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자락에 금호강 흐르고, 포은(圃隱) 일가의 묵향 그윽하네  

2022. 9. 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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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고을학교는 <영천고을> ]

[프레시안 알림]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의 제89강은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 이르는 요충지이면서 고려 말기의 유학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비롯, 영일정씨·오천정씨·창녕조씨의 세거지로 그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경상북도 영천고을로 향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선원마을은 영천의 대표적인 영일정씨 집성촌으로,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해 지은 마을 이름이다.Ⓒ영천시

고을학교 제89강은 2022년 9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9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금호읍·대창면(만취당/유후재,옥비/지산고택/도잠서원/청제비)-대전동·고현천변(이대전유허비/양계정사/호수종택)-자호천변(영천향교/숭렬당/호연정/조양각)-점심식사-임고면(임고서원/포은유허비)-선원마을(환구세덕사/함계정사/연정고택)-신녕면(신녕향교/환벽정)-서울의 순입니다.

▲<영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9강 답사지인 영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팔공산과 금호강을 품고...
영천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골벌소국이 형성된 이후 절야화군, 임고군, 영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여 영천(永川)이라 하였습니다.

영천시는 경상북도의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과 경산시,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접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앙선과 대구선 철도가 동서로 뻗쳐 있고, 경부고속도로와 익산포항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국도와 지방도 등이 통과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영천지역의 산줄기는 백두대간 상의 태백산에서 남으로 뻗어 나온 낙동정맥의 지맥이 영천에 이르러 산세가 약해지면서 운주산(806m), 도덕산(703m), 관산(394m)이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서쪽은 팔공산(1,193m), 태실봉(466m) 등이 솟아 있으며 남쪽은 금박산(432m), 구룡산(675m), 사룡산(685m)이 연이어 있고, 북쪽은 보현산(1,124m), 화산(828m), 수석봉(821m), 모자산 등이 급경사의 산지 사면으로 둘러싸여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어 영천의 지형은 완전한 분지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서쪽의 팔공산, 북쪽의 보현산, 동쪽의 운주산과 도덕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분수계를 이루며 이곳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들이 시내를 관통하여 남, 서류하는 금호강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팔공산의 시루봉에서 발원한 신녕천은 신녕면을 관류하며 주변 산지에서 발원한 소규모 지류 하천들을 합하여 신녕천 유역을 형성하고, 보현산 서쪽에서 발원한 고현천이 화북면과 화남면을 가로질러 남류하고, 영천호(자양호)에서 남, 서류하는 자호천은 운주산과 도덕산 사이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임고천을 합류하면서 금호강에 유입됩니다.

영천시를 관류하는 금호강의 활주 사면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금호강을 따라 형성된 평야들은 범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하천 주변에는 충적층이 넓게 발달하였습니다. 금호강 주변의 대표적인 평야는 금호읍 교대리 주변의 금호평야와 관정리 주변의 새봇들, 금로동의 주남평야 등이 있습니다. 금호평야는 폭 약 5㎞, 길이 약 50㎞의 규모로 경상북도 제일의 평야로 손꼽힙니다. 이외에도 금호강의 지류 하천인 신녕천, 고현천, 자호천, 임고천, 북안천 등의 활주 사면에서도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평야들이 많습니다.

▲환벽정은 건물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입힌, 영천 지역 유일한 육각형 단칸 건물이다.Ⓒ새영천알림이단

