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개정 안 해도..정부 고시만 바꾸면 3만 가구 공급 가속화 [집슐랭]
公기관 '검증'에 3만 가구 발목
국토부 고시만 개정하면 해결
윤석열 정부가 16일 첫 주택 공급 정책을 내놓은 가운데 국토교통부의 고시 개정만으로 당장 서울 핵심 입지에서 3만 가구 수준의 공급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재건축 규제 완화를 위해 꺼내든 ‘안전진단 적정성 검토’ 기준의 변경은 법 개정 대신 국토부 고시를 바꿔 신속히 정책을 구현할 수 있다. 만약 이를 실천할 경우 서울에서만 최소 18개 단지, 약 3만 가구의 재건축 시계가 1년 가까이 빠르게 돌 수 있게 된다. 이번 8·16 대책에 포함된 여러 방안들이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거쳐야 하는 사항이기에 손쉽게 추진 가능한 정책부터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서만 최소 3만 가구 공급 빨라져=18일 홍기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한국건설기술연구원·서울시·양천구청에 따르면 현재 재건축 안전진단 적정성 검토 단계에 막혀있는 재건축 단지는 서울에서만 18개 단지, 2만 9453가구에 달한다. 앞서 언급한 안전진단 적정성 검토에 관한 고시 변경, 그리고 이를 통한 규제 완화가 이뤄질 경우 직접적인 수혜가 예상되는 곳들이다. 이들 단지를 살펴보면 지난해까지 적정성 검토를 담당 기관에 신청했지만 아직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재건축 추진이 중단된 단지가 14곳, 2만 2609가구, 탈락 우려 등으로 적정성 검토를 미룬 단지가 4곳, 6844가구다.
적정성 검토는 크게 분류했을 때 ‘기본계획 수립→안전진단→정비구역 지정→추진위 설립→조합 설립→사업시행인가→관리처분인가’ 등으로 이어지는 재건축 추진 과정 중 안전진단에 포함된 초기 단계다. 재건축 안전진단 시 ‘예비안전진단’이라고도 불리는 기초자치단체의 현지조사를 첫 단계로 통과하고 나면 기초자치단체장 의뢰 하에 정밀안전진단을 두 번째 단계로 거치게 되는데 정밀안전진단에서 ‘조건부 재건축’ 판정을 받으면 정부가 지정한 공공기관(한국건설기술연구원·국토안전관리원)의 적정성 검토를 받아야 한다.
현행 적정성 검토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담당 단지 기준 2018년 3월부터 지난해까지 서울에서 검토를 신청한 15개 단지 중 3개 단지만이 지금까지 최종 통과 통보를 받았다. 허들이 높은 셈이다. 게다가 적정성 검토에서 탈락하면 안전진단 과정 전체를 다시 밟아야 할 수 있어 일부 단지에서는 검토 신청을 일부러 미루기도 한다. 이미 검토 신청을 한 단지에서는 담당 기관에 필요한 자료 제출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속도를 늦추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까지 적정성 검토를 신청한 단지 다수가 아직까지 결과를 통보 받지 못한 것에 대해 검토를 담당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검토를 미루기 위해 재건축 예비추진위에서 자료 제출을 미흡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구체적 사례를 보면 서울 양천구 신월동 ‘신월시영(2256가구)’은 2020년 12월 적정성 검토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담당 기관에서 검토 중이다. 지난해 2월 검토 신청을 한 양천구 목동신시가지7단지와 4월 신청서를 접수한 목동신사가지 1·2단지도 마찬가지다. 목동신시가지 8·12단지는 정밀안전진단을 통과하고도 적정성 검토를 신청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까지 검토 의뢰를 했으나 아직 결과지를 받아들지 못한 재건축 단지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담당 단지 기준으로만 9곳, 1만 3351가구에 달한다.
