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부산의 어느 핸드백 공장, 둘은 첫만남부터 서로를 알아봤다 그리고 28년 뒤..세계 1등이 되었다 [사람과 현장]

손현덕 2022. 8. 3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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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핸드백 신화..'제조의 神' 고학재 그리고 박은관

◆ 매경 포커스 / 손현덕 주필의 사람과 현장 ◆

50년 이상 핸드백 공장 밥을 먹은 고학재 씨.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시몬느 기술고문으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핸드백 제조 장인들이 한곳에 모여 샘플을 만드는 개발실에서 작업 중인 핸드백을 보여주고 있다. [김호영 기자]
대한민국 수산업의 대표주자인 동원이나 사조 같은 기업이 탄생하기 40년 전쯤인 일제강점기 말, 인천 제물포에서 수산업을 하던 거상이 있었다. 황해수산 창업자인 박창래 씨. 30대 후반부터 쌍끌이어선으로 연근해 수산을 주름잡고 영종도에서 어선의 건조 수리까지 하는 조선소를 운영했다. 수산물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시장을 조성하는 중개업무를 하고 냉동공장도 운영했다.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면 선주에게 금융을 제공하고 판매를 대행하는 객주(客主)기도 했다. 이른바 수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기업가였다.

아들 넷을 뒀다. 첫째, 둘째는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이어갔는데 셋째는 유별났다. 온실을 거부하고 정글로 나가겠다고 우겼다. 중학교 때부터 방학이면 두 달 정도 배를 태워 중국 상하이 앞바다까지 보내서 그런지 아들은 커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수출회사였다. 마침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신입사원 추천을 부탁한 기업가가 있었다. 핸드백을 만드는 청산이란 회사의 정홍덕 사장이었다. 지금은 세계 명품 핸드백 제조의 1위 기업이 된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은 그렇게 소공동 조선호텔 옆에 있던 청산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1980년 입사하면서부터 그는 해외영업을 맡는다.

장면을 바꿔 1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경상북도 상주에서 농사를 짓던 한 소년이 가출을 한다. 위로 형이 셋이 있었는데 모두들 돈 벌겠다고 고향을 떠났다. 막내에게 부모님을 맡기고 농사일을 떠넘겼다. 그는 농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비록 학교는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물건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썰매며 팽이며 놀이도구를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그는 어떤 물건을 보면 마치 인체를 해부하는 것처럼 부품의 구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눈썰미가 있었다. 마침 고향 친구가 연희동 가방공장에 취직해 있었다. 그는 무작정 상경해 친구를 찾았다. 그리고 미광봉제라는 가방회사에 취직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을 잘했다. 좀 더 큰 직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번째 직장이 에스콰이아였다. 봉제에서 가장 어렵다는 핸드백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내가 이 회사 공장 근로자 중에서 2년 내에 최고의 월급을 받지 못한다면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둔다. 그는 2년이 지났는데 넘버2밖에 안 됐다. 최고의 월급을 받는 사람은 소아마비에 10년의 재단 경력을 보유한 선배였다. 그를 넘을 수가 없었다. 2년하고 딱 4일이 지난 날 사표를 던졌다.

이 중졸의 어린 청년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청산의 공장장이었다. 1973년 정 사장은 핸드백 제조를 본격적으로 하겠다며 청산을 창업한다. 부산 초량구에 공장을 뒀는데 공장장이 에스콰이아 직원 6명을 무더기로 스카우트한 것이다. 공장장 눈은 정확했다. 청년은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정 사장이 그를 발탁한다. 핸드백 샘플과 패턴(기계 장비의 금형에 해당)을 만드는 개발실로 자리를 옮긴다. 5년이 채 안 돼 그 청년은 개발실을 총괄하는 실장으로 승진한다. 거기서 신입사원 박은관과 처음으로 조우한다. 그가 고학재란 인물이다.

