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만족도 최악 '꿈의 도시'..재정비 언제나 가능할까
재건축 연한 돌아오는 1기 신도시
5년내 25만7000가구 재건축 대상
용적률 200% 전후, 사업성 없어
규제완화 없인 사업 추진 불가능
2024년 마스터플랜 완성조차 의문
정부가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종합계획) 수립을 2024년으로 발표하자 지역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조했던 부동산 핵심 공약 중 하나인 만큼 빠른 추진이 기대됐으나 현 정부에선 사실상 ‘공급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뒤늦게 “1기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하네요.
사실 정부 계획대로 마스터플랜이 2024년 완성될지조차 의문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1기 신도시 재정비 계획은 재건축이 핵심입니다. 서울 도심이나 다른 지역에도 재건축 가능 연한이 한참 지났는데 사업 추진을 하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1기 신도시만 용적률 혜택 등으로 가능하게 하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게 뻔합니다.
한꺼번에 30만가구나 되는 재건축을 진행할 때 생기는 각종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전세난, 건설 자재값 급등 등 부담이 큽니다. ‘순환 개발’이 필요한데 1년에 3만가구씩 한다고 해도 10년이 걸립니다. 이걸 당장 할 수 있는 것처럼 공약한 윤 정부나 그 말을 믿고 기대감을 키웠던 신도시 주민들이나 모두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1기 신도시 재정비를 둘러싼 논란을 정리합니다.
▶5년 내 70.4% 재건축 대상=1기 신도시는 1980년대 후반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주택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추진했던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 중 일부로 탄생했습니다.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에 지정한 우리나라 최초 신도시입니다. 1991년부터 입주가 시작돼 1996년 마무리됩니다. 이때 이들 5개 신도시에 지어진 물량은 30만호가 조금 안됐습니다. (이후 지역별 부분 개발로 2021년 기준 36만5000가구까지 증가)
당시 서울 시내 주택수가 모두 170만채 정도였다는 걸 염두에 두면 1기 신도시 공급은 수도권 주택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도시개발이었습니다.
91년부터 입주가 시작됐다는 건 2021년이면 준공된 지 30년이 지난 단지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1기 신도시에 재건축 가능 연한이 지나는 아파트가 급격히 늘어나는 겁니다.
국토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올드 뉴타운(Old New-town) 쇠퇴에 대응한 대안적 접근: 1기 신도시 재고주택 관리를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5년 내 1기 신도시 아파트의 70% 이상이 재건축 대상이 됩니다. 올해 1기 신도시 전체 아파트 중 6만1000호(16.7%)가 재건축 대상이 됩니다. 이는 2023년에는 12만2000호(33.4%), 2024년 19만3000만호(52.8%), 2025년 24만1000호(66.0%), 2026년 25만7000호(70.4%) 등으로 급증합니다.
지역별로는 80%를 넘는 곳도 있습니다. 2026년이면 산본에 있는 아파트 3만5693호 가운데 84.2%(3만38호)가 재건축 대상이 됩니다. 신도시 규모별로 2026년이면 분당(12만6364호)의 72%(9만1140호), 일산(8만5547호)의 71%(6만749호), 중동(3만6235호)의 79.7%(2만8897호)가 재건축을 할 수 있는 법정 기간이 지납니다. 입주가 조금 늦었던 평촌(8만1653채)도 57.3%(4만6784채)가 30년을 채웁니다.
윤석열 정부에선 재건축 연한이 돌아오는 1기 신도시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악한 주거환경=준공 30년이 지나면 주택은 노후화하고 주거환경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기 신도시가 지어졌던 1990년대 초반까지는 전용 60㎥미만 소형주택이 대세였습니다. 주차공간은 1가구당 1대가 되지 않게 협소합니다. 1인 거주면적이 대폭 늘어났고, 1가구당 1대 이상 차량을 소유한 요즘 기준으론 1기 신도시가 영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선지 이들지역의 주거 만족도는 매우 떨어집니다. 경기연구원이 올 3월 1기 신도시 아파트 거주자 500명을 상대로 한 조사를 보면, 1기 신도시 주민의 83.8%가 ‘거주 아파트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세부적으로 응답자의 55.4%가 ‘주차공간 부족’을 가장 개선이 필요한 사항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뒤를 ‘차량진입 및 주차동선’(47.2%), ‘수납공간 부족’(47%), ‘각 실의 위치 및 크기’(45.6%), ‘화장실’(42.8%) 등이 불편하다고 답했습니다. 요즘 지어지는 새 아파트 입주민이라면 전혀 불편하지 않았을 것들을 가장 개선이 시급한 주거 환경을 꼽은 겁니다. 1989년 노태우 정부가 1기 신도시 추진을 발표하면서 내건 ‘꿈의 신도시’란 구호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됐습니다.