영천은 군사적 요충지로 산성이 많았습니다.
영천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로부터 북방의 최일선에 이르는 경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많은 성곽이 경영되었습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영남대로에 포함되어 국방상의 중요성은 지속되었습니다. 영천지역에 현존하는 성곽들은 잔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우리나라의 성곽 축성기법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영천읍성은 1591년(선조 24)에 축성되었지만, 이듬해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현장 확인 등을 통해 성곽의 범위를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천읍성의 추정범위는 영천시 문내동, 성내동, 교촌동, 창구동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남천(금호강)과 절벽, 배후의 산지 등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자연지세형 읍성으로 방형의 평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던 서쪽과 동쪽의 일부 잔존 성벽이나 객사나 동헌 등의 관치시설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금강산성은 금강산(150m)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 만든 토석 혼축으로, 성벽 내부에는 돌과 흙을 채우고 그 밖을 흙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성벽의 평균 높이는 2~3m 정도이며, 토루의 폭은 약 2~2.5m 정도입니다. 북쪽은 자연 절벽이며, 북동지역으로는 몇 개의 하천들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금강산성은 <삼국사기> 지증왕조의 기록에 의거하여 당시 골벌국에 축성된 골화성으로 보기도 하며, <영양지> 성곽조의 기록을 근거로 나말여초에 활약한 이 지역의 호족 황보능장이 축성한 성곽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현재 이 성은 대의리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나 금강산성이란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백암산성은 임고면 금대리 해발 240m의 고지에 있으며 지명을 따서 금대리산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동쪽 성벽은 임고천에 면한 천혜의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북, 서, 남쪽 구간은 토석 혼축으로 축조하였습니다. 잔존 성벽은 보통 1~2m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으며, 그 상단의 너비는 2~3m 정도이며, 내부에 너비 3~5m 정도의 내부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북동쪽은 수직 절벽을 형성하고 바로 아래에는 임고천이 흘러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상리산성은 화산면 가상리 가래실 마을의 뒷산인 백학산(215m)에 위치합니다.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축조 방법이나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토석 혼축으로 산정상부를 따라 축성하였는데, 성의 북동쪽은 자연 절벽 구간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서남쪽 성벽만이 확인 가능합니다. 자연 절벽 구간인 북동쪽으로는 화북천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벽의 평균 높이는 3~4m이고, 상면 너비는 1.5m 정도로 좁은 편이며, 산성의 둘레는 약 1㎞로 가늘고 긴 편이어서 성 내부 면적은 협소합니다.

화성리성은 신령면 화성리의 신령초등학교 왼쪽 낮은 구릉지에 있습니다.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축조 기법이나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시대에 축성하여 조선 시대까지 사용하였다고 판단됩니다. 평면은 말안장모양을 이루며 남북으로 긴 타원형입니다. 성벽의 길이는 약 1㎞이며, 동벽은 석축이고 서벽은 토석 혼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연 단애를 이루는 성의 동쪽 바로 아래에는 실개천이 흘러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남리산성은 신령면 화남리의 혈암산(559.2m)에 있습니다.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성 내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신라성으로 판단되며 신라의 북방 진출에 따른 교통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공산성은 팔공산의 동봉과 서봉을 포함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축조 시기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라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성지의 망루나 장대로 추정되는 동봉 주위로는 소량의 토기편과 와편, 자기편들이 확인되며 형태는 산정부를 포함하는 테뫼식 산성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원마을의 종가인 연정고택은 영화 <그 해 여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영천시

영천에는 삼한시대부터 골벌소국이 있었습니다.
영천지역은 삼한시대에 골벌소국이란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504년(지증왕 5)에는 이곳에 골화성이 축조되기도 했습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절야화군과 사정화현이 각각 임고군과 신녕현으로 개명되어 양주에 속했습니다.

고려시대는 임고군, 임천현, 도동현이 통합되어 영주가 되었는데 고울군이라고도 하였습니다. 995년(성종 14) 자사가 파견되기도 했으나, 1018년(현종 9) 신녕현과 함께 동경유수관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영주관내의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했고, 속현이던 신녕현에도 1390년(공양왕 2) 감무가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에 이어 영주군, 신녕현으로 나뉘었다가 1413년(태종 13) 영주군은 영천군으로 개명되었고, 신녕현은 1497년(연산군 3) 현의 향리들이 현감의 악정 때문에 도망가자 현이 한때 해체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정세아, 조희익, 권응수, 정대임 등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이 지역 일대의 적을 격파해 적이 경주로 후퇴하게 하였고, 경주성 탈환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1895년(고종 32) 영천, 신녕이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군이 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녕군이 영천군에 흡수되었으며, 1933년부터 연차적으로 내동, 내서, 예곡, 완산, 명산 등 5개 면이 통합되어 영천면이 되었습니다. 1934년 화북면과 고경면이 설치되었고, 1937년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81년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금호읍 도남동, 청통면 오수동, 쌍계동, 화산면 매산동이 시로 편입되었습니다.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을 통합하여 영천시로 승격하였습니다.

