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 든 여자는 무적이었다" '모가이버'가 되고 느낀 해방의 기쁨[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twitter.com/flatflat38 2022. 8. 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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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반려공구 세 가지를 추천한다면?

최근 한 드라마에 여성이 남성을 집으로 불러 전등을 갈아달라 요청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업무상 갑을관계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여성은 이런 일에 취약하고 무능력하다는 시대착오적인 설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려공구>(라이프앤페이지)를 출간한 모호연 작가는 “집안일의 일부이지, 성별의 문제가 아닌데 아직도 (드라마에서) 그런 식으로 다뤄졌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복잡했다”라고 말했다. 지인들에게 ‘모가이버’라 불리는 모 작가가 썼지만 <반려공구>는 공구 활용을 위한 실용서는 아니다. 공구를 사용하면서 “내 생활의 어려움을 나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효능감, 타인에게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맛본 이의 생생한 증언에 가깝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친구이자 든든한 파트너”라서 ‘반려공구’다.

모호연 작가가 쓴 <반려공구>는 공구를 사용하면서 “내 생활의 어려움을 나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효능감, 타인에게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맛본 이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책이다. 이다 작가 제공

시사프로그램 작가 출신으로 <반려물건>,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공저)를 낼 정도로 살림에 진심인 모 작가는 “내 만들기 인생은 전동드라이버를 사기 전과 후로 나뉜다”라고 말한다. 8년 전 자취 시작 후 이케아 매장에 쇼핑 갔다가 기념품 삼아 구입한 전동 드라이버는 “‘도구’를 사용하는 기쁨”을 깨닫게 했다.

“마침 컴퓨터 모니터 받침대가 망가져서 ‘한번 해볼까’ 하며 시작했어요. 딱 한 번 만들어 보니까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구 사용이 별것이 아니었구나’로 이어졌어요. 공구라는 게 진입 장벽이 높지만, 한번 사용해 보면 어떻게든 쓸 방법을 찾게 돼요. 재밌으니까요.”

전동 드릴과 전동 드라이버만 가지고도 정말이지 다양한 걸 만들 수 있었다. 모니터 받침대, 멀티탭 덮개, 키친 테이블, 책장 등을 만들다가 급기야 벙커 침대에까지 이르렀다. 침대 아래에 짐을 두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벙커 침대 조립에는 단 이틀이 걸렸다, 비슷한 시기에 새 옷장을 조립하고 애매한 공간에 맞는 책장도 하나 만들었다. 공구를 쓰는 삶은 수납 공간을 늘리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도 바꿨다.

“사실 공구를 사용하기 전에도 잘살긴 했지만 약간 ‘버티는’ 면이 없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화장실 조명이 고장 나면 촛불을 켜고 쓴다든가, 커튼을 못 달면 창문에 현수막을 쳐놓고 산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워낙 내향적인 성격이다 보니까 집에 사람을 들이거나 누구한테 부탁하는 게 불편해서 계속 미루게 되는 거죠.”

집은 살아있는 생물 같아서 끊임없이 손볼 일이 생긴다. 여름에는 곰팡이가 생길까 제습을 하고 겨울에는 동파 걱정을 해야 하며 살림살이는 수시로 고장 신호를 보냄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반려공구를 겸비한 뒤 모 작가는 적극 대처에 나설 수 있었다. 유튜브나 블로그에 관련 정보가 많다 보니 검색을 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전문가가 해야 하는 일’을 가늠할 수 있었다. 덕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새로 산 오븐이 선반에 안 들어가자 망가진 옷장 문짝을 재활용해 레일 선반을 만들었다. “내가 이걸 만들었어!” 모 작가는 매일 쓰는 물건을 만들었을 때 효능감이 더 크다고 했다.

드라이버는 문손잡이나 벽 스위치, 전등 교체뿐만 아니라 무엇을 조립하든 마지막에 단단하게 조일 때도 능력을 발휘한다.

“전동드릴 한 번 써보신 분들은 이게 되게 쉽고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목공을 하게 됩니다. 의외로 굉장히 쉬워요. 마치 레고쌓기 하는 것처럼요. 레일 선반도 드릴과 드라이버만 있으면 만들 수 있어요. 기술은 많이 발전해 있고 특정 도구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공구를 사용해 고쳐쓴 물건은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지구 환경에도 폐를 덜 끼칩니다”

“사랑하는 물건의 생애주기를 늘리는” 데에도 공구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모 작가는 “그렇게 함께한 물건은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지구 환경에도 폐를 덜 끼친다”라고 말한다. 키 큰 독서등의 파이프가 노화돼 끊어지면 잘라내 단스탠드로 만들고, 점퍼가 낡아 더이상 입을 수 없게 되면 소매를 잘라 토시로 리폼하는 식이다. 새 물건을 사들이는 행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모 작가에게 리사이클링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버려야 될 물건이 생기면 그게 어떤 만들기의 재료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물건이 돌고 돌다 보니까 집 안 자체가 하나의 생태계로 느껴져요. 내 집을 하나의 지구라고 생각해보면 수명을 다한 물건이라도 어떻게든 활용해야겠다 싶었고 그래서 만들기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

모 작가는 AS(애프터서비스) 자체를 생략하는 관행도 마케팅의 일종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온라인 클릭 몇 번이면 택배로 금세 물건이 도착하는 세상이지만, 혹 고장이라도 나면 부품이 단종돼 난감해지기 일쑤다. 수리나 수선하는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수리비보다 새로 사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경우도 많다. 모 작가가 지난해 구입한 전동드라이버는 내장배터리 제품이다. 대부분의 제품은 배터리가 생명을 다하면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데 급히 사다 보니 그 부분을 챙기지 못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줄자를 활용하느냐와 못 하느냐의 차이는 엄청 나다.

