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집, 다시 짐 쌌다.."돌아온 지 6일 만에 힌남노라니"

이우연 2022. 9. 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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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에 산다]지난달 폭우 손해 입은 신림동 반지하
물막이판·모래주머니로 대비했지만 "불안"
지하주차장 건물 "24시간 비상 대기"
추석 앞둔 시장 상인 "지나가길 빌 뿐"
동작역 천장에서는 다시 물 새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인 5일 낮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반지하 가구에서 유순애(71)씨가 대피를 위한 짐을 싸고 있다. 남편 김동화(73)씨는 양수기를 통해 물을 빼내고 있다. 이우연 기자

5일 전국이 태풍 힌남노 북상 소식으로 긴장한 가운데, 특히 지난달 8∼9일 수도권 집중 호우로 침수 피해를 겪은 지역의 주민들은 한달도 채 안 돼 찾아온 태풍에 더욱 불안해 했다. 지난 폭우에 피해가 컸던 반지하 거주자들은 가까스로 복구한 집을 또 떠나 대피해야 할까봐 짐을 싸며 야속한 하늘만 바라봤다.

“또 대피해야 하나” 짐 싸는 반지하

이날 낮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집에 사는 유순애(71)씨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들고 나갈 수 있는 짐 꾸러미를 싸는 것뿐이었다.

지난달 8일 밤 폭우로 남편 김동화(73)씨와 집에서 맨몸으로 나온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당시 맞은편 빌라에서는 발달장애인 가족 3명이 숨졌다. 대피 생활을 전전하던 부부는 지난달 30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옷장과 책장 등 세간살이는 못 쓰게 돼 버렸고, 물이 배어나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 밥상을 깔고 밥을 먹었다. 지상층으로 이사할 보증금은 없다. 다시 살아야 하니 최근 장판을 깔고 7만원짜리 플라스틱 서랍장을 하나 샀다. 이웃으로부터 텔레비전도 얻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4일 저녁 유씨는 비 걱정에 밥도 먹지 못했다. 남편 김씨는 밤새 집 안팎을 들락날락하며 한숨도 못 잔 채 이날도 양수기로 베란다 물을 계속해 퍼내고 있었다. “다시 물 들어오면 이거라도 하나 가지고 계단 밖으로 도망가야죠. 하수구 냄새가 계속 진동해서 소독약을 뿌렸더니 머리가 아파요.” 유씨는 주민센터에서 받은 이재민 구호물품 박스에 속옷과 수건, 휴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유씨가 사는 신림동 일대 빌라 곳곳에 모래주머니로 폭우를 대비했다. 일부 반지하 창문에는 물막이판(차수판)이 설치돼있었으나 그 비율은 절반도 안 돼 보였다. 건물 앞에는 버려진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반지하에 사는 주민들은 지난달 침수에 놀라 이번에도 불안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했다.

5살 아이를 키우는 김은하(34)씨는 “당시 주차장 쪽으로 진흙 물이 흘러와 집 앞까지 찼고 계속 물을 퍼냈다”며 “오늘 밤도 불안하다”고 말했다. 최아무개씨(58)도 “폭우 당시 아내와 변기와 하수구에서 역류한 물을 밤새 퍼내느라 고생했다. 오늘 밤 상황을 보려고 일까지 쉬고 있다”고 말했다.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인 5일 오전 11시30분께 찾은 서울 서초구 래미안리더스원 상가 지하주차장. 지난달 폭우로 침수된 뒤 피해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박지영 기자

모래주머니 ‘참호’ 쌓는 강남·서초

지난달 집중호우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강남 빌딩 인근 상인들은 “아침부터 비상 상황”이라며 모래주머니와 물막이판을 가게 앞에 설치해두고 있었다. 지난달 폭우에 ‘맨홀 사망 사고’가 발생한 서초구 서초동 효성해링턴타워 인근 미용실에서 일하는 유라(30)씨는 “태풍 소식에 불안해서 미리 모래주머니와 물막이판을 준비해놨다”고 했다. 미용실 바로 옆 은행에서 일하는 직원 ㄱ씨도 “모래주머니를 안에 다 구비해뒀다. 지난번 폭우를 겪어서 그런지 긴장하면서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다. 퇴근 전에 은행 셔터를 내린 뒤 모래주머니와 테이프로 단단히 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강남역 인근에서 만난 김재윤(32)씨는 “지난번 맨홀 사고도 봐서 아무래도 물 잠겨 있는 거 보면 주변 지나가기 무섭다”고 했다.

