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풍년이 재앙..대체작물 심으면 쌀값·식량안보 둘다 잡아 [스페셜 리포트]

정혁훈 2022. 8. 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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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REPORT : 되풀이되는 쌀시장 불안 ◆

18일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삼군리 논에서 추수가 이뤄지고 있다. 박충기 농부는 "지난달 햇빛이 너무 좋았던 데다 비 피해가 없어 작황이 좋다"고 말했다. [정혁훈 기자]
지난 18일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삼군리 들판. 올해 이른 추석을 앞두고 조생종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최근 몇 차례 폭우 탓에 논바닥이 다 마르지 않았지만 콤바인이 작업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벼가 튼실하게 자란 덕에 알곡이 잘 익었다. 수확한 벼를 한데 모아보니 기대 이상이다. 5년 만의 풍년이라고 했던 작년보다 수확량이 더 많다고 했다. 박충기 농부는 "봄에 실수로 모를 덜 심었는데도 수확량이 많다"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만 그의 속은 표정과 달랐다. 쌀값 걱정 때문이다. 박씨는 "작년에 수확한 쌀이 수요에 비해 크게 과잉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부가 시장 격리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은 탓에 쌀값이 급락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태풍이 어떻게 되느냐가 올해 쌀 작황을 결정짓겠지만 지금까지는 전국적으로 벼가 잘 자라고 있어 쌀 공급과잉 현상이 작년보다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쌀값 1년 새 24% 하락…4년5개월래 최저
올 들어 쌀 가격 하락세가 심상치 않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정곡(도정한 쌀) 20㎏ 기준으로 산지 쌀값이 지난 15일 4만2522원을 기록했다. 작년 같은 날엔 5만5630원이었으니 딱 1년 만에 23.6% 떨어진 것이다. 2018년 3월 이후 4년5개월 만에 가장 낮은 가격이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산지 쌀값은 도매가격이다. 각 지역농협이 보유하고 있는 도정공장 즉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외부로 판매하는 가격 기준이다. 대형 마트나 슈퍼마켓, 식자재 업체들이 RPC에서 매입하는 쌀 가격인 셈이다. 농협 RPC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쌀은 대부분 작년 가을에 각 농가가 추수한 쌀을 순차적으로 매입한 물량이다. 농협 RPC가 각 농가에서 추수한 벼를 매입했을 때는 쌀 환산가격이 20㎏당 5만3000원 선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농협 RPC는 쌀을 팔 때마다 20㎏당 1만원 이상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팔리지 않고 창고에 남아 있는 쌀은 더 문제다. 농협이 보유하고 있는 쌀 재고는 7월 말 기준 41만t으로 평년에 비해 70% 정도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제 곧 본격적인 추수기가 다가오는 만큼 창고를 비워 놓아야 햅쌀(신곡)을 넣을 수 있는데, 자칫 창고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농민들도 마음이 무겁다. 작년엔 농협에서 비교적 좋은 가격을 받았지만 쌀 가격 폭락세가 지속되면 이제 곧 수확할 햅쌀을 말도 안 되게 낮은 가격에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다른 모든 물가가 올라 농자재, 인건비 등 생산 비용이 급증했다. 쌀값이 올라도 부족할 판에 폭락한다는 건 농민들에게는 한 해 농사를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 작년 쌀 생산량 11% 증가…5년 만의 풍년
올 들어 쌀값이 폭락한 것은 극심한 공급과잉 탓이다. 수요가 예상보다 더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생산은 기대 이상으로 늘다보니 공급과잉이 생각보다 너무 컸다.

우선 생산 쪽을 보면 작년 쌀 생산량은 388만2000t으로 전년 대비 10.7%가 늘었다. 쌀 생산량이 전년에 비해 10% 이상 늘어난 건 2004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직전에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연속으로 쌀 생산량이 줄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5년간 연속으로 줄어들던 쌀 생산량이 작년엔 왜 늘었는가 하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모처럼 풍년이었다. 쌀 풍년을 결정짓는 요소는 날씨다. 작년엔 큰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없어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이 늘었다. 작년 10a(약 300평)당 쌀 생산량은 530㎏으로 5년 만에 가장 많았다.

또 하나는 쌀 경작 면적의 증가다. 사실 우리나라는 의무수입 물량을 포함한 쌀 자급률이 실질적으로 100%를 넘어서기 때문에 벼 재배 면적을 지속적으로 줄여왔다. 논에 벼가 아닌 다른 작물을 심으면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을 주로 활용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른바 '쌀 생산조정제'를 통해 논을 휴경하거나 다른 작물을 심으면 ㏊당 평균 327만원을 지급했다. 벼 재배 포기를 독려해 쌀 수급을 맞추려는 인센티브 제도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관련 예산이 반영되지 않으면서 쌀 생산조정제가 중단됐다. 농민들은 짓기 쉽고 소득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쌀농사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2001년부터 매년 조금씩 줄어들던 쌀 재배면적이 작년에 20년 만에 처음으로 늘어난 건 쌀 생산조정제가 중단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 코로나19 여파 소비 감소 폭 예상보다 커
수요 쪽은 감소가 더 극적이다. 쌀 수요를 측정하는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2000년 93.6㎏에서 작년 56.9㎏으로 21년 만에 39.2% 줄었다. 같은 기간 529만1000t에서 388만2000t으로 26.6% 줄어든 쌀 생산량에 비해 감소 폭이 훨씬 크다.