핸드백 장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잘해야 한다. 해외로부터 좋은 주문을 따오는 것. 그리고 물건을 잘 만드는 것. 청산에는 박은관과 고학재라는 환상의 콤비가 있었던 것이다. 청산이 당시 얼마나 잘나가는 회사였냐 하면 매년 매출이 두 배씩 증가했다. 박은관은 5년 만에 해외영업을 총괄하는 부장이 됐고, 고학재는 생산과 개발을 책임지는 임원이 됐다. 고학재는 이때 난생처음 회사에서 보내주는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2주간 둘러본다. 그러면서 핸드백의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소위 명품이란 걸 본 것이다.

청산이란 회사가 급성장하게 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해외 바이어 한 곳에서 청산이 경쟁사 핸드백을 만들면 거래를 끊겠다고 한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 거절하기 힘들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경쟁사에 "다른 곳에 제조를 맡겨달라"고 사정 아닌 사정을 한다. 그때 의외의 카운터 제안이 들어온다. "미스터 박이 회사를 별도로 만들어 우리 물건을 만들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1987년이었다. 박은관이 시몬느라는 회사를 창업한 배경이다. 그러면서 해외 명품 핸드백시장을 노크한다. 정 사장에게 6명을 데리고 가겠다고 부탁을 한다. 거기엔 현재 시몬느 부회장으로 있는 백대홍 씨가 있었다. 동명목재 출신인 그는 무역은 물론 회계, 생산까지 경험한 인재였다. 정 사장은 몇 번을 안 된다고 하다가 그를 놓아준다.

박은관 회장이 사실 가장 탐낸 사람이 있었다. 고학재였다. 그러나 '고학재=청산'이었다. 정 사장에게 감히 고씨를 달라고 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가 자신을 따라오지도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선친의 유훈을 떠올렸다. 박창래 씨는 약 400평 되는 정원을 가꿨다. 거기에 소나무, 향나무 등을 심었다. 정원을 둘러보면서 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갓 심은 소나무가 운치 있을 정도로 크려면 족히 7~8년은 걸린다. 뿌리가 돌아가는 데 3~4년, 새순이 가지로 자라는 데 2~3년, 그리고 돌에 이끼도 끼어야 하고, 그게 시간이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다. 시간의 무게를 돈으로 사려는 건 만용이다." 고학재 씨는 박 회장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시몬느를 창업하고 7~8년 후, 그러니까 소나무가 제법 운치 있게 자랄 시간이 되자 청산을 역전한다. 그러면서 시몬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핸드백 제조업체로 성장한다. 청산은 성장세는 지속됐지만 기운이 쇠하기 시작한다. 고학재 씨는 쓴소리를 하고 회사를 떠난다. 그가 떠난 후 청산은 2년이 채 안 돼 폐업한다.

고학재 고문과 박은관 회장(오른쪽)의 인연이 남다르다. 1980년 처음 개발실장과 신입사원으로 만난 그들은 28년 후 생산총괄 사장과 기업 회장으로 다시 만나 1등 기업을 일궜다. 경기도 의왕에 소재한 시몬느 본사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 다정하다.
고학재 씨는 박 회장이 생각났다.

"처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때부터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열정과 실력은 검증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초임 과장에게 일에 전념하라고 사장이 기사 달린 차를 내줬겠습니까? 부잣집 아들이지만 붙임성이 좋고 겸손이 몸에 뱄습니다. 저는 중졸이고 그는 대학을 나왔지만 학벌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실제 나이는 제가 세 살이 많은데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회사에 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부담 주기 싫었거든요. 거기도 다 틀이 잡혀있는데 머리 굵은 제가 가면 자칫 분란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학재 씨가 청산에서 나오자 박 회장도 그가 생각났다. 시몬느를 창업할 때 가장 모시고 싶었던 상사였기 때문이다. "제가 신입사원으로 해외영업을 하는데 물건을 팔고 나면 늘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첫 질문은 '혹시 품질 안 좋은 게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품질에 대해서는 일절 타협이 없는 분이었거든요. 장인의 풍취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해외 트렌드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요새 외국서 유행하는 핸드백은 무슨 소재를 쓰는지, 디자인은 어떤지, 가격대는 주로 어느 정도인지 등을 물었습니다. 신입사원에게도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해외 주문이 많아지면서 그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영어였죠.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영어가 될 리가 없었죠. 언제부턴가 혼자 영어를 공부하더군요. 그러곤 해외 바이어를 같이 만나 상담하면 무슨 소리 하는지 눈치코치로 다 알아들었습니다."

