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으로 평가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한편으로 왜 중요하냐면 이대로 자본주의적 기계농을 계속 발전시키면 자연이 약탈당하면서 자연이 힘을 잃는다는, 생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책 변화를 다루는 <자본> 맥락에 맞지 않지만, 생산력을 이런 식으로 늘리면 위험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이 구절이 재미있어서 길게 늘여서 썼다. 최근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다다서재)를 봤다. 생태 책도 많이 쓴 학자다. 이 책이 일본에서도 한 40만 부 팔렸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 1권을 내고 1883년 죽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2, 3권은 완성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이 사람이 가설을 세운 게 있다. 이때 마르크스가 생태학 연구를 했고, 생태 관련 서적들을 되게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문제가 (2, 3권 집필에) 걸렸을 거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책 보도자료를 보면, 사이토 고헤이는 만년의 마르크스가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며 궁극적으로 도달하려 했던 지향점이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결론을 낸다. ‘생산력 지상주의가 마르크스주의 핵심이다’라는 150년에 걸친 오해의 산물이자,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을 모른 채 나아간 결과 생겨난 이물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부를 늘린다는 부에 대한 이미지나 우리가 풍요롭게 산다는 말이 많이 물건 만들어놓고 산다인가, 풍요에 대한 이미지가 왜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선 막 생산해서 쌓아두고 썩히고, 다른 한쪽은 굶주리는 게 풍요의 이미지인가, 부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탈성장을 고민해 봐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자본 쪽에서도 나온다. 이쪽은 ESG(환경, 사회, 기업 지배구조, 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기업에서 이대로 가면 망하게 생겼으니까, 환경 인발브먼트도 해야 되고, 소셜 저스티스도 해야 되고 거버넌스 문제도 챙겨야 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다. 어떤 CEO가 성장률을 진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더라. 나처럼 래디컬하게 본 건 아니지만, 몇 퍼센트 성장했느냐는 성장률은 경제에서 이제 빼야 한다고. 다시 돌아가면, 마르크스 자신이 동의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자신도 선뜻 나가지는 못했지만, 열어뒀던 여성, 동물, 생태, 기후 문제 등 함께 논의해볼 여러 이야기가 있다.”

- <자본> 주요 내용뿐만 아니라 당대 관련 역사도 많이 넣었다. 여러 형식을 동원했는데.

“어떻게 썼는지 지금 기억도 잘 안 난다. 어떤 느낌만 있다. 속된 말로 온갖 생쇼를 다 했다. 중간에 심지어는 희곡도 써넣고 했다. 어떻게 <자본>을 전달하지 하고 고민했다. <자본>에 런던 대형 철도 사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르크스 집필 당시 근처에 일어나는 기차 사고들을 막 뒤졌다. 그때의 기차 사고기사를 참조해 희곡으로 각색했다. 이번 책을 쓰며 정말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항상 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작업을 같이 읽어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고, 최대한 같이 해보겠다고 여겨 최선을 다했다. 이 모든 것이 제 책이다. 마르크스의 마음은 꼭 전달하고 싶었다. 제 책에 마음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그의 두뇌는 심장의 내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자유정신의 소유자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마음이 지성보다 우선한다는 뜻인데요. 나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는 마음 가는 쪽으로 가는 법이죠. 공부에도, 연애에도, 전쟁에도, 심지어 사기에도 천재가 있습니다. 마음 쓰이는 곳에 머리도 쓰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머리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요. 마르크스는 어떻게 잉여가치 개념에 도달했는가. 그는 어떻게 잉여가치가 잉여노동이라는 것을 알아냈는가. 스미스와 리카도는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는가. … 스미스와 리카도의 눈을 가린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이들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했으면서도 잉여가치가 잉여노동이라는 사실을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자본가의 이윤도 지주의 지대도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 일부를 공제한 것임을 그들 역시 감지했지만, 더는 파악하려 들지 않은 겁니다.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고 포착했으면서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마음이 없었던 거죠. 이들의 두뇌는 심장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마음의 부재가 원인인 겁니다.다. 반면에 마음이 있으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잘 봅니다. 이번 책에는 내가 <자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페이지가 들어 있습니다.

