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은 되고 '사회주의'는 불가? 대체역 심사기준은

2022. 8. 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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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 '양심 결정의 근거', '양심 결정의 실천', '대체역의 이해 및 의지' 살펴.. 제도 개선 방안도 논의 중
‘사회주의자’인 나단씨가 2021년 9월 6일 서울지방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전쟁없는세상 제공


“개인의 양심을 다른 사람이 판단하고 심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양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다. 양심을 심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군복무 거부 신념의 진지함과 대체역제도의 이해와 의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신청인에게 혹시 군복무 거부와 관련해 일치하지 않은 언행이 있는지, 이에 대한 성찰과 변화가 있는지 살펴본다는 의미이다.”(양여옥 대체역 심사위 비상임위원)

대체역 심사위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여부를 결정하는 기구로 2020년 6월 병무청 산하에 설치됐다. 출범 이후 올 7월까지 대체복무 신청은 총 2713건이고, 2418건을 처리했다. 이 가운데 인용 결정은 2411건으로 99.7%의 인용률을 기록했다.

‘종교적 신념’은 2403건 중 2400건을 인용했고 3건을 기각했다. 여호와의증인이 대부분이지만, 기독교 종파인 감리교 신자도 1명 포함됐다. 종교 외에 ‘개인적 신념’은 15건 가운데 인용 11건, 기각 1건, 각하 3건 등으로 집계됐다. 각하는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거나 신청 자격에 미달해 심사를 진행하지 않는 결정이다.

심사위는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29명으로 꾸린다. 상임위원은 위원장과 사무국장이다. 비상임위원 27명은 국가인권위원장,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병무청장, 국회 국방위원회, 대한변호사협회장 등이 추천한 이들이 맡는다. 여러 기관에서 추천한 이들로 구성된 만큼 의견도 다양해 회의 때마다 치열한 논쟁이 펼쳐진다고 한다. 현재 위원장은 공석이다. 지난 2년 동안 위원장 2명이 사임했다.

“사회주의는 평화주의” 대체역 심사위가 개인적 신념에 따른 신청 가운데 유일하게 기각한 1건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평화주의 신념’을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한 사례다. ‘사회주의자’인 나단씨(32)는 2020년 10월 대체역 편입을 신청했지만 2021년 7월 기각 처분을 받았다.

나씨가 대체복무 신청 당시 심사위에 제출한 진술서와 지난 8월 2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밝힌 내용을 종합하면, 그의 병역거부 이유와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나씨는 집회·시위 현장 등 사회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폭력을 목격하거나 직접 겪으면서 국가 폭력에 반대하는 신념을 갖게 됐다. 아울러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이들의 신념인 평화주의를 접한 뒤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나씨는 “국가 폭력을 향한 거부감이 신념이 됐고 나아가 평화주의, 병역거부 등이 한데 묶이게 됐다”라며 “국가가 행하는 폭력의 일부분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회주의를 공부하면서 국가의 가시적·비가시적인 각종 폭력은 결국 ‘자본주의 구조’에서 비롯한다고 인식하게 됐다. 상대적인 맥락 속에서 폭력의 개념을 이해하고 “폭력의 반의어는 비폭력이 아닌 평화”라는 기준을 세웠다. “평화는 곧 해방”이라며 “내게 사회주의는 평화주의의 다른 말”이라고 말했다.

나씨는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지금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며 “(사회주의 사회에선) 이윤을 위해 일어날 전쟁도 없고, 고통받는 가족·민족·사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주의 관련 활동과 “국가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환상을 깰 수 있도록 고발하는 활동”을 이어왔다.

대체역 심사위는 나씨의 신청을 두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다수 의견인 기각 결정이 났다. 심사위는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해 군복무를 거부하지만 모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런 신념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반면 인용 결정을 낸 소수 의견은 “신청인의 평화주의 신념은 물리적 비폭력주의를 넘어 계급, 인종, 젠더 등에 따른 차별과 억압의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주요 장치로서의 국가나 자본을 폭력으로 이해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상은 모든 전쟁과 군사활동을 거부하는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2010년 12월 22일 참여연대, 전쟁없는세상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쟁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행정소송 결과는? 나씨는 심사위 결정에 불복해 2021년 10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올 9~10월쯤 1심 선고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심사위 결정과 관련한 첫 행정소송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소송 결과에 따라 향후 심사위의 심사 과정과 판단 등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씨는 심사위 결정 이후 현역 입영을 거부했다. 병무청은 그를 수사기관에 고발했지만 사건은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검찰은 행정소송의 결과를 지켜본 뒤 나씨의 기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나씨는 “기존에 대체역 심사위가 ‘인용한 양심’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라며 “심사위가 양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체복무가 가능한 양심과 그렇지 않은 양심을 자의적으로 나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양심의 실체를 글과 말로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진정한 양심이 있더라도 이를 표현할 능력이 없다면 대체복무를 할 수 없다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앞서 심사위는 2021년 3월 ‘동물해방’ 신념을 가진 동물권 활동가의 대체복무를 허용했다. 신청인은 동물도 존엄한 삶을 살 권리가 있는 생명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채식주의를 행동으로 옮겼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의 연장선에서 군복무 거부를 선택한 점이 인정됐다. 인권과 평화 관련 활동을 한 사실도 인용 결정에 영향을 줬다.