또 다른 검토 기관인 국토안전관리원은 내부 지침을 이유로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 지자체 등을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국토안전관리원은 지난해까지 서울 양천구에서만 최소 5개 단지, 9258가구 검토 의뢰를 받고도 아직 결과서를 내놓지 않았다. 양천구 목동·신정동 일대에 있는 목동신시가지 3·4·5·10·13단지 등이다. 기준을 서울 전역으로 확대하면 답보 상태에 있는 재건축 단지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앞서 기사 서두에 언급된 ‘3만 가구’는 보수적으로 집계한 수치다.
정부는 이번 8·16 대책에서 현행 재건축 안전진단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적정성 검토를 지자체가 요청하는 경우에만 시행하도록 하는 제도 개편안을 내놓았다. 업계에서는 지자체장이 재건축을 바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쉽지 않아 개편안이 시행될 시 적정성 검토가 사실상 사라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임병철 부동산R114 리서치팀장은 “지역 주민의 뜻에 반해 적정성 검토를 신청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사실상 적정성 검토 단계가 사라지게 되면서 공급 속도가 빨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수민 NH농협은행 All100자문센터 부동산전문위원도 “상당수 단지의 진행 속도가 빨라져 공급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시 한 문장만 바꾸면 규제 완화 실현 가능=한편 8·16 대책에 포함된 내용 상당수(총 12개 사안)는 법률을 제·개정해야 하는 만큼 적정성 검토 기준의 완화가 지닌 파급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정부가 도심 핵심 입지에 공급 물량을 확대하기 위해 꺼내든 ‘재건축 부담금 감면’과 ‘민간 도심복합개발사업’은 각각 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을 개정하거나 도심복합개발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신규 정비구역을 지정하고 신탁사가 정비사업 시행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도시정비법을 개정해야 실현시킬 수 있다.
반면 적정성 검토 제도 개선은 국토부 고시 개정만으로 가능하다. 안전진단과 관련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법령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인데 본법과 시행령 모두에 적정성 검토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강행 규정이 없다. 강행 규정은 하위 법령인 ‘주택 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 기준’에 있는데 이는 국토부 고시다. 정부 판단에 따라 비교적 쉽게 제도 개선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도정법 13조 2항은 ‘시·도지사는 필요한 경우 국토안전관리원 또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안전진단 결과의 적정성에 대한 검토를 의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법 시행령 11조 1항은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국토교통부 고시인 ‘주택 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 기준(안전진단 기준)’ 1장 총칙 내 ‘1-4-4’ 규정은 조건부 재건축을 ‘(전략) 규정에 따라 안전진단 결과보고서의 적정성 검토를 통해 재건축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조건부 재건축을 받을 시 적정성 검토를 받도록 규정하며 본법에는 없는 강제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 정부 집권기인 2018년 2월 안전진단 규제 강화 조치가 이뤄졌을 때 국토부는 고시 개정을 통해 제도 개편을 현실화했다. 당시 국토부는 ‘국토교통부 고시 제2018-141호’를 내놓았는데 이전까지는 안전진단 기준 내 조건부 재건축 규정에 적정성 검토 관련 언급이 없었다. 이 고시를 통해 '(조건부 재건축은) 규정에 따라 안전진단 결과보고서의 적정성 검토를 통해 재건축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고시에 추가되며 적정성 검토 의무화 제도가 법제화됐다. 한 문장으로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가 실현된 것이다.