그런데 코로나19를 거치며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직 공식 통계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농업계에서는 올해 1인당 쌀 소비량이 당초 예상치 54.8㎏보다 훨씬 적은 51.9㎏에 그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이 1년 새 5.0㎏ 줄어든다는 얘기다. 평소에 비해 감소 폭이 2~3배에 달하는 것이다. 농협의 한 관계자는 "작년과 올해 농협 RPC에서 나가는 쌀 물량이 2019~2020년에 비해 거의 20%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며 "쌀 소비 감소가 당초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큰 폭으로 소비가 줄어든 것은 코로나19로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줄면서 외식업계에서 소비되는 쌀의 양이 급감한 게 최대 요인으로 꼽힌다. 식당에서 나오는 잔반의 양이 줄어든 영향도 컸다는 분석이다. 가정에서의 음식 배달 수요가 늘긴 했지만 여기에서 소비되는 쌀의 양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함께 혼인·출산율 하락에 따른 인구 감소 영향, 그리고 1·2인 가구 증가에 따라 집밥 문화가 약화된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식습관의 서구화로 밥보다는 빵을 먹는 수요가 늘어난 데다 최근 들어 다이어트를 위한 '저탄고지'(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고기를 많이 먹는 것) 식문화가 확산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 쌀 재배 면적 줄이려는 정책적 노력 필요
우리가 쌀값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쌀이 차지하는 위상이 다른 농산물과는 차원이 달라서다.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51.8%가 벼농사를 짓고 있고, 전체 농가소득 중에서 농업소득의 33.9%가 쌀에서 나온다. 쌀값 안정이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 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상 쌀 자급률 100%를 달성한 우리나라에서는 쌀 재배 면적을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 타당하다. 더구나 쌀 소비는 빠른 속도로 줄고 있고, 단위면적당 쌀의 생산성은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전체 재배면적을 줄여도 식량안보를 지키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오히려 그렇게 줄어든 벼 재배지에 다른 작물을 심으면 전체적인 식량 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면에서 작년과 올해 쌀 생산조정제를 중단한 건 아쉬운 대목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내년엔 쌀 생산조정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예산당국과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쌀을 대신할 작물로는 콩이나 축산용 조사료가 가장 좋은 대안으로 꼽힌다. 콩만 해도 자급률이 30.4%(2020년)에 그친다. 조사료는 대부분 수입산을 사용하는데, 최근 들어 국제 가격이 크게 올라 축산농가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 조사료를 재배해 축산용으로 활용하면 농토의 효율적 이용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쌀 생산조정제와 같은 제도를 상시 운영하는 것이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학부 교수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지 않으면 경제 주체들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며 "쌀 대신에 다른 작물을 재배해도 충분한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신호를 일관되게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단기적인 시장 격리도 시기·물량이 관건
생산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쌀 수확량이 급증하거나 수요가 급감해 시장에서 쌀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되면 정부는 단기적인 대책으로 '시장 격리'를 활용할 수 있다. 시장 격리는 정부가 시중에서 쌀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규정은 양곡관리법에 명시돼 있다. 쌀이 3%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평년 대비 5% 이상 산지 쌀값이 하락하면 시장 격리를 실시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그러나 '시장 격리를 해야 한다'가 아니라 '시장 격리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보니 시장 격리 효과가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2017년에 있었던 37만t 시장 격리는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기대보다 많은 물량을 진행함으로써 쌀값을 열흘 만에 회복시켰다. 그런데 올해는 총 37만t 격리가 발표됐지만 2월과 5월, 7월로 세 차례 나눠 진행되다 보니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농민들이 '뒷북 격리'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최고의 시장 격리는 정부 예산을 들여 창고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대북 지원이나 해외 원조 등을 통해 완전히 나라 밖으로 빼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익명을 요구한 농업계 전문가는 "정부가 수천억 원을 들여 시장에서 격리한 쌀은 결국 창고에 3년 정도 보관되다가 사료용으로 처분되는 사례가 많다"며 "이때 워낙 저가에 판매되는 데다 보관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시장 격리에 투입한 예산의 90% 이상을 허공에 날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대북 지원이나 해외 원조 방식으로 완전한 시장 격리를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정책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대북 쌀 지원은 2007년에 보낸 국내산 15만t과 외국산 25만t이 마지막이었다.

▶ 분질미로 밀가루 대체하면 일석삼조 효과
쌀 수급 안정을 위해 새로운 쌀 품종 재배를 확대하는 방안이 시도되고 있어 주목된다. 신품종의 주인공은 바로 분질미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분질미는 돌연변이로 우연히 획득한 품종이다. 쌀과 밀의 가장 큰 차이는 전분 구조다. 이 구조가 쌀은 치밀하고 단단한 반면 밀은 성기고 느슨하다. 이 때문에 밀은 고운 가루로 쉽게 빻아져 가공이 쉬운 반면 쌀은 밀가루처럼 만들기 어려워 가공 성능이 떨어진다. 쌀로 떡이나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에 한참 불려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분질미는 쌀이면서도 전분 구조가 밀과 유사하다. 물에 불리지 않고 빻아도 가공 성능이 밀에 가깝게 나온다. 분질미에는 밀에 함유돼 있는 글루텐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단백질인 글루텐을 섭취하면 소화 장애 같은 부작용이 일부 나타날 수 있다. 최근 들어 글루텐 프리 식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추세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식품업계에서는 케이크나 카스텔라, 과자 등 비발효 빵류나 어묵, 소시지 등에 분질미 쌀가루를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질미의 또 다른 강점은 모내기 적기가 6월 말로 일반 쌀에 비해 한 달 정도 늦는다는 점이다. 겨울·봄 재배를 하는 밀은 보통 6월 중순께 수확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밀과 분질미는 충분히 이모작 재배가 가능하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기존 벼 재배지에 분질미를 심으면 쌀 생산 조정과 새로운 쌀 수요 증대를 노릴 수 있는 데다 이모작을 통해 밀 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만큼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분질미 재배 면적을 매년 확대해 2026년 4만2000㏊에서 20만t을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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