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 강원 백두대간 대탐사] 19.동해와 정선·한양 이어주는 군사 교통 요충지 '더받이령'

전인수 2022. 8. 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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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 서린 한양가는길.. 일제강점 얼룩 '이기' 지명에 고스란히
동해시, 4개 코스 생태탐방로 조성
이기마을 귀터 출발~임계 가목리 코스
백기완 선생 '노나메기 마실집' 터 마련
장준하 선생 새긴돌·통일시비 조성
'장·백 공원' 추진 백두대간 의미 더해
'귀터' 일제강점기 시절 '이기리' 명명
일제 잔재 대신 '더받이길·더받이령' 써야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길 정상에서 등짐과 봇짐을 메고 든 장돌뱅이 보부상들이 거상의 꿈을 꾸며 험하고 험한 이 길을 수도 없이 오갔다.(재현한 모습)

아! 백두대간


동해·삼척지역에 있는 백두대간은 동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길이었고, 주민의 삶과 애환이 깃든 장소이자, 군사·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구한말 일명 ‘백봉령도로’라고 하는 국도 42호선이 생기기 전까지 삼척·동해지방에서 영서지방과 한양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백두대간의 길목이라 할 수 있는 ‘더받이길’이다. 현재 동해시 이기동에서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까지 이어지는 옛길이다. 우마차가 넘나들던 고개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옛날 관직을 향한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희망의 길이고, 동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삼척과 정선쪽에서는 삼베나 약초 등 특산물 봇짐을 지고 넘나들던 보부상의 길이기도 했다. 동해의 북평장터와 정선의 임계장이 보부상의 목적지였고 물물교환 장소이기도 했다.

희망과 애환이 서린 이 길은 오래전 발길이 끊긴 상태이다. 백두대간 트레킹이나 백봉령·괘병산 등을 오르는 등산객이 지나는 길이다. 현재는 동해시에서 ‘백두대간 동해 소금길’이란 이름으로 4개 코스의 생태탐방로를 조성했다.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길 초입에 설치돼 있는 독립·통일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새긴돌’과 ‘통일시비’ 모습.

이 가운데 이기마을 귀터(동점)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이기령 정상을 통과해 부수베리계곡을 따라 정선 임계 가목리(부수베리)로 가는 길이다.

백두대간 입구 이기동 9번지에는 동해시가 지난해 1600여㎡의 부지에 등산객들을 위한 주차장을 마련했다.

이 부지는 원래 통일·민주화운동의 대부 백기완 선생이 새로운 공동체 생활양식으로 평생 추구했던 ‘노나메기 마실집’을 짓기 위해 통일문제연구소를 통해 마련한 터이다.

노나메기 마실집을 짓지 못한채 지난해 돌아가셨지만, 백기완 선생은 백두대간 더받이령 초입에 독립·통일운동의 큰 어른이신 장준하 선생을 기리는 ‘새긴돌’과 ‘통일시비’를 경기도 파주에서 옮겨다 놓았다. 통일운동가로서 같은 길을 걸어온 두 거인의 유적이 있는 이 곳은 지역의 뜻있는 시민들이 장준하·백기완 선생의 정신을 널리 알릴수 있도록 ‘장(준하)백(기완) 공원’으로 조성을 추진하고 있어, 백두대간 등산의 의미를 더 할 전망이다.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령 정상 가기전에 있는 국시(돌무덤) 모습. 옛날 군사요충지였던 이 곳에서는 수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져 사상자가 많이 발생해 돌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의 또다른 이름은 동점(銅點)이다. 철광석이 많이 나오고 그 가운데 동(銅)이 가장 많아 동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이후 ‘귀터’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철광석과 동이 많이 나는 ‘귀한 터’란 뜻이다.

‘귀터’가 어쩌다 ‘이기리’로 바뀌었는데,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한자인 귀 이(耳)자에 터 기(基 )자를 따서 ‘이기리’로 명명했다. 순수 우리말을 없애고 귀할 귀(貴)자가 아닌 사람의 청각기관인 귀 이(耳)자를 지명으로 써 혼돈을 주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지명 정책이었다는게 정설이다. 임진왜란때 왜인들이 조선인들을 죽이고 귀를 잘라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치욕의 역사로, 이 지명에도 이같은 치욕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길 정상에 ‘호식총’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다. 언제 누가 죽어 생긴 무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환을 당한 사람의 무덤인것은 확실하다. 150년전에는 이 지역에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고, 호랑이에게 물려간 화전민의 수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제라도 일제의 잔재인 ‘이기리·이기동·이기령’이라는 말을 쓰지말고 ‘더받이길·더받이령’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쓸 것을 제안한다. 더받이길은 ‘기름길’ 또는 ‘노다지길’로도 불린다. 김흥우 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이사장은 “여러 군대가 주둔했던 이 곳에 짐 한번 짊어지고 물자, 무기 등을 옮겨주면 금전을 ‘더 받는다’, ‘노다지를 캔다’라는 뜻이 담겼다는 어른들의 증언을 받아놓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이외에도 이 지역이 철광석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굴을 뚫어 철광석을 채광했다. 이 곳에 철로를 놓고 가시랑차(무한궤도가 달린 수레)로 지금의 삼화동에 건설한 제철소까지 실어날라 철을 생산한 뒤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해 갔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동굴과 철로, 철광업소 터 등 흔적이 남아있다.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길에는 요즘 한창 통일꽃 이라고 불리우는 봉선화가 곳곳에 심어져 있다.