김기용 국토교통부 주택정비과장은 “2018년 당시 고시 개정만으로 제도 개편을 한 것이 맞는다"며 “변수는 있지만 이번에도 기본적으로 고시 개정을 통해 적정성 검토 제도 개선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수혜 가구 수십만 가구 달할 것"=제도 개편이 현실화될 시 서울에서 수혜를 입는 가구는 앞서 언급된 약 3만 가구 외에도 수십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서울에서 준공 연한 30년을 넘겨 재건축 추진이 가능한 가구 수는 42만 7204가구다. 이 중 11만 8013가구가 현재 재건축 단계에 들어서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어림잡아 약 30만 가구의 재건축 추진이 제도 개편으로 인해 추후 빨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언급된 수치는 모두 현재 가구 수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 통상 재건축을 통해 전체 가구수가 기존 대비 130% 수준으로 증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파급 효과는 더 클 수 있다. 정비사업 전문가인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2차 정밀안전진단(적정성 검토) 완화는 이번 정책의 ‘키 포인트’ 중 하나였지만 현실화 여부가 관건이었다”며 “국토부 고시 개정만으로 추진할 수 있다면 지금 답보 상태에 있는 수만 가구 외에도 잠재적인 재건축 추진 단지 수십만 가구에 영향을 미쳐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지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제도 개선 시기가 늦어질수록 정책 효과는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제도 개편을 염두에 두고 적정성 검토를 계속 미루는 단지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건축 준비 단계에 있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촌아파트’의 유상근 재건축추진단장은 “적정성 검토를 신청할지 말지 망설이는 단지들은 당장 사업 진행을 멈추고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공급 대책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약속했던 아파트 리모델링 활성화 정책이 빠져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전국 곳곳에서 리모델링 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약속했던 제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리모델링 추진 단지 가운데 재건축으로 방향을 돌리는 사례도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선 공약 ‘리모델링 제도 개선’ 대책서 빠져=18일 정비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가 전날 발표한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에는 윤 대통령의 부동산 공약 중 하나인 신속한 리모델링 추진을 위한 법적·제도적 개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대책은 정부의 첫 부동산 대책으로 단순 주택 공급을 넘어 정주 환경 개선, 주택 품질 제고 등 5년 임기 내 추진할 주요 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재개발·재건축과 함께 주요 정비사업으로 꼽히는 리모델링 관련 내용은 단 하나도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리모델링 활성화를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주택법과 별도로 ‘리모델링 추진법’ 제정 △안전진단 및 안전성 평가 절차 개선 △리모델링 수직·수평 증축 기준 정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주택법과 건축법 등 흩어져 있는 법적 근거를 하나로 통합해 사업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업계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또 국토안전관리원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 공공기관 두 곳에서만 리모델링 안전성 평가를 진행하도록 한 현행 규제 탓에 인허가 절차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으로 기대했던 제도 개선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업계는 실망하는 모습이다. 이동훈 한국리모델링협회 정책법규위원장은 “주택법에서 리모델링을 별도로 분리해 독립된 법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3년 전부터 나온 얘기”라며 “신축을 위한 법인 주택법 체계는 리모델링과 맞지 않는 옷”이라고 지적했다.
◇리모델링 동력 떨어질까 시장 우려=리모델링은 지난 정부의 재건축 규제로 대체 사업으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리모델링은 재건축과 달리 초과이익환수 대상이 아닌 데다 준공 15년 이상, 안전진단 B·C등급만으로도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 이에 리모델링 추진 단지는 서울 등 수도권을 넘어 지방 도시 등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리모델링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리모델링 추진 단지는 전국 131곳으로 전년 동기(78곳) 대비 2배 가까이 늘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리모델링 초기 단계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추진 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재건축 완화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리모델링에서 재건축으로 이탈하는 단지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다음 달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개편안을, 올해 말까지는 재건축 안전진단 개선안을 발표하기로 했다. 해당 규제 완화로 재건축 추진이 수월해지고 사업성까지 높아진다면 리모델링을 추진할 유인이 줄어든다.
서울 구로구의 한 리모델링 조합장은 “정부의 재건축 규제 완화에 따라 사업을 전환해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규제 완화 시행 시기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선뜻 재건축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2008년 조합 설립을 마친 서울 강남구 개포동 ‘대치2단지’에서도 일부 조합원들이 재건축 추진을 위해 리모델링 사업 철회를 위한 동의서를 걷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는 앞으로 리모델링 제도 개선 방안도 함께 검토할 방침이다. 현재 국회에 ‘리모델링 특별법’ 제정안이 발의돼 있는 만큼 입법 논의에 적극 나서겠다는 설명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번 대책은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한 대책으로 리모델링으로 늘어나는 주택 물량은 한정적이라 대책에서 빠진 것”이라며 “국회 법안 논의 과정에서 리모델링 관련 공약 사항들도 함께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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