박 회장은 지금도 고학재 씨가 쓰는 영어단어 3개를 기억한다. 바이어가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웨이트(wait), 스리 아우어(three hour), 뉴 원(new one)'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다려라, 3시간 내로 수정해서 새로운 것 가져오겠다는 말이었죠. 3시간은 수정하는 데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만들어 오면 바이어는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고학재 씨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러나 아직 시간이 안 됐다. 고학재 씨는 중국 칭다오(靑島)에 동천이란 회사를 만든다. 중국이 49%, 한국 측이 51%의 지분을 갖는 핸드백 제조회사였다. 박 회장이 공동 투자를 한다. 그래서 동천의 한국 측 주주는 박 회장과 고학재. 시몬느가 따온 해외 물량의 일부도 동천에서 제작하는 등 업무적으로도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그러다가 마치 두 사람이 미리 상의라도 한 듯 때가 됐다고 느낀 건 시몬느가 베트남에 3개의 공장을 지어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선 2008년이었다. 두 사람이 청산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지 28년이 지난 뒤였다.

박 회장이 동천에 있던 고 사장에게 "당신이 필요하다. 같이 일하자"고 제안한다. 고 사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시몬느는 중국 광저우에 공장을 뒀는데 중국만 해도 핸드백 제조의 역사가 20년은 되는 나라다. 기능공도 제법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아예 맨땅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 박 회장은 '공장의 달인' '제조의 신(神)'이 필요했다. 박 회장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 고학재였다"고 말한다.

고 사장은 동천 공장을 직속 부하에게 맡겼다. "나는 한국으로 간다. 잘 해라"는 말만 남기고. 그가 연봉은 얼마인지, 직급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박 회장도 마찬가지. 첫 월급이 나오고야 본인의 연봉을 알게 됐다. 드디어 박 회장을 만나 이제 그 밑에서 월급쟁이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고 사장. 딱 한마디만 했다.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겠다"고.

핸드백 공장은 어마어마한 노동집약산업이다. 손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명품은 탄생하지 않는다. 가죽에 바늘 한번 잘못 찌르면 전체를 다 버려야 하고 한땀 한땀 바늘구멍이 다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소위 이곳에선 테이블시스템이라는 독특한 방식이 존재한다. 마지막 작업을 테이블에서 30~40명의 장인들이 모여 조립하는 수작업 공정. 명품 핸드백을 대량으로 주문 생산하는 시몬느 같은 회사는 최대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라인을 만들고 거기에 마지막 손정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시몬느는 해외에 6개의 공장을 뒀다. 베트남에 세 곳, 인도네시아 두 곳, 캄보디아 한 곳. 모든 제품은 여기서 생산한다. 공장 면적을 모두 다 합치면 약 12만평. 이곳에 3만명의 근로자를 두고 일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찾은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과 비교해보면 핸드백 제조의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평택 반도체 공장 하나가 축구장 400개를 합친 87만평이다. 시몬느 한 개 공장의 40배가 된다. 여기에 근무하는 삼성 반도체 인력은 1만명(협력사 인력 제외). 시몬느 1개 공장 인원의 두 배밖에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20배나 노동집약적이다. 그런 대규모 인력을 숙달된 기능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안 되면 고 사장이 직접 재봉틀을 잡고 바느질을 해야 한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속 탑건처럼.

10대 시골 소년이 무작정 상경해 봉제산업에 몸을 담은 지 50년이 넘었다. 자그맣고 깡마른 체구인데 손은 거칠다. 바늘에 숱하게 찔리고 가죽에 닳고 닳은 고학재의 손이 핸드백만큼이나 아름답다. 오늘의 시몬느를 만든 아니, 대한민국을 핸드백 제조의 1등 국가로 만든 손이다.

'사람과 현장'은…

머리보다는 가슴, 가슴보다는 발로 쓰는 글을 좋아한다. 경제기사가 따분한 이유는 발로 쓰지 않고 머리로 써서 그렇다. 발품을 팔아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니다 보면 글이 나온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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