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동묘 뒷골목 호갱 10년차..'63살 진공관 라디오' 횡재

신승근 2022. 9.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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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나의 짠내 수집일지]나의 짠내 수집일지
빈티지 오디오 '득템' 꿈꾸다
벼룩시장서 고물만 잔뜩 수집
'당근'한 진공관 라디오에서
마침내 얻은 따뜻한 음색에 위로
당근마켓을 통해 동네에서 운 좋게 구입한 1959년산 독일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 마그넷 포노박스 05737W.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짠내 수집에 딱 맞춤하다. 늘 실제 가치보다 싼 가격에 희귀 아이템을 얻는 횡재를 꿈꾸지만, 싼값에 덜컥 사들였다가 애물단지가 되거나, 수리비가 더 나오는 배보다 배꼽이 큰 난감한 상황을 반복한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엘피판 수집 목록이 늘면서 아날로그 감성의 끝판왕이라는 진공관 라디오와 릴데크 등 빈티지 오디오질에 나섰다. 문제는 엘피에 견줘 오디오질은 호갱이 될 위험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웬만큼 보는 눈만 있으면 엘피는 1만원 정도로 나름 귀한 물건을 건질 수 있다. 하지만 납땜과 얼키설키 뒤엉킨 전선, 진공관, 다이오드, 코일, 트랜지스터 등이 촘촘한 빈티지 라디오나 오디오는 좀처럼 횡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덜컥 질렀다가 호갱 되기 십상

수집가들이 선호하는 피셔, 마란츠, 텔레풍켄, 뢰베옵타, 아카이 등 빈티지 명품은 가격이 제법 높게 형성돼 있다. ‘실용오디오’ 등 마니아들이 모이는 인터넷 사이트에 개설된 직거래 장터엔 좋은 물건이 넘쳐나지만, 가격도 만만찮다. 없는 살림에 족보 없는 짠내 수집을 하는 내 처지엔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나름 틈새시장을 찾은 게 서울 동묘와 신설동 풍물시장 뒷골목이다. 주말이면 새 떼처럼 모였다 사라지는 벼룩시장 노점에선 아날로그 감성 충만한 물건이 넘쳐난다. 하지만 10여년 이상 뒷골목을 누빈 결론은 호갱이 안 되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용산전자 상가나 황학동의 빈티지 오디오 가게에 견줘 너무 싼 가격에 덜컥 지르지만 열에 아홉은 본전도 찾기 어렵다.

2020년 9월 북한산 등반을 마치고 막걸리 몇잔 걸친 뒤 귀갓길에 동묘에 들렀다 1983년 출시된 디지털 신시사이저식 마란츠 오디오 ‘PM630 세트’가 눈을 끌었다. 앰프(PM630), 시디플레이어(RC 430), 카세트 데크(SD630), 튜너(ST530) 4개 한 세트 구성된 가격이 15만원. 승합차를 세워두고 좌판을 벌인 상인은 “마란츠 오디오 풀 세트가 이 가격이면 거저 주는 거”라 했다.

이런 곳에서 사는 물건 대부분이 정상 작동은 고사하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여러 차례 비슷한 경험을 한 터라 아무리 욕구가 앞서도 기기에 전기가 들어오는지를 반드시 확인한다. 상인은 자신 있게 플러그에 꽂았고, 모든 기기에 전기가 들어왔다. 정상 작동하냐고 물으니 “다 확인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나에게 “에누리해 12만원에 가져가라. 싣고 다니기 지쳐 이 가격에 주지, 어디서도 이런 물건은 못 산다”고 자극했다.