신라시대 석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제비는 신라시대 ‘청못’ 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로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지 않고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각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의 한 면은 536년(법흥왕 23)에 청못 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기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 면은 798년(원성왕 14)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인명, 관직명, 이두문 등은 신라시대의 사회사와 언어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한때 세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아래 계곡에 묻혀 있다가 1688년(숙종 14) 청제중립비를 세울 무렵, 다시 정비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영천향교 대성전은 명나라 목수가 중국식 건축양식으로 준공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영천시

영천과 신녕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영천향교는 1435년(세종 17)에 대성전을 건립하고, 1513년(중종 8)에 김흠조가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이현남이 대성전에 봉안되어 있던 5성의 위패를 기룡산의 성혈암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가 환안하였습니다. 명륜당은 1546년(명종 1)에 이중량이 창건하였는데, 1570년(선조 3)에 소실된 것을 1619년 조명운이 중건하였다가 1782년(정조 6) 화재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2년 뒤인 1784년 심진이 다시 수축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재, 서재, 삼일재, 전사청,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과 송조 2현의 위패가 동무, 서무에는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1435년에 명나라 목수가 중국식 건축양식으로 준공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1978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삼일재는 사마소라고도 하였는데, 이 지역 향사들이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이곳을 거쳐 조선시대 대소과의 과거에 등과한 후손들이 경비를 갹출하고 관의 보조를 받아 건립한 건물입니다. 1908년에는 향교의 전답을 재정적 기초로 하여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 새로운 근대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듬해에 명륜학교로, 1910년에 봉명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가 국권 상실과 함께 1911년에는 영천공립보통학교로 이관, 개편되었습니다.

신녕향교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551년(명종 6)에 부임한 현감 황준량이 재임 시에 중수하였다는데, 화산 아래 명천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임란 때 소실되고, 1615년(광해군 7) 중건했다가 1686년(숙종 12)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습니다. 1852년(철종 3)에 명륜당을 중건하고 대성전을 비롯한 향교 건물을 중수하여 모양을 일신하였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양각은 영천현 관속 정자로 1363년(공민왕 12)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건립하였으며 건립 초에는 명원루 또는 서세루라고 불렀습니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온 말로 “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遠目增雙明)”는 말에서 나왔다고 사가정 서거정이 쓴 명원루 기문에 나와 있습니다. 원래는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637년(인조 15)에 군수 한덕급이 다시 지은 것으로 이때 조양각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조양’은 <시경>의 “봉황은 동쪽에서 뜨는 아침 햇살[朝暘]에 운다”라는 구절에서 얻어왔습니다. 영천의 지세가 ‘날아가는 봉황새’ 모양인데 아침 햇살에 우는 봉황은 길조라는 뜻입니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영천 명원루를 영남 3대루라 하며 안동 영호루, 울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천 연자루를 더하여 영남 7대루라 합니다.

▲영천 명원루(조양각)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 3대루로 꼽힌다.Ⓒ새영천알림이단

정자 안에는 기문 15편과 시 63편이 목판으로 새겨져 걸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은 포은의 시 <청계석벽> 을 비롯하여,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태재 유방선, 사가정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용재 이행, 창건자 이용 등 명현들의 시가 있어 풍류를 더해 줍니다. 경내에는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산남의진비, 백신애문학비,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전승비 등 있습니다.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 일대에 머무는 동안 건너편 금호강변에서는 말을 타고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마상재가 열렸는데 이때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상재는 <무예도보통지>에도 나오는 조선무예 24기예 중의 하나입니다.

환벽정은 신녕현의 관속 정자로 1516년(중종 11)에 현감 이고가 관아 서쪽 북악 죽전 아래에 비벽정으로 건립했으며 현감의 아들이 회재 이언적을 좋아해 같이 놀고 서로 화합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그 후 퇴락한 것을 현감 황준량이 1552년 건물을 헐고 죽각이라 명명해 중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현감 송이창이 1611년 중건하면서 환벽정이라 개명했습니다.