6·25 전쟁때도 이 곳은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지였다. 미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수의 남과 북 군인들이 괘병산과 갈비봉 자락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더받이령 정상 가기전에 있는 여러개의 국시(돌무덤) 등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 마을의 한 어른은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사람이 움직이는게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조용해진 후 올라가보니까 모든게 숯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소이탄 같은 무기를 사용한 것 같았다. 사람도 나무도 다 타고 재가 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앞서 삼국시대에도 더받이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점으로 격전지였다. 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 이어져 있는 더받이령 정상에는 주막이 두 개 이상 있었던데다, 지금도 가마터가 여럿 남아있다. 120㎝짜리 고로(가마)가 꽤 여러개 발견됐는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든 장소이다.

현재 이 지역 일대를 소금골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원래 소금골이 아니라 ‘쇠 금(金)’자를 써서 ‘소금(金)곡’이라 불러야 한다. 지역명은 소금과 상관이 없는 쇠가 많이 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따라서 ‘소금길’에서 한글로 ‘소금’이 아니고 한자로 ‘소금(小金)길’이 돼야 한다. 이곳에는 금곡과 소금곡·대금곡이 있다. 금곡은 쇠가 나는 중심 마을이고, 소금곡은 쇠가 조금 나는 마을, 대금곡은 쇠가 많이 나기 때문에 불린 마을 이름이다.

▲ 백두대간의 길목 동해시 이기동 더받이길은 옛날 마차 지나다니며 물자를 실어 나를 정도로 길이 넓다.

더받이 마을이 고향인 김흥우 이사장은 “중간중간에 군이 주둔하려면 물이 있어야 하고, 은폐가 잘 돼야 하고, 적이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피할 수 있어야 하고, 진격을 할 때 바로 갈 수 있어야 하고, 아군이 군사지원 요청을 하면 즉시 움직일수 있어야 하는데, 더받이령이 바로 그런 곳”이라고 증언했다.

김 이사장은 이어 “백봉령으로 가면 군대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군대가 상주를 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더받이령 정상에서 조금 더 가면 있는 ‘부시베리’라는 곳의 ‘부시’는 불을 지피는 부싯돌을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가 이 곳에서 불을 지펴 철로 무기를 만들었다는 증거”라며 “고구려가 신라 진영을 빼앗았을 때는 이쪽에 있는 고로를 이용했고, 신라에 뺏겼을 때는 저쪽에 가서 부시베리를 이용하는 등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더받이령 꼭대기에 대형 분지가 있으면서 물이 많고, 무릉별유천지 쪽으로 철광석을 끌어올릴수 있다. 이 곳에서는 백봉령으로 빠지는 길, 달방쪽으로 내려가는 길, 강 따라서 도전리로 나가는 길, 두타산쪽으로 내려가는 길, 또 옆 능선을 타고 무릉별천지쪽으로 내려가는 길 등 사통팔달로 움직일 수 있어 군사적으로나 교통으로나 요충지이다 보니 이 곳을 빼앗기 위한 전투가 수없이 많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금곡마을은 현재 무릉별유천지로 환골탈태했다. 무릉3지구라 불리는 이 지역은 지난 1968년부터 50년동안 시멘트 생산을 위한 석회석 채석장으로 사용되다 지난 2017년 채광이 종료됐다. 채광을 위해 산과 바위 등을 깎고 잘라 놓아 비탈진 암벽 절개지가 사방에 걸쳐 있는데, 무려 121만여㎡이나 되는 백두대간이 훼손된 것이다. 원래 자연상태 그대로 복원을 해야 하지만 그대로 복원하는게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동해시와 쌍용C&E측이 이 일대가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비경이라는 점을 감안해 폐광지만의 특수한 경관을 활용해 복합체험관광단지로 개발, 지난해 말 1차 사업을 완공, 개장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시멘트 생산을 위한 석회석 채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백두대간의 훼손이 어느정도까지 진행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전인수 jintru@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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