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다산 정약용, 창덕궁 근처에서 2km 전력질주한 사연

유석재 기자 2022. 8. 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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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던가?
정약용의 표준영정(왼쪽)과 윤지충의 초상화. 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이었으며 윤지충은 정약용 형제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다. /한국문화정보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최근 당선된 한 광역자지단체장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식위정수(食爲政首)’. ‘먹여 살리는 일이 정치의 첫째 할 일’이라는 뜻으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산이 이 말을 언급한 것은 ‘논어고금주’ 중 논어 자로편의 주석입니다. 고대 중국의 성인인 기자(箕子)가 이렇게 행동했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을 정말 다산의 사상이 담긴 말로 봐야 한 것인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인들이 이렇듯 자연스럽게 인용할 정도로 정치학의 사표(師表)로 여겨지는 인물이 조선 후기 최대 지성으로 평가 받는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러나 다산에게는 명백히 풀리지 않는 애매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던가?

▲다산이 유배시절을 보냈던 다산초당. 강진 사람들이 퇴락했던 초당을 지금의 형태로 다시 지었다.

다산의 집안은 순교자 가족이라 할 만큼 신자가 많았습니다. 셋째 형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돼 저 유명한 ‘자산어보’를 썼습니다. 다산 자신도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불후의 저서들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다산은 한때 천주교를 믿었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은 배교자(背敎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엔 ‘천주교에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서술이 나오는 등, 애초에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산 연구자 중 한 명이며 조선 후기의 바다와도 같은 고전과 문집 속 문장을 발굴·재해석해 온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정 교수는 최근 출간한 900여 쪽 분량의 연구서 ‘서학(西學), 조선을 관통하다’에서 이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다산은 천주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알려진 뒤에도 100%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간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의 저자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26일 서울 한양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2.07.26 /남강호 기자

정 교수는 천주교사 연구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로 강진 시절의 다산이 남긴 글을 보다가 젊은 시절로 올라가 보니, 천주교를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나 ‘다산의 천주교’는 국학과 천주교 양쪽에서 사각지대였습니다. 국학 연구자 쪽에선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듯 천주교 얘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천주교 쪽에선 이미 배교한 사람인데 무슨 얘기할 게 있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년기의 다산을 다룬 책 ‘파란’(2019)을 쓰다 보니 “다산의 천주교 관련 기록이 파도 파도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시적 기록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배척한 당시 조선의 서슬퍼런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天)에 상제(上帝)라는 인격신(神)의 성격을 부여하며 유학적 사유에 서학의 얼개를 장착한 다산의 사상을 천주교 없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그 ‘증거’가 이번에 하나 밝혀진 게 있다고 합니다. 아직 조선인 신부가 없던 시절, 조선에 입국한 첫 외국인 신부는 청나라 강소성 출신 주문모(1752~1801)였습니다. 1795년(정조 18년) 한양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체포될 뻔했습니다. 한영익이라는 배교자가 밀고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추격을 피해 달아나 그 뒤로 6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1795년 봄 서울에서 첫번째 부활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한 작품.

도대체 주문모 신부가 그때 어떻게 체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기존 역사에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진상이 이번 연구에 등장합니다. 한양의 천주교인들이 주문모 신부를 초빙한 곳은 계산동(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던 교인 최인길의 집이었습니다. 임금이 있는 창덕궁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1795년 6월 27일, 교인인 누이동생에게서 소식을 듣고 계산동을 찾아 주문모 신부를 만난 진사 한영익은 죄를 뉘우치고 교리문답을 받던 중 최인길 등에게 신부의 입국 경로를 자세히 물어봤습니다. ‘한영익이 그 짧은 방심의 허를 찔렀다’고 정 교수는 표현했습니다. 한영익은 그 길로 왕의 친위 조직인 별군청 관리었던 이석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이석은 영의정 채제공에게 보고했습니다. 놀란 채제공은 정조 임금에게 뛰어가 직보했습니다.