건물 형태는 평면은 영천 지역에서 유일한 육각형으로 단칸 건물이고 지붕은 겹처마 모임지붕이며 이익공 양식입니다. 중층구조의 정자는 누하부에 높이가 각각 다른 장초석을 세워 누하공간을 마련했고 전체에 원형기둥을 세워 가구를 완성했습니다. 모임지붕의 최상부는 절병통으로 치장했고 내림마루 끝에 막새를 달았으며 건물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는데 단청을 입힌 정자는 영천 지역에서 환벽정이 유일합니다. 정자 아래에 현감 이고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건물 정면에 ‘환벽정’이란 현판을 달았고 내부에 제영시 등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동춘당 송준길의 기문과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금계 황준량, 사가정 서거정, 약봉 김극일, 선원 김상용, 경정 이민성, 화포 홍익한, 백헌 이경석, 동주 이민구, 청천당 장응일, 약천 남구만, 번와 이귀석 등 수많은 당대 명망 있는 선비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천이씨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천이씨인 순흥부사 이보흠이 금성대군과 2차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순흥 도호부는 해체되고 영천이씨는 멸화지문에 이르게 되어 본향인 영천에는 이순몽 장군의 사당과 이보흠 유허비만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숭렬당은 1433년(세종 15)에 건립된 중국식 건물로서 1419년(세종 원년) 쓰시마 정벌과 야인토벌 등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위양공 이순몽 장군이 평소 기거했던 집입니다. 건축양식은 별당식으로 대청이 기본이고 대청의 양 측면은 똑같이 온돌이 딸려 있습니다. 양쪽 온돌 칸 기단부를 따내어 아궁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1칸씩의 누마루로 되었고 전면의 주열 바깥쪽으로는 긴 툇마루를 부설하였습니다.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197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그 후 해체복원과 담장보수 및 부속시설 공사로 지금은 완전히 원형을 회복하였습니다.

이순몽은 본관은 영천이고 태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영양군 응의 아들입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 초에 우군절도사,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일찍이 총제로 쓰시마를 정벌할 때 동료들이 다 패했으나 장군 홀로 부하 전원을 영솔하고 돌아왔으며, 다시 파저강에서 싸워 대승하여 세종의 총애가 두터워 사람들이 복장군이라 불렀습니다.

이대전유허비는 대전 이보흠의 생장지에 그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 1629년(인조 7)에 세운 유허비입니다. 이보흠은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으로 호는 대전, 본관은 영천입니다.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를 거쳐 사정이 되고 1443년(세종 25) 사헌부 감찰로 봉직할 때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제외교에서도 크게 활약한 바 있습니다. 1448년(세종 30) 지대구군사가 되어 대구에 사창법을 시행했고, 문종 때 장령을 지냈으며 1457년(세조 3) 순흥부사로 재임 시,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평안도 박천에 장류 후 처형당하였으며 정조 때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영천시

선원마을은 영일정씨가 세거해 온 집성촌입니다.
선원마을은 조선 인조 때 호수 정세아의 장손인 정호례가 입향해 세거해 온 영천의 대표적인 영일정씨 집성촌입니다.

마을 뒤로 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선원천과 자호천이 감아 돕니다. 산천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풍경이 사뭇 아름답기에 지명도 ‘선원(仙源)’입니다. 입향조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정호례가 입향한 이래 그의 손자 함계 정석달이 강학과 지역 사회 교화에 힘썼으며 이후 정석달의 아들 중 장남인 중기는 임고면 삼매리의 매곡마을에, 차남인 중우는 화북면 자천리로 입향해 세거했고 삼남인 정중보가 선원마을에 남아 세거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선원마을은 지형이 백학포란형으로 학을 닮은 뒷산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 붙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마을의 구성도 학의 형태에 따라 나뉘는데 학 머리에 종가인 연정고택이 있고, 학의 날개에는 일족의 가옥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학의 꼬리 부분에는 마을 입구 진입 부분에 위치한 정자, 연못 등이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 초상. 보물 제1110호이다.Ⓒ임고서원

영일정씨, 연일정씨, 오천정씨는 관향이 같습니다.
영일정씨, 연일정씨, 오천정씨의 관향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시조 정종은이 신라의 간의대부를 지내다가 설화로 인동군 약목현에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후손 정의경이 고려 건국공신에 봉해져 영일현백이 되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 연일, 오천으로 삼았습니다. 영일, 연일, 오천은 지금의 포항 일대의 옛 지명들입니다.