정용택 <뉴래디컬리뷰> 편집위원이 ‘맑스의 마음을 읽는 <자본> 해석의 성패’라는 서평을 ‘문화과학’에 썼다. (제 책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고 했다. 저도 의식을 안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 제 마음도 있지만 마르크스의 마음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눈’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 다른 경제학자들이 간과한 게 왜 마르크스 눈에 중요해 보였는지 말이다. 눈동자만큼 마음을 잘 드러내는 게 없다. 마음 가는 곳으로 눈동자가 막 돌아간다. 책 2장 제목이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으로 달았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어려운 책이 그러냐고 말도 안 된다고도 하지만, <자본>은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해 쓴 책이다. 당대의 노동자들이 사용할 무기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있다, 또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도 수식 하나든 단어 하나든 마르크스의 그 마음을 되게 살려보려고 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자본>의 위대함을 마르크스의 이런 눈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자본>이 탁월한 이유는 (…) [마르크스가] 흔하디흔한 상품의 ‘아주 기괴한’ 성질에 놀랐다는 데 있다. (…) 기성 경제학 체계는 평범한상품을 기괴한 것으로 보는 눈에 의해 무너진다.”

(…) 그들은 노예성을 흑인의 본성에서 찾으려 했지요. 흑인의 본성에는 노예적 근성이 있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의 문제를 사물의 본래적 속성으로 봅니다. 마치 체온을 지켜주는 외투의 속성처럼 외투의 가치도 외투에 내재하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문제가 ‘조잡한 눈(rohen Blick)’에 있다고 했습니다.

- <자본>에 대한 쉬운 해설서를 자처했는데.

“말 그대로 이제 <자본>과 같이 읽는 책이다. 독자가 단 한 사람이어도 좋다고 했는데, 한 사람이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어주겠다는 얘기니까, 항상 함께 읽고 이야기해 보라고 하고 싶다. 함께 이야기하는 책이 되면 좋겠다. <자본> 구절이 무엇인지를 두고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은 같이 삶을 고민해보는 것이라고 본다.”

- 요즘 읽거나 쓰는 책은.

“지금까지 쓴 책은 대부분이 뭘 강의한 것을 낸 것이다. 쓰고 싶은 책은 엄청 많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국가, 자본, 인간 같은 낡은 주제에 관심이 있다. 머릿속을 제일 많이 지배했고, 제일 고통받은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출구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자본> 착수 전에 ‘국가’부터 하려고 했다. 방법론 차원에서 국가를 알고 싶고, 뭔가를 쓰고 싶다. 방법 차원에서 의자를 그릴 때면 테두리를 그린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냐고 할 때도 테두리를 먼저 그린다. 국경을 그리는 것이다. 청와대가 아니라 국경을 통해서 국가에 접근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국경에 사는 사람들 혹은 난민들을 읽어내면서 국가가 무엇인지에 다가가 보겠다는 생각에 국경 공부를 좀 더 했다. 노들야학에 노들장애학궁리소가 생기면서 교장 선생님이 장애학 연구를 좀 해달라고 해서 장애 쪽으로 갔는데, 본래의 계획을 수정해서 인간을 주제로 공부를 시작하자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테두리가 뭘까 했더니 장애라는 느낌이 들었다. 국경의 난민들,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인간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인간학이나 인권이나 인간 중심주의 이 모든 것들의 테두리를 국경을 사고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인간의 국경으로서의 장애라는 문제를 시작했다. 지금은 칸트를 열심히 읽고 있다. 조금 더 나가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같은 글들을 좀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인간에 관한 여러 철학적 담론들, 정치적인 권리, 법적인 권리를 살피려 한다. 더 나아가면, 근대의 수용시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간을 장애인을, 난민을 수용 시설에 가두는 것에 관한 이야기, 동물권에 관한 이야기 등을 주제로 하려 한다. 그 형식을 탐사 보고서처럼 쓰고 싶다. 인간의 국경이 얼마나 많이 허물어져 있고, 사실은 그 인간이 나라를 이루고 있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등에 관해…”

지구는 한 덩어리의 땅입니다. 하지만 세계지도를 보면 여러 조각입니다. 지도에는 대지에 없는 선이 있습니다. 바로 국경입니다. 그러므로 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대지가 아니라 국경을 두른 영토입니다. 주권에 따라 그려진 법률적 땅이지요. 그런데 마르크스를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도는 영토를 보여줄 뿐 국경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도는 국경을 가리고 있다. 지도를 펼쳐놓으면 우리는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해서는 사고할 수 있지만 국경 자체를 사고할 수는 없습니다. 국경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지도는 국경을 면이 아닌 선으로 표시하니까요.

국경선은 국경을 드러내는 선이 아니라 가리는 선으로 보입니다. 영토가 아닌 땅을 영토 안으로 밀어 넣고 꿰매버린 봉합선 같다고 할까요. 지도는 우리에게 면을 가진 것은 영토뿐이라고, 우리 삶이 필요로 하는 면적은 영토에서만 제공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 영토를 벗어나 다른 영토로 갈 수는 있지만 영토 바깥은 없다고, 영토 아닌 대지는 남아 있지 않다고요.