정조의 초상. photo 조선일보 DB

왕은 포도대장 조규진을 불렀습니다. “좌의정의 지시를 받아 은밀히 주문모를 체포해 오라!” 그러나 포도대장이 계산동 천주교당을 덮쳤을 때 이미 신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역관 집안 출신 최인길이 중국말을 하면서 주문모 신부인 척 시간을 끄는 동안 진짜 신부는 멀리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 계산동을 찾아 한영익의 밀고 사실을 알려 주고 주문모 신부를 황급히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그게 과연 누구였을까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단서는 참으로 뜻밖의 자료에서 불쑥 나오게 됩니다. 최근에야 번역돼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 천주교 문서가 있었습니다. 주문모 피신 사건으로부터 2년이 지난 1797년, 북경의 고베야 주교가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편지 속에 이런 얘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한영익)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武官)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신부님에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나서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조선 교회가 들였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일시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이 ‘무관’ 한 사람의 중거리 질주로 극복됐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무관의 복장. /나무위키

이 무관은 누구였을까요? 분명 그 시각 창덕궁에 있었으면서 한영익의 밀고를 인지했을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훗날 스스로 쓴 묘지명에 이런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북악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했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오역문지·吾亦聞之).”

한영익이 창덕궁 내 별군청에서 이석에게 주문모 신부 관련 사실을 밀고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무관’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나 또한 이를 들었다’고만 적었을 뿐 시침 뚝 떼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관복을 펄럭이며 왕복 2㎞를 전력질주하고 난 뒤 궁궐 구석에서 몰래 숨을 고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고베야 주교의 편지에서처럼 배교자였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1)과거 천주교 신자였으면서 (2)창덕궁의 밀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3)무관은, 이 사람 단 한 명 밖에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의 이복동생은 한영익을 계산동으로 이끈 천주교 신자 누이동생과 결혼하게 됩니다.

모든 자료가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킨 사람이 ‘그 무관’이었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무관은 누구였을까요?

다산 정약용 초상화. 조선일보DB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다산이 무관이었다니 이건 또 무슨 얘길까요?

사연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부승지였던 다산은 서학 문제로 비방을 받아 체직(벼슬이 바뀜)됐고, 부사직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의 교정 작업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조 임금 입장에서 급여는 줘야 하겠기에 임시로 내린 부사직이 바로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무관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 명목상의 무관으로서 무관 옷을 입고 궐내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이런 사건이 터졌던 것이죠.

이후 신하들이 도대체 어떻게 주문모가 피신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자 정조 임금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정약용이 알 것이다.”

드라마 '이산'의 정조(이서진). /MBC

임금도 사태의 내막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쯤해서 사건을 덮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정민 교수는 지난해 “순교지 윤지충의 무덤 지석(誌石)의 글씨를 조사해 보니 다산이 쓴 것이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할 수 없다며 배교한 뒤에도 다산이 신앙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란 얘깁니다. “배교했다고 해서 신앙을 10대0으로 없애버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산에게서 7대3에서 5대5까지 여전히 신앙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저는 신자가 아닙니다). 아마도 다산은 이성적으로는 더 이상 천주교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감성적으로는 차마 저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고베야 신부가 편지에서 쓴 ‘무관이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려 했다’는 것은 다산의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거나 무의식의 영역에 있었던 것을 당시 천주교 입장에서 해석한 내용이었겠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영익의 밀고를 듣자마자 자신의 안위 따위는 돌아볼 새조차 없이 목숨을 걸고 감행한 2㎞ 전력질주는 33세의 젊은 다산이 머리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인 결과였을 것입니다.

다산 유적지에 있는 정약용 선생의 동상.

사상적으로 더 이상 서학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이미 서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고, 과거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교인들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 역시 없앨 수 없었던 것이겠죠. 인간적인 면모를 물씬 풍기면서도 어쩌면 회색지대에 있었다고 해야 할 이 사람이 바로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과연 격동의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천주교는 거대한 화산재로 덮인 폼페이 유적이었다.” 많은 기록이 가려지고 사라졌지만, 양반과 종이 절대자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은, 도덕과 윤리, 신분제도, 왕조의 시스템 자체를 뿌리부터 뒤집는 것이었고, 많은 지식인들의 사상에 은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입니다. 그 ‘순교의 역사’가 세도정치를 뒤집는 ‘변혁의 역사’로서 자리잡을 수만 있었다면 한국근대사의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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