정몽주의 후손인 영일정씨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포은정몽주유허비는 포은의 출생지에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세운 효자비입니다. 방형의 토석 담장으로 둘러진 일곽 내에 단칸 규모의 비각 안에 있습니다. 비각 정면 상부에는 ‘포은정선생지려’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에는 만력삼십오년(1607년)에 쓴 중수 비각 기문과 가정사십삼년(1564년)에 쓴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비의 좌측에는 ‘홍무 기사 삼월 ○○영수 정유 입비’라고 새겨져 있어 138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은은 1355년(공민왕 4)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 상을 지내고 그 후 1365년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묘소에서 3년상을 지냈습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그의 출생지인 우항리에 ‘효자리’라 새긴 비가 영주(현 영천) 수령 정유에 의해 1389년(공양왕 원년)에 세워졌습니다. 조선 성종 때 경상감사 손순효의 현몽에 의하여 잃었던 비를 땅 속에서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도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포은정몽주유허비는 포은의 출생지에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세운 효자비이다.Ⓒ영천시

정몽주의 본관은 영일, 호는 포은입니다. 1355년 아버지 상에 3년, 1365년 어머니 상에 3년간 여묘하여 정표가 되었습니다. 1357년 과거에 합격한 후 예문검열 등을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익양군충의백에 제수되었고 1367년 부사 이용과 함께 영천 금호강(남천)변에 명원루(현 조양각)를 창건했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며, 내정, 외교, 교육 등에 공적이 많았는데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피살되었습니다.

1401년에 태종이 명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1431년 정몽주를 삼강행실도충신도에, 1517년 문묘에 종사하고, 1554년 임고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렸습니다. 정몽주는 전국 20여 개 원사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포은집>이 있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습니다.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습니다. 1643년(인조 21)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1787년(정조 11)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만 봉향하고 있으며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는 옛 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정몽주의 영정은 3본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제작 연대, 필자, 세부의 묘사 등은 각각 다릅니다. 동일본에서 중모되어 내려온 모본으로 모두 오사모, 청포단령, 각대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며 포석과 배경은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숭정기사 모본은 김식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그림의 오른쪽 아래편에 ‘숭정기사모본’이라고 묵서되어 있어 1629년 중모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오사모에 담청색의 단령포를 입고 있는 전신교의상으로 좌안팔분의 안모를 하고 있고 연폭의 비단에 그려져 있는데 의습도 먹선이 아닌 청색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나 고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존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임고서원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높이 약 20m, 줄기 둘레가 5.95m에 이르는, 수령이 약 500년인 노거수이지만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입니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부래산에 있던 서원이 소실되고 현 위치에 복원된 후 경관용으로 심어진 관상수라고 생각됩니다. 심을 당시에는 여러 그루를 심었으나 토질이나 관리 등 여러 사정에 의해 오로지 적합한 토질에 잘 관리된 것만이 살아남은 것 같습니다. 서원이 복원된 후에 심어진 관상수라면 대략 1600년 초기에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옥간정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만양과 정규양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16년(숙종 42)에 세운 정자입니다. 형제는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영의정 조현명, 형조참의 정중기, 승지 정간 등 많은 명현, 석학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 후 나라에서 수차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일생 동안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 형태 누각 건물입니다.

정만양의 호는 훈수, 정규양의 호는 지수, 관향은 영일이며 호수 정세아의 5세손으로, 훈수는 안동 임하 천전리 외가에서 지수는 영천읍 대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육유재와 태고와를 짓고, 1716년에 옥간정을 지었습니다. 1720년 2월부터 옥간정에서 삭강을 시작해서 1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력하여 <훈지록>을 비롯하여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매산고택은 18세기 중엽에 매산 정중기가 짓기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 정일찬이 완성한 집입니다. 본채는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인데 여기에 사랑채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교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안채의 대청은 두리기둥을 쓰고 머리에는 초익공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법으로 금하던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본채, 대문간채 그리고 사당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아랫사랑, 고방채 등 여러 부속채도 있었습니다.

정중기는 1731년 주서가 되어 결성현감을 역임하고 여씨향약에 의거하여 향속의 순화에 노력하였으며, 정언을 거쳐 1753년 지평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에 이르렀습니다. 저서로는 <매산집> <가례집요> <주서절요집해>가 있습니다.

연정고택은 현 주인 정용준의 8대조가 1725년(영조 1)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으로 합쳐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는 방주와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의 소루수장 물익공 집입니다. 본채와 50여m 떨어진 냇가의 정자는 옆의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나 연정이라고 편액하였다고 합니다.