대체복무제도 개선 방안 논의 대체역 심사위는 크게 ‘양심 결정의 근거’, ‘양심 결정의 실천’, ‘대체역의 이해 및 의지’ 등 3가지를 살펴본다. 신청인은 전쟁과 살상을 금지하는 종교적 가르침이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세계관 등을 제시해야 한다. 종교 및 사회 활동 등 신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행위도 입증해야 한다. 대체역의 도입 취지와 복무내용을 인식하고 이를 수행할 의지가 있는지도 밝혀야 한다.

심사 절차는 세 단계로 나뉜다. 우선 심사위에 신청서와 진술서 등 필수서류를 내야 한다. 그러면 담당조사관이 현장·온라인 등에서 사실조사를 한다. 사전심사를 거쳐 전원회의 심사를 통해 인용 여부를 최종 판단한다. 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은 신청인은 판결문 사본 등만 제출하면 사실조사와 사전심사가 생략된다. 무죄 확정자의 평균 심사기간은 23.8일, 그외 신청자는 228.4일이라고 병무청은 밝혔다.

필수서류는 주변인(가족·친구 등)의 진술서와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신도증명서(종교적 신념에 따른 신청에만 해당) 등이다. 이런 서류가 없으면 각하 결정을 받는다. 이전에는 부모의 진술서와 가족관계증명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등까지 필수서류에 포함됐다. 지난 2월부터 제외했다. 대체복무 신청에 부모의 허락이나 동의를 강제하는 건 부적절하고, 부모가 없거나 한부모가정을 고려하지 않은 요소라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병역거부 신념을 형성한 시기가 대부분 중고등학교 시절로 초등학교 생활은 관련성이 적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처럼 대체역 심사위는 심사제도 개선 방안을 계속 논의 중이다. 심사위는 ‘종교적 신념’과 ‘개인적 신념’으로 구분한 고려요소를 2020년 11월 하나로 단일화했다. 기존 심사 항목 8개를 6개로 조정하고 그 아래 17개 세부 요소를 뒀다. 심사위는 “고려요소를 명확하고 구체화해 신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심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심사위는 2021년 6월부터 지난 7월까지 대체역제도 전반의 발전방안을 연구하기 위한 분과를 운영했다. 그 결과 여러 형태의 병역거부자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향후 위원들이 다양한 심사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참고자료 초안을 마련했다고 심사위는 밝혔다.

또 ‘36개월, 합숙, 교정시설’인 현행 대체복무의 기간·형태·분야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심사위는 제도 개선 방안이 확정된다면 제도를 총괄하는 국방부에 건의할 예정이다.

심사위는 병역법에서 대체복무를 아예 분리하는 방안도 논의한 바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병역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에 대체복무를 병역의 한 종류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일부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심사위는 “한국이 징병제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병역제도의 근간을 뒤집는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내부에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로 마무리했다”고 했다.

감리교 신자도 종교적 이유로 신청 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대체복무는 예비군도 가능하다. 이들은 3박4일 동안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면 된다. 올 7월까지 신청자는 총 27명이다. 심사를 완료한 14명 가운데 12명이 인용됐다. 기각된 사례는 없다. 각하와 철회가 각 1명씩이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는 9명, 개인적 신념은 3명이다.

종교적 신념 중에는 기독교 종파인 감리교 신자도 있다. 그는 감리교 소속 ‘한국기독학생회’에서 활동했다. 군복무를 거부하는 특별한 교리는 없다. 사회복무요원으로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복무를 마쳤다. 신청인은 신앙적인 이유로 병역거부 신념을 갖게 됐고, 사회복무요원으로 지내며 양심이 발전됐다고 한다. 심사위는 군복무 거부 양심의 진실성과 진정성 등을 인정해 지난 5월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개인적 신념에 따른 대체복무 예비군 중에는 예수교장로회 신자 A씨도 포함돼 있다. 그는 기독교 모태 신앙인으로 학교폭력 경험, 군대 폭력에 의한 친구의 극단적 선택, 유학 시절 겪은 강도사건 등을 통해 총기 사용에 두려움을 갖게 됐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전쟁과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신념도 있다. 전문연구요원으로 복무 당시 총과 수류탄을 다루는 훈련 중 공황상태에 빠졌다. 강박감과 불안 증세로 정신과 진료까지 받았다. 심사위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전쟁과 살상을 반대하는 신념이 확고해졌고, 양심에 반하는 군사훈련을 받으면 본인의 삶과 존재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A씨의) 절박함이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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