“배터리 성능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더는 쓸 수 없는 제품은 소비자도 덜 구입하면 좋겠고 무엇보다 제품을 만드는 기업도 많이 고려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또 어떤 제품이든 리사이클링이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모 작가는 “수리하고 수선하는 행위가 우리가 놓치고 있던 수많은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 볼프강 M. 헤클의 <리페어 컬쳐>를 언급했다. 책은 20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문을 열고 미국, 독일 등지로 퍼져나간 리페어 카페 HUIJ를 소개한다. 이 카페에서 사람들은 물건 고치는 법을 연구하고 노하우를 공유한다. 나아가 제품의 가격과 수명의 관계 같은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 모 작가는 “주민센터에서 공구를 대여해주고는 있지만 사용법을 알려주진 않는다”라고 아쉬워하며 “수선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고쳐 쓰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현재 모 작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무엇이든 만들고 고치는 모호연의 수선일지’를 연재하고 있다. 위태로운 충전케이블 수리법, 책장 옆 코너 선반 만들기, 낡은 헤드폰 이어패드 교체법 등을 소개했다.

<반려공구>에는 망치, 렌치, 톱 등의 친숙한 공구부터 타카, 시계 공구 등 전문가의 영역일 듯한 공구가 등장한다. 모 작가는 가위부터 접착제, 실리콘, 재봉틀까지 공구의 범주에 넣었다. ‘반려공구’라고 해서 반드시 ‘공사 현장’에서 쓸 만한 장비를 떠올릴 이유는 없다. 인터뷰를 하는 모 작가의 귀에서 볼트로 만든 귀고리가 반짝였다. 망가진 귀고리에서 떼어낸 핀을 에폭시접착제로 볼트에 붙였다고 했다. 플라이어 하나만 있으면 알루미늄 캔의 고리도 ‘메탈릭’한 여름 팔찌로 변신이 가능했다.

“반짇고리나 구급상자는 집에 있잖아요. 공구함도 요즘은 가장 많이 쓰는 몇 가지를 담은 반짇고리 크기 제품이 많이 출시돼 있어요. 공구함도 일종의 구급함이라고도 생각이 들어요. 급할 때 꺼내 쓰니까.”

“지금의 공구들은 인간의 부족한 힘이나 근력을 보완해주는 굉장히 좋은 도구로 발전했어요. 신중하고 집중력이 높은 여성들이야말로 공구를 들면 ‘무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세트로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구해서 채워도 된다. 또한 비싸다고 무조건 좋은 장비는 아니다. 모 작가가 애용하는 톱은 3천원, 펜치는 2천원에 다이소에서 산 제품이다. 대형마트 공구 코너나 동네 생활용품점도 좋고 인터넷쇼핑몰에서 후기를 참고해 구매해도 된다.

“공구와 친해지기 전에 좋은 것부터 사는 건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비싼 돈 들여 샀는데 사용에 실패하면 내가 잘못한 것이 되어 연장 탓을 할 수 없게 되잖아요(웃음). 무엇보다 실패의 기억이 오래 남으니까요.”

“집고 고정하고 자르는 게 모두 가능한” 펜치는 맨손으로 망치질할 때 못을 고정하는 역할도 해낸다.

공구 외에 신경 써야 할 것은 보조용품이다. 자칭 ‘쫄보’였던 모 작가가 한 번도 다치지 않은 데에는 이런 준비가 한몫했다. 손에 땀이 많은 체질이라 공구를 쓸 때는 손바닥이 코팅처리가 된 목장갑을 반드시 착용한다. 망치질할 때 각도가 안 맞아 못이 튈 경우를 대비해 보안경도 필수다. 사포질할 때는 방진 마스크를 쓴다.

“두려워할수록 안전하게 쓸 수 있어요. 지금의 공구들은 인간의 부족한 힘이나 근력을 보완해주는 굉장히 좋은 도구로 발전했어요. 근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체구가 작은 여성들의 신체적인 약점을 공구가 충분히 도와주기 때문에, 신중하고 집중력이 높은 여성들이야말로 공구를 들면 ‘무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첫 반려공구로 갖출만한 3가지로 모 작가는 드라이버, 펜치 그리고 줄자를 꼽았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드라이버는 문손잡이나 벽 스위치, 전등 교체뿐만 아니라 무엇을 조립하든 마지막에 단단하게 조일 때도 능력을 발휘한다. “집고 고정하고 자르는 게 모두 가능한” 펜치는 맨손으로 망치질할 때 못을 고정하는 역할도 해낸다. 의외의 선택은 줄자였다.

“줄자로 공간이나 물건을 재서 수치를 알게 되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가구나 옷을 샀다가 중고사이트에 내놓는 분들이 많아요. 자를 재는 버릇을 들이면 물건을 사서 반품하는 일도 줄어들 거예요.”

모 작가와 10년을 함께 산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작가는 “1가정 1모호연”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반려공구’를 갖춘다면, 당신도 “생활 속 불편을 스스로 해결하는 용감한 삶”을 살 수 있다. 김혼비 작가는 <반려공구>를 읽고 타카를 사서 망가진 서랍장을 고쳤다고 추천사를 썼고, 김하나 작가는 시계 공구를 사서 시계 배터리를 ‘셀프 교체’했다는 후기를 SNS에 남겼다.


장회정 기자 longcut@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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