▲호수종택은 1643년(광해군 5)에 해남 현감 정호례가 ‘工’자 형으로 건립한 전통양식의 건물이다.Ⓒ영천시

오천정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천재는 오천정씨 문중의 묘소와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이 1637년(인조 15)에 창건한 묘재입니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추원당, 신도비각 등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강호정은 1599년(선조 32)에 의병장 정세아가 임란 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 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래간은 방이고 중앙 칸과 전면 퇴 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기둥은 원주로 되어있는 익공계의 삼량집입니다. 1974년에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정세아는 호는 호수, 본관은 오천입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습니다. 그는 박연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다시 영천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다시 경주의 적을 물리쳐 이로 말미암아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습니다.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않고 양서재로 돌아와서 다시 학문의 길을 찾았습니다. 수차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원익의 청을 이기지 못하여 찰방을 잠시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장현광, 조호익 등과 학문을 논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쳤습니다.

환구세덕사는 정세아와 아들 백암 정의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77년(정조 1)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 후 의번의 충효정려가 내려와 사당 좌측에 충효각이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거되어 그 유지에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 남았습니다. 의번은 경주 복성전에서 왜적에게 포위되자 아버지를 구출하고 장열히 전사하였습니다.

양계정사는 1645년(인조 23)에 양계 정호인이 관직에서 일시 향리로 돌아와 경관이 좋은 이곳에 초가 수 칸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학당이었습니다. 현재 건물은 양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0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입니다.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양계정사는 고현천을 부감하는 언덕 위에서 서 있어 경관이 빼어나며 조선후기의 ‘之’자형의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정호인은 호는 양계, 관은 오천이며 정세아의 손자입니다.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호조 정랑을 거쳐 양산, 합천군수가 되고 진주목사와 남원도호부사를 지냈습니다. 병자호란 때 부원수가 되어 향병을 모집하는데 종사하였고 1637년 이후 1645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주군의 수령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의 행장은 너무나 간단하여 서책만 두어짐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주자서>와 <근사록> 등의 책을 탐구하여 잠시라도 서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대구 청호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함계정사는, 정세아의 현손인 정석달이 1702년(숙종 28)에 학문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자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작게 지은 것이 안락재입니다. 그 후 1779년(정조 3) 손자 일찬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하였습니다.

정석달은 호는 함계, 본관은 오천, 충무위대호군 시심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생을 학문을 탐구하고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병와 이형상과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문집 3권을 남겼습니다.

충효재는 산남의진 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검단동을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 건립하였습니다. 정환직의 호는 동엄, 본관은 오천입니다. 1844년에 출생하였으며 태의원전의를 거쳐 1887년(고종 24) 북부도사가 되고 이듬해에 의금부도사가 되었습니다. 1899년 시찰사, 토포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중추원의관을 지냈습니다.

정용기는 혜민원 총무를 거쳐 민영환과 더불어 독립회와 만민회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서서 회장직을 역임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령을 받은 정환직은 용기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을 창군하여 홍해, 청하, 영해, 의홍, 청송, 영덕, 신녕 등지에서 왜구와 격전, 혁혁한 공을 세우고 부자가 연이어 순국하였습니다.

호수종택은 1643년(광해군 5)에 해남 현감 정호례가 ‘工’자 형으로 건립한 전통양식의 건물입니다. 정호례는 정세아의 장손입니다. 이 건물 북쪽 약 200m지점에 정세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환고사가 있습니다.