도대체 화폐는 어디서 온 것인가. 마르크스는 놀랍게도 우리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곳을 지목했습니다. 화폐는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에서 왔다. 그는 말했습니다. 다른 공동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공동체들의 바깥’에서 왔다고 말입니다. 공동체가 끝나는 곳, 공동체의 규칙이 작동하지 못하는 곳. 거기가 어딘가요?

우리는 그곳을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바로 ‘경계(Grenze)’이기 때문이지요. ‘끝’이면서 ‘사이’인 공간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거기서 상품교역이 이루어졌고 거기서 화폐가 생겨났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반동처럼 공동체 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도대체 국가는 어디서 온 것인가? 마르크스는 <국가>가 아니라 <자본>을 썼기에 이렇게 묻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화폐’라는 짐승도, ‘국가’라는 괴물도 모두 ‘바깥’에서 왔다고 말입니다. 모든 코뮨들의 바깥,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종족과 종족이 마주치는 곳에서, 다시 말해 국경에서 태어났다고요. 거기서 생겨난 폭력이 반동적으로 내부로 파고들어 주권이 되었을 것이라고요. 물론 하나의 가설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국경이란 국가의 경계인데 국경이 국가의 발생 장소라니요. 하지만 국경은 국가의 힘이 끝나는 장소이자 국가가 정의되는[정의(definition)란 끝(finis)을 그리는 일이죠] 장소이며, 무엇보다 국가가 매번 자신을 재생산하는 장소입니다. 국경만큼 국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국경의 삶만큼 국가와 주권에 대해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국경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누군가 시민으로서 영토적 삶을 사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시민권이 없는 채로 국경의 삶을 사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영토는 국경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마르크스 자신에게 그랬습니다. 1845년 프로이센시민권을 포기한 이래 그는 죽을 때까지 국적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국경에서 살았던 겁니다. 이곳을 사유해야 합니다. 국가와 비국가, 자본과 비자본의 이야기가 함께 존재하는 곳, 영토 바깥. 이 국경의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곳곳에 있는데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이곳, 국경을 사유해야 합니다

- 책 출판 시작부터 완간까지 출판계 화제였다.

“경기도 용인 작은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moontaknet.com)’에서 2016년 <자본> 1권 강의를 요청했다. 2017년엔 ‘우리 실험자들’이란 데서 강의해달라고 해서 했다. 강의 주제는 지금 12권의 책 제목과 거의 같다. 그해 천년의상상 선완규 주간이 강의를 듣고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 선 주간이 ‘말로 들을 때가 글로 볼 때보다 낫다’고 했다(웃음). 강의안 읽을 때는 딱딱했는데, 청강 때는 재밌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매 강의록은 A4 10장 정도인데, 말을 풀면 A4 20장 정도가 나왔다. 녹취록을 조금 고쳐서 내면 어떠냐고 했다. ‘월간 윤종신’이 매달 한곡씩 발표하는 것처럼 ‘월간 <자본>’을 만들어 한달에 한권씩 내보자고 제안했다. 구독 서비스처럼 신청자들에게 책을 보내주기도 하자고.”

- 부담되지 않았나.

“녹취록이 책 분량까진 안 됐다. 녹취록을 수정해도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자본>을 읽으려면 이렇게 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쓰겠다고 했다. 매달 쓸 수는 없다고 했더니 선 주간이 다시 격월간을 제안했다. 그래도 2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2018년 3월쯤 1권을 만들었다. 불안하니 한두권 먼저 써놓고 8월부터 격월간으로 냈다. 장난이 아닌 게 멈출 수 없었다. 제가 멈추면, 편집자나 디자이너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제가 그 리듬을 깨면 안 되니까. 컨베이어 벨트 분업처럼 원고를 넘기면, 편집자는 편집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하며 돌아갔다.”

- 다른 일은.

“전체 원고가 1만 매 가까운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간관계니 사회적관계니, 강의니 다 끊고 이것만 했다. 노들장애학궁리소도 1년 반 가량 휴직했다.”

- 첫 책 내고 만 20년 된 듯하다. 가장 독하게 쓰기를 한듯하다.

“제일 행복한 때였다. 읽고 쓰는 일만 하면 되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이 시기를 그리워할 것 같다. 힘든 건 머리가 안 돌아가거나 체력이 떨어질 때였다. 체력 때문에 한 번 격월간을 지키지 못했다. 한번 방학을 받았다. 출판사에서 독자들한테 죄송하다는 편지도 보냈다. 북펀드를 해서 4000만 원인가 모았다. 30~40명이 열두 권 책값을 미리 내고, 강의까지 신청했다. 힘들 때 독자들이 떠올라 계속 써나갈 수 있었다. 중간중간 강의나 모임 때 독자들 질문이 다음 권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프로젝트였다. 전국 동네 서점 13곳도 돌며 강의하고, 세미나도 열었다. 독자를 가장 많이 만났다. 1980년대 운동하고 책 읽고, 출판하고 모임들이 많았다. 지금 보면, 교조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함께 책 읽고, 운동도 하는 그 모델은 좋았던 것 같다. 이번에 조금 그 모델을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3명이든 10명이든 책 읽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과 면대면으로 눈빛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자와 독자, 출판과 서점과 연결된 셈이다.”