결국 값을 치르고 택시에 그 무거운 오디오 세트를 싣고 집에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위치를 누르고 정태춘·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시디를 얹었다. 시디플레이어 신시사이저 창엔 ‘NO DISK’라는 신호만 깜박였다. ‘에이 씨, 그러면 그렇지’, 또 호갱 됐다는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카세트 데크라도 건질 요량으로 <룰라 2집>을 넣었다. ‘날개 잃은 천사’를 듣고 싶었는데 모터 도는 소리가 들릴 뿐 카세트테이프를 물고 돌아야 할 휠은 미동도 안 했다. 이것도 고물이었다. 결국 라디오 주파수를 잡는 튜너만 정상 작동했고, 앰프까지 3개 기기는 먹통이었다. 화가 치밀어 일주일을 기다렸다 주말에 상인을 찾아갔다. “복불복이지 어떻게 다 확인하나. 살 때 전기 들어왔고, 오디오 잘 아는 사람이니 정상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고려하고 싸게 산 거 아니냐. 부품으로 다른 데 팔라”는 뻔뻔한 말이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장사하니까 고물로 등쳐먹는다고 욕을 먹는 거”라고 쏘아붙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론 서적을 읽고, 유튜브를 보면서 고물을 사들이는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노점에선 내부를 뜯어볼 수도 없고, 뜯어본들 복잡한 부품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어, 번번이 호갱이 되는 걸 반복한다.

벼룩시장 노점에 견주면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 당근마켓에선 호갱의 위험을 좀 줄일 수 있다. 파는 이의 판매 이력과 거래한 이들의 평가를 볼 수 있고, 앱 운영사에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어 판매자도 물건 상태를 비교적 성실하게 적시한다. 사는 쪽도 그에 걸맞은 가격을 생각하고, 고물을 사더라도 그리 큰 후회는 없다.

짠내 수집하다 보니 볕 들 날도

흔치 않게 횡재하는 일도 있다. 노점에 또 당하고 한달 뒤인 2020년 10월 진공관 라디오를 갖고 싶어 당근을 검색하던 내 눈엔 1959년 독일(당시 서독)에서 만든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Magnet Fonovox 05737W, Loewe-Opta)가 눈에 들어왔다. 정상 작동하면 40만~50만원에 거래되는데, 고장 품으로 8만원이었다. 하자 설명도 상세했다. ‘고장 난 대형 진공관 스피커…아래판과 뒤판이 삭아서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지네요. 고정 나사도 하나만 남았어요. 전원은 켜집니다만 라디오는 안 나옵니다.’ 소리도 안 나고, 받침 목재가 썩은 고물을 왜 사냐 하겠지만 63년 전 생산한 진공관 라디오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다. 어차피 제대로 된 물건을 살 형편도 안 되고, 인테리어용으로 딱이다 싶었다. 오늘 밤에 안 가져가면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는 판매자의 결단 요구에 밤 11시가 넘어 물건을 받아왔다.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샀을 때의 상태.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를 직접 수리했다.

전원은 들어왔지만 얼룩이 가득한 뒤판을 열어보니 묵은 때와 거미줄은 물론 죽은 나방까지 뒤섞여 있었다. 더 기대할 게 없어 한동안 방치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닦고 조이기’ 시작했다. 납땜한 전선에 앉은 묵은 때를 벗겨내고, 크고 작은 진공관을 뽑아 일일이 알코올로 닦았다. 그리고 플러그를 꽂으니 따사로운 아날로그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내가 전자제품 수리 실력자인 줄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디를 어떻게 손대 그 고물이 생명을 찾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냥 우연일 텐데, 동묘 뒷골목을 돌며 사들였던 천덕꾸러기 고물에 대한 뒤늦은 보상 같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정상 작동하니 외관을 다듬었다. 우드 필러와 플라스틱 헤라 등으로 썩은 판을 보강하고, 60여년 동안 파인 흔적도 메웠다. 볼륨 조절과 주파수를 잡는 황동 판으로 장식한 플라스틱 노브(손잡이)의 묵은 때는 치약으로 사흘을 닦아냈다. 이젠 제법 윤기가 흐르고, 우리 집을 찾는 이들이 소리 한번 들어보자는 희귀 수집품이 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비가 온다. 이런 날 뢰베옵타 진공관 라디오의 따사로운 음색을 듣고 오렌지색 불빛을 보며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 이 맛에 호갱이 될지언정 짠내 수집을 멈출 수 없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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