정호례는 본관은 오천, 내금위장 수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증 호조참판 의번의 양자로 갔습니다. 해남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평생에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해남 고을에는 선정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창녕조씨 후손들의 유적이 많습니다.
유후재는 청백리에 녹선 된 조치우의 묘하재사이며, 옥비는 대구부사 재임 때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한 옥비입니다. 조치우는 호가 정우당, 본관은 창녕,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중종반정 후 장령을 지내고 대구부사를 거쳐 사옹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하여 사임하고, 모친 상중에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후 조정에서 옥비 두 좌를 하사하여 그의 청렴결백한 덕을 표창하였습니다. 옥비 1좌는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의 유후재 속의 옥비각에 안치되어 있고 또 1좌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군 북면 지계동 청용산의 모원재 속의 옥비각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지산고택은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소모관이 되어 공을 세운 조호익의 종택입니다. 조호익이 1603년경 지산촌으로 이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옥의 배치는 ‘一’자형의 안채가 남향으로 세워져 있고, 전면 좌측엔 ‘ㄴ’자형의 사랑채가, 우측엔 ‘一’자형의 헛간채가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입니다. 동북쪽으로 경역을 달리하여 사당이 한 단 높은 곳에 토석담장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선조 9년 경상도 도사 최황의 무고에 의해 강동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부자의 칭호가 특사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배소에서 풀려나 소모관이 되어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 상원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받았습니다. 1587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그 후 성주목사, 안주목사, 성천, 정주의 목사를 역임한 뒤 사직했습니다. 뒤에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습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 저서로는 <지산집> <가례고증> <주역석해> 등이 있습니다.

도점서원은 지산 조호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2년(광해군 4) 모사리에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에는 지봉서원이라고 하였습니다. 1678년(숙종 4) 용호리로 이건하면서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4년 복원하였고, 1981년 보수하였습니다. 건물 6동과 조호익 신도비와 하마비도 있습니다. .

만취당은 1781년(정조 5)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이 살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 집은 안채와 중사랑채 및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당 뒤쪽에는 신주를 모신 별묘 및 보본재 등이 배치되어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집 뒤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은 조학신이 손수 심은 나무들입니다.

조학신은 1759년에 영조의 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임금이 장하다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 내승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지와 대전통편 각각 1부와 말 한필을 하사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임금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습니다.

귀애정은 조극승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지은 정자입니다. 귀애정 앞에는 방형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둥근 섬을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육각 정자를 섬 내에 두었는데 이 건물은 20여 년 전에 도괴되었으며 육각정자는 나무다리를 만들어 통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조극승의 호는 귀애, 관향은 창녕으로 현고서당을 창설한 북계 조용석의 현손이며, 화남면 귀호리에서 조경섭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돈령부 돈정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심학에 심취하고 대학강록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호연정은 병와 이형상이 영천에 정착한지 11년째 되던 해인 1710년경에 강학을 위해 건립한 정자입니다. 건물구조는 방형의 토석 담 정면 우측에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정자가 강변 언덕에 남동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평면은 가운데 대청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다음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입니다.

이형상의 본관은 전주, 호는 병와 또는 순옹입니다. 25세 되던 1677년(숙종 3)에 사마시, 1680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에서 4년, 외직에서 8년 모두 12년간 관직에 있었던 이외에는 81세의 일기를 마칠 때까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60여 종 20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성리학뿐 아니라 예악, 역사, 전기, 지리, 시문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실학에도 선도적 구실을 하였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 있습니다.

<병와유고>는 병와 이형상이 저술한 문집으로 10종 15책의 필사본으로 1979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저작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역학 관계 저술인 <선후천>,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속악을 모아놓은 <악학편고>, 고려 및 조선 초기의 가곡을 수집해 놓은 <악학습령>, 강화 및 수어책 관계 저술인 <강도지>, 제주도 관계 저술인 <남환박물지>와 <탐라순력도>, 국책주의록인 <둔서록>, 유목별 색인서인 <부부유목>, 잡집류인 <정안여분>. 대마도, 국속문자 등에 관한 저술인 <동이산략> 등입니다.

이경은부조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을 추모하여 세운 사당으로, 1786년(정조 10)에 어명으로 지어졌습니다. 부조묘란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을 말하며,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가 됩니다. 건물은 사주 대문과 협문, 묘우로 구성되어 있는데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일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묘우는 기단을 다른 건물보다 위계를 높이기 위해 장대석을 세벌대로 마련한 다음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올렸습니다. 영천댐 공사로 인해 노항동에 있던 용계서원을 옮기면서 부조묘와 제단도 함께 옮겨와 지금은 용계서원과 같은 권역 안에 있습니다.

이맹전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본관은 벽진, 호는 경은, 시호는 정간, 경북 선산 출신입니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김숙자, 김종직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으며 승문원 정자를 거쳐 1436년 정언이 되고, 얼마 뒤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 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 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고 나이 89세에 죽었습니다.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함안의 서산서원에 원호, 김시습, 조려,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 되었고, 선산의 월암서원에는 김주, 하위지와 함께 제향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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