지난달 집중호우로 지하주차장 사망자가 발생한 강남빌딩은 ‘비상 대응 체제’에 돌입했다. 강남빌딩 건물 관계자는 “지난번 폭우로 지하주차장이 침수되고 나서 호스로 물을 거의 다 빼냈는데, 지금 또 비가 와서 24시간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대기하려 한다”고 했다. 이날 강남빌딩 로비에는 ‘태풍 힌남노의 북상으로 퇴근 시 모든 창문 필히 닫아달라. 금일 저녁부터 건물 주변에 절대 주차 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강남빌딩과 마찬가지로 피해 복구 작업이 미처 다 마무리되지 못한 인근 건물 지하주차장은 아예 입구를 막아 차량 진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강남빌딩 바로 옆 빌딩에서 일하는 한 직장인은 “오늘 퇴근하고 바로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갈 거다. 비 오는 거 보고 차도 안 가지고 나왔다. 강남 쪽 직장인들 지난번에 차 침수되는 난리 겪었으니까 차를 안 가져 나왔을 것이다. 맨홀 사고도 기사 많이 봐서 주변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5일 낮 12시께 서울 서초구 강남빌딩 로비 앞에 태풍 힌남노 북상 주의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박지영 기자

추석 앞두고 울상인 전통시장

침수 피해를 보았던 동작구 남성사계시장 상인들은 추석 대목을 앞두고 손님이 줄어들까 우려했다. “비만 오면 잠을 못 자고 걱정이죠. (태풍이 오는) 오늘과 내일은 한 사람이 밤새워 지키고 있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의 반찬 가게 직원 어아무개(53)씨가 신은 빨간색 장화 밑으로 물웅덩이의 표면이 찰랑거렸다. 시장에서도 낮은 지대에 있는 이 가게는 지난달 8일 밤 내린 폭우로 침수 피해를 입었다. 이날 가게 앞은 이미 신발 깔창두께 높이의 물이 고여있었다. 가게 직원들은 손님들의 신발이 젖지 않게 스티로폼 박스 뚜껑과 깔개를 깔아뒀다. 어씨는 “비만 오면 항상 가게 앞에 이렇게 물이 고인다. 배수구를 이 앞에 만들어주면 걱정이 없을 텐데 통 만들어주질 않는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태풍에 대해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두부와 청국장 등을 파는 이희진(70)씨는 “9년 전 수해로 물막이판을 설치해 바깥에 있는 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는데, 지난달 폭우에 가게 안에 있는 하수구 물이 역류하면서 남편이 감전사고를 당했다”며 “안에서 물이 넘치는데 어떻게 대비를 하느냐. 이번엔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밤‧대추‧땅콩‧호두‧황태 등 추석 상차림에 올릴 물품을 진열대에 내놓은 강아무개(56)씨는 “지난번엔 3천만원의 손해를 봤다”며 “일단 물건을 선반과 책상 위로 올려두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대책을 세우긴 어렵고, 배수구로 물이 더 잘 빠지게끔 근본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인 5일 낮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의 한 반찬가게 앞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서혜미 기자

복구 안 끝났는데…물 새는 지하철역

지난달 침수 피해를 입은 서울의 일부 지하철 역사는 피해 복구 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태풍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빗물이 지하보도를 타고 내려와 역이 폐쇄됐던 동작역 9호선은 피해가 컸던 6·7번 출구에 방수판과 모래주머니를 설치했다. 6·7번 출구는 지난달 폭우로 복구가 끝날 때까지 통행을 금지한 상태다. 그러나 전날부터 내린 비로 5번 출구 쪽 천장에 물이 새 양동이로 빗물을 받는 청소 작업이 이어졌다. 동작역 관계자는 “지난 폭우 뒤 천장 실리콘 작업을 했는데,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비가 와 추가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메트로9호선 관계자는 “사전예방 관리 차원에서 침수 역사마다 배수시설 확인 및 차수판 점검 등을 실시했고 비상상황을 대비해 종합상황실을 운영하고 있다”며 “폭우가 심해지면 보안요원과 본사 인력을 각 역사에 추가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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