▶사업성 떨어지는 1기 신도시 재건축=아파트가 낡아 살기 어려워지면 부수고 새로 짓든지 고쳐 써야 합니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을 재건축, 고쳐 쓰는 것을 ‘리모델링’이라고 합니다. 재건축은 지은 지 30년이 지나 안전진단을 거쳐야 가능합니다. 리모델링은 준공한 지 15년 지나면 별다른 절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재건축이 좋습니다. 새로 짓는 만큼 일반분양도 많이 나오고, 설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단지도 더 멋지게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1기 신도시 단지의 용적률이 대부분 200% 내외라는 점입니다. 도시별로 일산이 169%로 가장 낮고, 분당은 184%, 평촌은 204%, 산본은 205%, 중동이 226%입니다. 2기 신도시의 용적률(159∼200%) 보다 높습니다.
신도시가 지어진 지역의 법적 허용 용적률은 대부분 최대 300% 이하 수준이며, 지자체별로 추가로 더 낮은 수준으로 용적률 상한선을 정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1기 신도시 아파트가 대부분 용적률 200% 내외로 지어졌다는 건 현재 법 체계에선 허용 가능한 용적률 최대치까지 올려줘 봤자 일반 분양 물량이 많이 나오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대에서 실망으로=그래서 1기 신도시 주민들은 재건축 보다는 리모델링을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올 초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집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이었던 올 1월 ‘1기 신도시 재정비 특별법’을 만들어 용적률을 500%까지 올리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10만 가구를 추가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습니다. 이는 취임 후 ‘11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됩니다.
1기 신도시는 술렁입니다. 조합원들은 작은 분담금만으로 재건축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 겁니다. 리모델링을 추진하던 단지를 포함해 너도나도 재건축 추진에 동참하겠다고 검토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이달 16일 발표한 윤석열 정부 첫 공급대책은 1기 신도시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270만호 주택공급 계획(8·16대책)에 1기 신도시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 연구용역을 하반기에 하고, 2024년 중 재정비 마스터플랜 수립을 추진한다”고 언급하는 게 다였습니다.
마스터플랜은 일종의 밑그림입니다. 밑그림을 2024년 내놓는다면 개별 단지 사업 추진은 언제 가능할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곳곳에서 ‘사실상 공약파기’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집값도 바로 반응합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8·16대책’ 직전 8월 둘째 주(12일 기준) 보합세(0%)를 보이던 1기 신도시 아파트값은 셋째 주(19일 기준) -0.02%, 넷째 주(26일 기준) -0.03% 변동률을 기록하며 낙폭을 키우고 있습니다.
▶ “어쨌든 윤 정부 내 1기 신도시 재정비는 불가능”=윤석열 대통령은 실망한 1기 신도시 주민들에게 “1기 신도시 마스터플랜은 예전에 5년 걸릴 사안을 최대한 단축시킨 건데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정부측 해명이 거듭될수록 시장에선 “어쨌든 윤 정부 내에서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이 확산됩니다.
원희룡 장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작은 역세권 철도부지 공공부지 땅 하는데도(계획을 세우는 데도) 50개월 걸렸고, 3기 신도시 계획 세우는 것도 36개월 걸렸다”며 “(윤석열 정부의) 거짓말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마스터플랜 용역 결과를 봐야 하는(결과를 알 수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당길 수 있는 요인이 있다면 당기겠지만, 24년까지 마스터플랜 내놓는다는 건 저희로서 최대한 빠른 일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정부가 9월 마스터플랜 연구발주를 내놓고, 1기 신도시가 속한 5개 지자체장과 만나 의견을 나눈다고 해도, 윤 정부 5년 내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나오긴 사실상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전문가들은 1기 신도시 마스터플랜도 2024년까지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고 내다봅니다. 풀어야할 숙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 형평성 문제입니다. 용적률을 높여준다면 서울 강남, 목동, 상계동 등 다른 지역 재건축 단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기 신도시만 규제 완화를 하는 게 가능할까요?
이주 수요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서울 강남권 아파트 규모와 맞먹는 30만가구나 되는 물량이 집중적으로 재건축되는 상황입니다. 막연히 순환개발 정도로 설명해서는 답이 안나옵니다. 어떤 단지, 어느 지역을 먼저 해야 할까요?
이런 숙제를 다 해결한다고 해도 주택시장 상황에 따라 마스터플랜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본격화한 주택시장 침체가 이어진다면 굳이 1기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공급보다 주택 수요가 모자란 마당인데요! 주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사업이 진행될 리 만무합니다.
박일한 기자
jumpcu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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