☞ [저자와 편집자, 이 책을 말하다](1)“마르크스 ‘자본’은 추리소설”에 충격 “한 권? 12권으로 펼치자”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1807242049005

- 힘들지 않았나.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글 쓰고, 남산 산책하고, 밥 먹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칸트도 자기 건강을 위해 산책을 했는데, 건강이 줄어들까 봐 필사적으로 하게 됐다. 남산 산책로 왕복하면 대략 8킬로미터 정도다. 한 2시간씩 걷는다.”

- 경제 문제는.

“진짜 괴롭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지만 30~40대 때는 수유너머 공동체에서 실제로 생계를 많이 해결했다. 가족들도 밥도 거기서부터 다 먹고 거기서 강의하고 생활 비용도 거기서 아껴졌다. 수익도 거기서 많이 나왔고 책도 썼고 강의도 다녔다. 이제 지금은 여기도 돈이 들어가는 곳이지, 나오는 곳이 아니다. 다행히 작년에 운이 좋아서 한국연구재단에서 하는 인문사회 학술 연구 교실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한 몇 년은 이걸로 살 수 있다. 대학 강의도 거의 몇 년간 안 했다. 꽤 오랫동안 버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이번에 대학 시간 강의도 맡았다. 핑계를 찾고 싶지는 않은데 이 돈은 들고 저 혼자 버니까 만만치 않더라. 요즘 제 20대 후반이나 30대 때가 되게 부럽다.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잘 보냈다. 제 인생에서 제일 머리도 잘 돌아가고 체력도 좋을 때다. 사장님을 위해서 안 쓰고, 나를 위해서 잘 썼다.”

- ‘읽기의 집’은 언제 만들었나.

“수유너머를 그만두고 혼자 읽고 쓰고 해왔다. 아침형 인간인데, 새벽에 주로 글을 쓴다. 2014년인가 아침에 책 읽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대략 7년간 유지됐다. <루쉰 전집> <플라톤 전집> <카프카 전집>을 다 읽었다. <자본>도 읽기가 끝났는데, 사람들이 함께할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읽기의 집’은 이반 일리치가 수도원에서 책을 어떻게 읽고, 만들었는지를 쓴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 서문에서 따 왔다. 세상의 한구석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읽기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력이 생기면 더 좋은 일도 하고 싶었다.”

고병권이 ‘읽기의집’ 현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고병권은 ‘고집사’로 불린다. 김종목 기자

-좋은 일은.

“회비와 후원금으로 이 공간을 운영한다. 한달에 20만 원 가량 남는다. 연말 우리에게 좋은 책을 읽게 해 준 저자에게 200만 원을 보낸다. 앞으로 뭘 해도 좋고 글을 안 써도 좋은데 당신 글 읽고 고마웠던, 좋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취지로 보낸다. 단 저자가 돈이 많지 않아야 하고, 직업이 안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수유너머 덕분에 30, 40대를 좋게 통과했다. 아주 행복하게. 내게 수유너머 같은 모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좋아서 하는 거지만, 하필이면 왜 이런 학문에 빠져들어서 같은 생각도 한다. 지금 30, 40대 중 인문학을 한 사람들 중 취업을 못 한 이들은 엄청 엄청 힘들겠다고도. 이런 분들 응원하고 싶었다.”

- 수유너머와 같고도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읽는 모임 위주다. 수유너머같은 삶의 공동체 요소는 많이 약하다. 그저 가난한 대학생이나 젊은 작가들, 공간 없는 사람들이 와서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곤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 올 시간적 여력이 안 된다. 알바라도 해야 하니까. 수유너머도 가난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때는 그래서 공간 바깥으로 ‘현장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인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들야학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 올 수 없으니까, 내가 노들야학에 가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공부 욕구도 크고, 하고 싶은 곳도 많지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 자신에게 ‘읽기’란 무엇인가.

“관계를 맺거나 세상을 알거나 공감하거나 분노하거나 모든 것들이 읽기에서 시작한다. 상대방 표정을 읽는 것부터 세상을 읽는 것까지 포함한다. 심지어 듣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읽는 것이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 것인가 할 때, 저는 읽기 속에 있었다. 내 삶이다. 세계 전체에 관한 물음이라, 진짜 답하기 어려운 질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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